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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와 연혁| 개항전·후사 | 교육.문화.경제 | 8.15 전·후 |

향토의 고대사와 개항전후사

태고의 북한은 옥저 종족의 선주지로서 고조선의 일부로 되었던바 중국에 있어서의 한의세력이 한반도에까지 미치자 현토군을 여기에두고 함흥이 그 중심지였다 . 그 후 고구려가 되었다가 신라의 반도통일과 더불어 고려가 되었고 다시 이조가 되는 동안에는 말갈족의 발해와 부여족의 숙진의 일부로 되었던 때도 있었다 .

이밖에도 혹은 여진이 발호한 때도 있었고 또 만주에서 일어난 금과 원의 세력이 관북지방에까지 도량한 일도 있었다 . 이처럼 대륙의 민족이 반도를 위협하는 통로로 되었던 사실은 두만강반 기타의 많은 고 성지 와 유적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

원산항의 과거는 덕원부의 일부로서 봉수동이라고 부르는 일개 어촌이 었다 . 덕원은 고구려의 천정군이었으며 또는 어을매라고도 칭하였다 .

신라때에는 정천군 또는 동모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용주라 하였으며 이조때에는 선주 또는 의천이라고 불러 왔던 바 세종 19 년에 비로서 덕원으로 개칭하였다 .

 

덕원은 고려시대에 이조의 선조였던 목왕으로부터 3 대동안 거주하였던 땅이라고 이조대에 군이라고 칭하지 않고 소위 [ 한일합방 ] 의 일본침략이 시작된 1910 년 9 월 지방관제 발포전까지 덕원부로 칭하였다 .

 

이태조의 선조인 3 대 거주지는 원산시가지의 서방 10 리쯤에있는 신적전천 서안 산록의 일소촌인 용주리로서 원산개항예약중에는 이 용주리에 일본인의 출입을 엄금하기로 약정되었었다 .

 

1910 년 10 월 조선총독부가 지방관제를 실시하게 되자 덕원부를 없애고 원산부로 개칭하였다 .

1914 년 4 월에 부제실시와 더불어 덕원군을 덕원에 두어서 전원산부의 대부분을 그 관할하에 두고 일인들의 전관거류지 및 원산리부근만을 합하여 0.437 방리의 지역만을 원산부로 하였다가 그 뒤 점차로 원산부세가 확장되면서 다시 덕원군의 대부분을 원산부에 편입하게 되어 덕원군을 폐군하고 그 다른일부는 문천군에 편입하였다 .

 

1. 개항전사

 

소위 원산개항은 서기 1876 년 한일수교조약에 의하여 함경도에 개항지를 선정키로 되어 동해안의 가장 큰 항만인 당시의 원산진 봉수동 을 결정하여 일본인의 전관거류지로 정하게 되었다 .

 

그런데 고려 때부터 일본의 해적들은 동해안일대에 빈번히 출몰발호하여 그 피해가 심대하였던 것으로 사기에 보면 고려 공민왕 21 년에 안변 , 함흥 , 북청등지를 침략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일본해적은 영흥만을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 그 뒤 50 여년간 계속하여 강원 , 함경 양도의 연안에 무수히 일본 해적이 침범하여 왔으니 각 군읍지에 [ 왜구가 지나간 곳은 초목이 마르고 계견도 모두 없어진다 ] 고 씌어진 것을 보면 그 옛날부터 일본해적들의 침략수탈이 얼마나 혹심하였음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

 

원산시가지 배후에 있는 장덕산에 봉수대를 쌓고 왜구를 경계하였던 것이 봉수동의 명칭으로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군이 함경도로 진군하매 남도병사 이혼이 철려을 지켜 싸우다 패퇴하니 일군은 안변까지 쳐들어와서 다시 북진 , 북도병사 한극성과 해타창에서 대전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해타창은 곧 원산리로서 창전동에 그 유지가 있다고 한다

 

개항사

 

서기 1875 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를 포격함으로써 발단된 강화도사건으로 말미암아 익년 1876 년 2 월 26 일 강화도에서 한일수교조약을 체결케 되었다 . 이 수교조약중 한국은 일본에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함경 5 도의 연해 가운데 통상에 편리한 항구 2 개소를 선택하여 개항하기로 되었으니 원산의 개항은 이 조약에 유인한 것이다 .

 

1879 년 가을 공사 화방의질과 총영사 전내헌길등은 일본상인 14 명과 더불어 군함 고웅호를 타고 영흥만에 회항하여 한국정부 입회하에 영흥만내 각처를 순시한 뒤에 일본의 통상무역과 전관거류지로 가장 적당한 곳을 탐사하였다 . 그리하여 봉수동 을 선정하고 개항장으로 결정을 보았으며 그 익년인 1880 년 4 월에 일본영사관과 상인들이 내도하여 준비에 착수 , 동년 5 월 23 일에 영사관을 개청하였다 . 그리하여 일제시에는 매년 5 월 23 일을 개항기념일로 삼았던 것이다 .

 

 

2. 개항후사

 

한국과 일본간의 통상무역을 처음으로 개시한 것은 부산항의 개항을 결정한 서기 1876 년이 었으니 원산개항보다 3 년전 일이었다 . 그러나 부산항은 일본과 조선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족리시대부터 상거래를 하여왔기 때문에 그 계승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원산개항으로 말미암은 무역개시가 한일무역의 효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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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국의 오랜 쇄국주의로부터 바다를 건너 일본과의 무역통상이 원산개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원산개항후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이주권장과 그 발전책을 위하여 오래 부심 노력하였다 . 즉 일인들의 전관거류지내의 가옥건축을 위한 부조금 대도규칙을 제정하였고 그 밖에 병원 , 동본원사의 사원 등을 건설하였다 .

 

그리하여 일본인의 한국침략은 점차 합법적으로 적극성을 띠어옴에 반하여 한국인의 배일사상도 또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

 

다음에 그 한가지 실례를 야사를 통하여 열거하고자 한다 .

 

원산개항 3 년 뒤인 1882 년의 일이었다 . 그 해 4 월 일인 연원 헌성이라는 자가 원산에 있었는데 그는 한국어에 능통하였다 .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과의 무역을 하기 위하여는 한국민에 접근하고 한국내 사정을 잘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연원헌성을 통역으로 세워서 원산부근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일본인 수명이 안변까지 나갔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드디어 피살되었다 . 그러나 당시 일본인은 그 전관거류지로부터 10 리밖에는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있었으므로 이 일인살해사건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 이처럼 원산개항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부터 한국인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며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니 이때부터 배일사상이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
.

서기   1882 년 수도 경성에 임녀군난이 일어남과 때를 갈이하여 원산에서도 일인추방의 소리가 점차 고조되자 일본인들은 그에 겁을 먹고 방어책에 부심하였다 .

 

1883 년 1 월에 인천개항이 실시되면서 원산에서 이미 지반을 잡았던 대상점들 가운데서도 인천으로 이주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 .

 

일인들은 동년 7 월 체결된 수호조약에 의하여 종래 거주제한 간행리정 10 리를 50 리로 늘여서 그 활동범위를 확대함에 따라 동해안 특히 강원도 연안에서 어업에까지 종사하는 자가 생기는 등 차츰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

 

서기 1884 년 2 월 1 일 소위 최혜국조약에 의하여 원산항은 일본뿐 아니라 각 국의 시장으로 되어 세관사무를 개시하였으니 처음으로 영국인 [ 라이트 ] 가 세관장이 되었다 .

 

1884 년 5 월에 일본인들은 동본원사에 소학교육소를 설치하였으며 또 그들의 여행왕래 간행리정을 남북 각백리로 확장하며 비로소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1886 년에 일본인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재류일본인취체규칙을 발포하였다 . 이로 인하여 일본인 남자 2 명과 여자 7 명의 퇴거를 명하여 한국에서 쫓겨나가게 되었다 .

 

1889 년 2 월 함경도 감사 ( 관찰사 ) 조겸식은 일본인 입국 수년이래 대두매매가 성황을 이루고 대량으로 일본에 수출되는 데 감하여 일본상인의 구매대두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 이에 일인들은 그 영사관을 통하여 항의를 하여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일본인에게는 팔지 말도록 소위 [ 방곡령 ] 을 발포하였다 .

 

이 방곡령발포와 더불어 일인들의 횡포가 자심하게 되었으며 법령을 위반하여 일인과 거래하는 한국상인들의 한국곡물에 대한 무역의 야욕은 끊이지게 되었다 .

 

1889 년 3 월 일본우선회사의 기선 고천수환이 원산항을 경유하여 로령포염덕에 항로를 개시하게 됨으로써 원산우체국은 로령포염덕과의 우체교환사무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

 

1889 년 11 월 전기 방곡령사건으로 곡물무역을 하지 못하게 된 일본인들은 진정위원을 선출하여 재경성 일본공사에 파송하고 그 해제를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 그리하여 방곡령해제에 대한 승인을 얻었으나   조겸식 함경도감사는 여전히 일인들의 횡포를 단속하고 대두매매를 금지하였었다 . 당시 일인들의 조사통계에 의하면 1889 년 1 년간에만도 일본인의 피해인원 41 명 손해금액 14 만 7 천 168 원에 달한다고 발표하였다 .

 

1890 년 1 월에 한일통어규칙협정이 성립되어서 일본인 어민의 이주자가 원산에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

 

1890 년 4 월에 또다시 방곡사건에 대하여 당시 원산상업회의소를 통하여그를 해제토록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 그 해 함경도 감사 조겸식은 충청도로 전임되고 한 장석이 신임감사로 부임하였으나 여전히 방곡해금은 되지 않아 일본인의 진정을 들어 주지 아니 하였다

 

전보통신개시

 

1891 년 7 월 원산우체사내에 처음으로 전보사를 설치하여 비로소 전신사무를 취급하게 되었으나 한글을 비롯하여 한자와 영문만을 취급하고 일어는 취급치 아니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의 불평이 많았었다 . 이 원산에서의 전보취급은 당시 경성까지 도보로 일주일간의 걸려야 연락이 되었을 때 통신상 신기원을 획하였다 하겠다 .

 

방곡령과 원산

1892 년 1 월 일본정부는 또다시 원산의 방곡사건을 해금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하여 왔다 . 원산거류 일본인들이 대표를 선출하여 상경 한국정부에 진정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이를 일축하였다 . 그러나 동년 3 월 한국정부는 함경도의 방곡사건에 대하여 실지조사할 것을 상약하였다 .

 

익년인 1893 년 5 월 19 일 방곡사건의 종결을 보게 되었다 . 원산에 있던 일본인들은 이 방곡사건으로 인하여 수만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그 뒤 발표하였다 .

 

3. 청일전쟁과 원산

 

1894 년 청일전쟁이 발발되자 일본군은 제 5 사단야포대와 보병을 실은 함선이 원산에 입항상륙하게 되니 원산은 마치 청일전쟁의 책원지같은 느낌이었다 . 이해 9 월 일본군은 원산에 수비대를 두었다 .

이리하여 원산에 있어서의 방곡사건으로 말미암은 한일간의 분규가 해결을 보지 못하게되자 곤경에 빠진 일본은 1891 년 2 월 그 외무성 관리 석정국차랑을 원산에 직접 파송하여 일개월간 내용을 조사하여 한국정부에 방곡해금을 재탄원하였던 것이다 .

 

로국포경선 입항

 

1894 년 2 월 로국포경선이 처음으로 원산에 입항하였다 . 당시 일본의 세력과 더불어 로국 또한 한국에 침을 흘려서 남진정책을 로골적으로 들어 내고 있었으니 백두산 삼림과 울릉도 입목의 채벌권을 로국이 획득하고 있었으며 로국포경선의 입항도 그 세력의 과시라고 하겠다 .

 

이처럼 로국과 일본은 한국을 무대로 이권획득에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며 한국민은 배일사상이 점고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본의 북한침략의 첫발판이 되었던 원산을 중심으로 일본인 증오의 감정은 한층 불꽃이 불어오르기 시작하였다 .

 

원산거류 일인오명 고성군 령진서 소살

 

1896 년 2 월 원산에 거류하던 일본인 5 명이 마른 정어리를 사러 강원도 동해안으로 갔는데 고성군령진에서 어민들과 충돌이 생겨 드디어는 소살까지 당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그때부터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인에 대하여 심악하게 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900 년에 일인들이 처음으로 [ 원산시사 ] 라는 신문을 발행하였으나 경영부진으로 얼마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

 

1902 년에 성진을 개항하게 되어 원산거주 일본인들 가운데 성진으로 이주하는 자가 많았다 . 일인들은 한국산 콩을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다대한 이익을 보게 되어 [ 대두조합 ] 을 조직하고 그 구매에 격렬한 경쟁을 하면서 한국인과의 사이에 항상 시비가 끊길 사이 없이 벌어졌다 .

 

일본과의 순환항로 개시

 

1902 년 3 월 일본과의 순환항로가 개시되었다 . 즉 일본 대판의 대가기선 개선환이 대판 , 부산 , 원산 , 우라지보스톡 , 오다루 , 하고다데 등의 제항을 3 주간에 1 회씩 정기순회기항하게 되었다 .

 

일본 수비대 준공

 

1902 년 8 월 일본은 원산수비대의 영구병영을 장덕산남록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그 익년 10 월에 준공하였으니 청일전쟁시에 일시적으로 원산에 상륙하였던 일군이 한국에의 침략토대를 무력으로써 확보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

 

원산 대판간 정기항로

 

1902 년 9 월 일본의 대판상선회사가 처음으로 그 스미다가와마루으로써 2 개월 5 회의 원산 , 대판간 정기항해를 열었다 . 이것이 정기항로의 효시이다 .

 

일간신문의 효시

 

1903 년 1 월 과거에 폐간되었던 [ 원산시사 ] 신문을 일인들이 재 발행하였으니 이것이 원산에서는 일간신문으로서 처음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

 

일본인들은 한국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서 정기항로 , 각종 신문화를 수입 또는 창설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이나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이와 더불어 1903 년 7 월에는 [ 도정 ] 에 유각지까지 설정하는 등 악습폐풍까지 끌어 들여왔던 것이다 .

 

4. 로일전쟁과 일군의 횡폭

 

1904 년 초부터 로일간의 풍운이 급박해지면서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2 월 5 일 로국과 일본과의 담판이 결열되고 동년 2 월 11 일에 드디어 로일간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발발하여 민심은 3 월 1 일 일본 육군 보병제 37 연대의 1 개대대가 경성에서 래원하여 주둔 수비하게 되어 이때부터 원산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총검으로 위협과 압박은 극심하였다 .

 

 

鄕土의 古代史와 開港前後史

太古의 北韓은 옥저 種族의 先住地로서 古朝鮮의 一部로 되었던바 中國에 있어서의 漢의세력이 韓半島에까지 미치자 玄兎郡을 여기에두고 咸興이 그 中心地였다 . 그후 高句麗가 되었다가 新羅의 半島統一과 더불어 高麗가 되었고 다시 李朝가 되는 동안에는 靺鞨族의 渤海와 夫餘族의 肅진의 一部로 되었던 때도 있었다 .

이밖에도 혹은 女眞이 跋扈한 때도 있었고 또 滿洲에서 일어난 金과 元의 勢力이 關北地方에까지 도량한 일도 있었다 . 이처럼 大陸의 民族이 半島를 威脅하는 通路로 되었던 事實은 豆滿江畔 其他의 많은 古城址와 遺跡等으로 分明히 알 수 있다 .

元山港의 過去는 德源府의 一部로서 烽燧洞이라고 부르는 일개 漁村이 었다 . 德源은 高句麗의 泉井郡이엇으며 또는 於乙買라고도 稱하였다

新羅때에는 井泉郡 또는 東牟郡으로 改稱하였고 高麗에 이르러서는 湧珠라 하였으며 李朝때에는 宣州 또는 宜川이라고 불러 왔던 바 世宗 19 年에 비로서 德源으로 改稱하였다 .

 

德源은 高麗時代에 李朝의 先祖였던 목왕으로부터 3 代동안 居住하였던 땅이라고 李朝代에 郡이라고 稱하지 않고 所謂 [ 韓日合邦 ] 의 日本侵略이 始作된 1910 年 9 月 地方官制 發布前까지 德源府로 稱하였다 .

 

李太祖의 先祖인 3 代 居住地는 元山市街地의 西方 10 리쯤에있는 新赤田川 西岸 산록의 一小村인 湧珠里로서 元山開港豫約中에는 이 湧珠里에 日本人의 出入을 嚴禁하기로 約定되었었다 .

 

1910 年 10 月 朝鮮總督府가 地方官制를 實施하게 되자 德元府를 없애고 元山府로 改稱하였다 .

1914 年 4 月에 府制實施와 더불어 德源郡을 德源에 두어서 前元山府의 大部分을 그 管轄하에 두고 日人들의 專管居留地 및 元山里附近만을 합하여 0.437 방리의 地域만을 元山府로 하였다가 그 뒤 漸次로 元山府勢가 擴張되면서 다시 德源郡의 大部分을 元山府에 編入하게 되어 德源郡을 廢郡하고 그 다른일부는 文川郡에 編入하였다 .

 

1. 開港前史

 

所謂 元山開港은 西紀 1876 年 韓日修交條約에 의하여 咸鏡道에 開港地를 選定키로 되어 東海岸의 가장 큰 港灣인 當時의 元山津 熢燧洞을 決定하여 日本人의 專管居留地로 定하게 되었다 .

 

그런데 高麗 때부터 日本의 海賊들은 東海岸一帶에 頻繁히 出沒跋扈하여 그 被害가 甚大하였던 것으로 史記에 보면 高麗 恭愍王 21 年에 安邊 , 咸興 , 北靑等地를 侵略하였다고 記錄되어있는데 이 日本海賊은 永興灣을 根據地로 삼았던 것이다 . 그 뒤 50 餘年間 繼續하여 江原 , 咸鏡 兩道의 沿岸에 無數히 日本 海賊이 侵犯하여 왔으니 각 郡邑地에 [ 倭寇가 지나간 곳은 草木이 마르고 鷄犬도 모두 없어진다 ] 고 씌어진 것을 보면 그 옛날부터 日本海賊들의 侵略收奪이 얼마나 酷甚하였음을 可히 짐작 할 수 있다 .

 

元山市街地 背後에 있는 長德山에 熢燧臺를 쌓고 倭寇를 警戒하였던 것이 熢燧洞의 名稱으로 지금까지 傳하여 내려오고 있다 .

 

壬辰倭亂 當時 加藤淸正軍이 咸鏡道로 進軍하매 남도병사 李渾이 鐵領을 지켜 싸우다 敗退하니 日軍은 安邊까지 쳐들어와서 다시 北進 , 北道兵士 韓克誠과 海打倉에서 對戰하였다고 傳하는데 이 海打倉은 곧 元山里로서 倉前洞에 그 遺址가 있다고 한다

 

開港史

 

西紀 1875 年 日本 軍艦 雲揚號가 江華島를 砲擊함으로써 發端된 江華島事件으로 말미암아 翌年 1876 年 2 月 26 日 江華島에서 韓日修交條約을 締結케 되었다 . 이 修交條約중 韓國은 日本에 京畿 , 忠淸 , 全羅 , 慶尙 , 咸鏡 5 道의 沿海 가운데 通商에 便利한 港口 2 個所를 選擇하여 開港하기로 되었으니 元山의 開港은 이 條約에 由因한 것이다 .

 

1879 年 가을 公使 花房義質과 總領事 前內獻吉等은 日本商人 14 名과 더불어 軍艦 高雄號를 타고 永興灣에 回航하여 韓國政府 立會下에 永興灣內 各處를 巡視한 뒤에 日本의 通商貿易과 專管居留地로 가장 適當한 곳을 探査하였다 . 그리하여 熢燧洞을 選定하고 開港場으로 決定을 보았으며 그 翌年인 1880 年 4 月에 日本領事館과 商人들이 來到하여 準備에 着手 , 同年 5 月 23 日에 領事館을 開廳하였다 . 그리하여 日帝時에는 每年 5 月 23 日을 開港紀念日로 삼았던 것이다 .

 

 

2. 開港後史

 

韓國과 日本間의 通商貿易을 처음으로 開始한 것은 釜山港의 開港을 決定한 西紀 1876 年이 었으니 元山開港보다 3 年前 일이었다 . 그러나 釜山港은 日本과 朝鮮海峽을 사이에 두고 日本의 足利時代부터 商去來를 하여왔기 때문에 그 繼承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元山開港으로 말미암은 貿易開始가 韓日貿易의 嚆矢라고 하여도 과언 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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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韓國의 오랜 鎖國主義로부터 바다를 건너 日本과의 貿易通商이 元山開港으로부터 始作된 것이다 .

 

元山開港後 日本政府는 日本人의 移住勸 ? 과 그 發展策을 爲하여 오래 腐心 努力하였다 . 즉 日人들의 專管居留地內의 家屋建築을 위한 扶助金 貸渡規則을 制定하였고 그 밖에 病院 , 東本願寺의 寺院 등을 建設하였다 .

 

그리하여 日本人의 韓國侵略은 漸次 合法的으로 積極性을 띠어옴에 반하여 韓國人의 排日思想도 또한 高潮되기 始作하였다 .

 

다음에 그 한가지 實例를 野史를 통하여 列擧하고자 한다 .

 

元山開港 3 年 뒤인 1882 年의 일이었다 . 그 해 4 月 日人 蓮元 憲城이라는 자가 元山에 있었는데 그는 韓國語에 能通하였다 . 당시 日本人들은 韓國과의 貿易을 하기 위하여는 韓國民에 接近하고 韓國內 事情을 잘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蓮元憲城을 通譯으로 세워서 元山附近에 자주 出入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日本人 수명이 安邊까지 나갔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드디어 被殺되었다 . 그러나 當時 日本人은 그 專管居留地로부터 10 리밖에는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있었으므로 이 일인살해사건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 이처럼 원산개항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부터 한국인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며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니 이때부터 배일사상이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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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82 년 수도 경성에 임녀군난이 일어남과 때를 갈이하여 원산에서도 일인추방의 소리가 점차 고조되자 일본인들은 그에 겁을 먹고 방어책에 부심하였다 .

 

1883 年 1 月에 仁川開港이 實施되면서 元山에서 이미 지반을 잡았던 大商店들 가운데서도 仁川으로 移住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 .

 

日人들은 同年 7 月 締結된 修好條約에 의하여 從來 居住制限 間行里程 10 里를 50 里로 늘여서 그 活動範圍를 擴大함에 따라 東海岸 특히 江原道 沿岸에서 漁業에까지 從事하는 자가 생기는 등 차츰 侵略의 손을 뻗치기 始作하였다 .

 

西紀 1884 年 2 月 1 日 所謂 最惠國條約에 의하여 元山港은 日本뿐 아니라 各 國의 市場으로 되어 稅關事務를 開始하였으니 처음으로 英國人 [ 라이트 ] 가 稅關長이 되었다 .

 

1884 年 5 月에 日本人들은 東本願寺에 小學敎育所를 設置하였으며 또 그들의 旅行往來 間行里程을 南北 각백리로 擴張하며 비로소 自由로운 活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1886 年에 日本人의 橫暴를 막기 위하여 在留日本人取締規則을 發布하였다 . 이로 인하여 日本人 男子 2 名과 女子 7 名의 退去를 命하여 韓國에서 쫓겨나가게 되었다 .

 

1889 年 2 月 咸鏡道 監司 ( 觀察使 ) 趙兼式은 日本人 入國 數年以來 大豆賣買가 盛況을 이루고 大量으로 日本에 輸出되는 데 鑑하여 日本商人의 購買大豆에 稅金을 賦課하였다 . 이에 日人들은 그 領事館을 통하여 抗議를 하여 物議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日本人에게는 팔지 말도록 所謂 [ 防穀令 ] 을 發布하였다 .

 

이 防穀令發布와 더불어 日人들의 橫暴가 자심하게 되었으며 法令을 違反하여 日人과 去來하는 韓國商人들의 韓國穀物에 대한 貿易의 野慾은 끊이지게 되었다 .

 

1889 年 3 月 日本郵船會社의 汽船 高千穗丸이 元山港을 輕油하여 露領浦鹽德에 航路를 開始하게 됨으로써 元山郵遞局은 露領浦鹽德과의 郵遞交換事務를 처음으로 始作하였다 .

 

1889 年 11 月 前記 防穀令事件으로 穀物貿易을 하지 못하게 된 日本人들은 陳情委員을 選出하여 在京城 日本公使에 派送하고 그 解除를 歎願하기에 이르렀다 . 그리하여 防穀令解除에 대한 承認을 얻었으나   趙兼式 咸鏡道監司는 如前히 日人들의 橫暴를 團束하고 大豆賣買를 禁止하였었다 . 當時 日人들의 調査統計에 의하면 1889 年 1 年間에만도 日本人의 被害人員 41 名 損害金額 14 萬 7 千 168 원에 達한다고 發表하였다 .

 

1890 年 1 月에 韓日通漁規則協定이 成立되어서 日本人 漁民의 移住者가 元山에도 漸次 增加하게 되었다 .

 

1890 年 4 月에 또다시 防穀事件에 對하여 當時 元山商業會議所를 通하여그를 解除토록 陳情書를 提出하였다 . 그 해 咸鏡道 監司 趙兼式은 忠淸道로 轉任되고 韓 章錫이 新任監司로 赴任하였으나 如前히 防穀解禁은 되지 않아 日本人의 陳情을 들어 주지 아니 하였다

 

電報通信開始

 

1891 年 7 月 元山郵遞社內에 처음으로 電報司를 設置하여 비로소 電信事務를 취급하게 되었으나 한글을 비롯하여 漢字와 英文만을 取扱하고 日語는 취급치 아니하였으므로 日本人들의 不平이 많았었다 . 이 元山에서의 電報取扱은 當時 京城까지 도보로 一週日間의 걸려야 連絡이 되었을 때 通信上 新紀元을 劃하였다 하겠다 .

 

防穀令과 元山

1892 年 1 月 日本政府는 또다시 元山의 防穀事件을 解禁하도록 執拗하게 要求하여 왔다 . 元山居留 日本人들이 代表를 選出하여 上京 韓國政府에 陳情하였으나 韓國政府는 이를 一蹴하였다 . 그러나 同年 3 月 韓國政府는 咸鏡道의 防穀事件에 對하여 實地調査할 것을 相約하였다 .

 

翌年인 1893 年 5 月 19 日 防穀事件의 終結을 보게 되었다 . 元山에 있던 日本人들은 이 防穀事件으로 因하여 數萬원의 被害를 입었다고 그 뒤 發表하였다 .

 

3. 淸日戰爭과 元山

 

1894 年 淸日戰爭이 勃發되자 日本軍은 第 5 師團野砲隊와 步兵을 실은 艦船이 元山에 入港上陸하게 되니 元山은 마치 淸日戰爭의 策源地같은 느낌이었다 . 이해 9 月 日本軍은 元山에 守備隊를 두었다 .

이리하여 元山에 있어서의 防穀事件으로 말미암은 韓日間의 紛糾가 解決을 보지 못하게되자 困境에 빠진 日本은 1891 年 2 月 그 外務省 官吏 石井菊次郞을 元山에 直接 派送하여 一個月間 內容을 調査하여 韓國政府에 防穀解禁을 再歎願하였던 것이다 .

 

露國捕鯨船 入港

 

1894 年 2 月 露國捕鯨船이 처음으로 元山에 入港하였다 . 當時 日本의 勢力과 더불어 露國 또한 韓國에 침을 흘려서 南進政策을 露骨的으로 들어 내고 있었으니 白頭山 森林과 鬱陵島 立木의 採伐權을 露國이 獲得하고 있었으며 露國捕鯨船의 入港도 그 勢力의 誇示라고 하겠다 .

 

이처럼 露國과 日本은 韓國을 舞臺로 利權獲得에 서로 競爭하고 있었으며 韓國民은 排日思想이 漸高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日本의 北韓侵略의 첫발판이 되었던 元山을 中心으로 日本人 憎惡의 感情은 한층 불꽃이 불어오르기 始作하였다 .

 

元山居留 日人五名 高城郡 靈津서 燒殺

 

1896 年 2 月 元山에 居留하던 日本人 5 名이 마른 정어리를 사러 江原道 東海岸으로 갔는데 高城郡靈津에서 漁民들과 衝突이 생겨 드디어는 燒殺까지 당하는 事件이 있었으나 그때부터 日本人들이 얼마나 韓國人에 대하여 甚惡하게 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900 年에 日人들이 처음으로 [ 元山時事 ] 라는 新聞을 發行하였으나 經營不振으로 얼마 繼續하지 못하고 中斷되고 말았다 .

 

1902 年에 城津을 開港하게 되어 元山居住 日本人들 가운데 城津으로 移住하는 者가 많았다 . 日人들은 韓國産 콩을 日本에 輸出함으로써 多大한 利益을 보게 되어 [ 大豆組合 ] 을 組織하고 그 購買에 激烈한 競爭을 하면서 韓國人과의 사이에 恒常 是非가 끊길 사이 없이 벌어졌다 .

 

日本과의 循環航路 開始

 

1902 年 3 月 日本과의 循環航路가 開始되었다 . 즉 日本 大阪의 大家汽船 開旋丸이 大阪 , 釜山 , 元山 , 우라지보스톡 , 오다루 , 하고다데 등의 諸港을 3 週間에 1 回씩 定期巡廻寄港하게 되었다 .

 

日本 守備隊 竣工

 

1902 年 8 月 日本은 元山守備隊의 永久兵營을 長德山南麓에 建築하기 始作하여 그 翌年 10 月에 竣工하였으니 淸日戰爭時에 一時的으로 元山에 上陸하였던 日軍이 韓國에의 侵略土臺를 武力으로써 確保하였음을 立證하는 것이라 하겠다 .

 

元山 大阪間 定期航路

 

1902 年 9 月 日本의 大阪商船會社가 처음으로 그 스미다가와마루으로써 2 個月 5 回의 元山 , 大阪間 定期航海를 열었다 . 이것이 定期航路의 嚆矢이다 .

 

日刊新聞의 嚆矢

 

1903 年 1 月 過去에 廢刊되었던 [ 元山時事 ] 新聞을 日人들이 再 發行하였으니 이것이 元山에서는 日刊新聞으로서 처음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

 

日本人들은 韓國 侵略을 위한 발판으로서 定期航路 , 各種 新文化를 輸入 또는 創設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自身의 利益을 蔿한 것이었고 韓國이나 韓國人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이와 더불어 1903 年 7 月에는 [ 燾町 ] 에 유각지까지 設定하는 등 惡習廢風까지 끌어 들여왔던 것이다 .

 

4. 露日戰爭과 日軍의 橫幅

 

1904 年 初부터 露日間의 風雲이 急迫해지면서 人心이 흉흉한 가운데 2 月 5 日 露國과 日本과의 談判이 決裂되고 同年 2 月 11 日에 드디어 露日間의 宣戰布告로 戰爭이 勃發하여 民心은 3 月 1 日 日本 陸軍 步兵第 37 聯隊의 1 個大隊가 京城에서 來元하여 駐屯 守備하게 되어 이때부터 元山에서의 韓國人에 대한 銃劍으로 威脅과 壓迫은 極甚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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