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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와 연혁| 개항전·후사 | 교육.문화.경제 | 8.15 전·후 |

교육 , 문화 , 경제

 

[ 한일회담 ] 후 한국의 교육기관은 근본적으로 변혁을 일으키게 되어서 종래의 서당교육이 학교교육으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1926 년 현재 원산에는 용동의 제 1, 신흥동의 제 2( 그후 명석동으로 이전 ) 양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사립학교로 기독교계통에서 경영하는 보광중학교를 비롯하여 배성학교 ,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 진성학교 , 광명학교등이있어 사학의 융성을 말하고 있다 . 당시의 학급 , 교사 , 학생의 통계를 보면 제 1, 제 2 양 보통공립학교의 학급수 27, 교사 29( 그중 일본인 9 명 ), 학생 남 1329 명 , 여 388 명 합계 1717 명이었으며 6 개사립학교의 학급수는 40, 교사 한국인 68 명 , 서양인 6 명 일본인 1 명 합계 68 명에 학생총수는 남 863 명 , 여 641 명으로 합계 1504 명이었다 . 이외에 일본인 위주의 공립중학교를 1920 년에 , 한일병합공립상업학교를 1921 년에 각각 개교하였다 .

 

1. 해방전후의 교육기관

 

해방전의 원산교육계는 일제의 식민정책 때문에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 한국인만을 교육시키는 중등교육기관 하나 없는 처량한 지경이었다 .

 

멀리 거슬어 올라가 한말에 창립한 춘성고등학교도 한일합방과 더불어 폐교되었다 . 그런대도 춘성고등학교에서는 독립투사인 강기덕 같은 애국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세에까지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 다음에는 기독교계통의 보광중학이 있었으나 일제말엽에 성흥영생중학교에 흡수되어 자취가 없어졌다 . 그러나 이학교 역시 31 운동 당시에 애국투사를 산출한 혁혁한 역사를 남긴 것이다 . 그리고 한국인을 상대로 원산간이상업학교가 설립되었다가 후에는 일본인까지 배우게 한 원산상업학교 ( 을종 3 년제 )

 

로 발전하였다가 원산상업학교 ( 갑종 5 년제 ) 로 승격하여 한국인 반 , 일본인 반을 수용하는 학제로 편성하였으므로 이것은 한국인을 위한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 한국여성을 상대한 교육기관은 감리교에서 창립한 루씨학교가 유일한 중등학교였었다 . 그리고 일본인만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원산중학교 , 원산고등여학교가 있었는데 한국인 자제는 명목상 불과 수명정도를 입학시킬 뿐이었다 .

 

이렇듯 원산교육계는 말이 아니었으며 원산에서도 일제치하에 순 한국인을 위한 사립중학을 만들려고 기금도 마련하고 활동하였으나 총독부의 인가를 얻지 못하여 유산된 일이 있었다 .

 

그러나 초등교육기관만은 상당수의 학교가 있었다 . 남자학교로 배성학교 , 해성학교 , 광명학교 , 신풍리의 덕성학교 등등이 있었으나 배성학교 , 광성학교는 폐교되고 덕성학교는 덕성소학교라 개칭하여 공립으로 만들었다 .

 

여자학교로는 루씨학교 , 진성학교가 있었고 일제말엽에 최문석 이 명석동에 원산여자 부기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뒤 송도원에이전하여 송정여자중학교로 승격 되었다 .

 

그러나 해방이 되고 보니 원산사회에는 교육에 대한 열이 급격히 상승하여 오래동안 굳게 닫혀있던 교육의 문이 넓게 열리게 되었다 . 기존해 있던 원산사범학교가 새로 출발하였으며 진성학교자리에 공업전문학교가 새로 세워지고 항여중이라 불리던 루씨여중이 재출발하였다 . 한길중학 김형규 가 교장 , 명사중학은 이상호가 교장 , 사범학교는 박희병이 초대교장으로 , 송정여자중학은 김명관 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그리고 해방의 환희속에서 그렇게 대망하던 중등학교가 여기저기서 생겨났으니 동해중학

 

대성중학이 또 탄생하였는데 도기찬 이 초대 교장이었다 .

 

그러나 대성중학은 다음해인 1946 년에 이르러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자 동해중학이 흡수하여 재학생을 구제하였다 .

 

그리고 1948 년에 소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국가교육기관을 통제한다는 구실하에 북한전역의 사립학교를 모조리 접수함으로써 교명도 명사중학은 제 1 중학교 동해중학은 제 2 중학교 , 한길중학교는 제 3 중학교로 개칭해 버렸다 .

 

그 후에 괴뢰정부에서 수산전문학교 , 의학전문학교를 신설하였다 . 최근에는 교원대학도 설립하였다는 소식이다 .

2. 통신기관

 

1880 년 원산개항과 더불어 일본영사관내에 설치한 우편사무로부터 원산우편국이 발족되었다 . 

 

그뒤 1920 년 원산우편국을 낙성 , 그 익년에 개청하였으며 춘일정의 구청사는 체신분장국으로서 함경남도 2 부 16 군 및 강원도의 회양 , 통천 , 간성 , 강릉 , 삼척 , 금화 , 평강 , 이천 등 10 개군을 관할하여 각 군내의 우편국 사무일체를 지휘감독 하였을 뿐 아니라 겸하여 관내의 통신사업에 대한 기획까지도 하였던 것이다 .

 

원산시내의 통신기관으로서는 삼개소의 우편소가 있었으니 즉 본정우편소 , 원산리우편소 , 역전우편소 등이다 .

 

2-1. 전신

 

서기 1891 년 7 월 한국정부는 원산우체사내에 전보사를 설하고 전신사무를 비로서

개시하였다 . 당시의 전신은 한글 , 한문 , 로마자 전보에 극한하였으나 일인들이 1904 년 러일전쟁으로 원산에 임시통신소를 설하면서 일본어의 전보는 비로서 취급케 되었다 .

 

2-2. 전화

 

서기 1906 년 처음으로 전화교환사무가 개시되었는데 당시의 가입자는 불과 106 명이었으나 그 뒤 매년 증가하여 1924 년 말에는 가입자가 765 명에 달하였다 .

3. 교통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지대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청량산맥이 동해안과 오지를 차단한 관계로 육상동해안의 교통은 불편하였고 따라서 선박편의 이용이 많았으나 그 뒤 동해북부선의 개통과 평원선의 전통으로 원산항은 해륙과 함께 관북교통의 요충이 되었다 .

 

해상은 물론이요 육상으로는 함경선 , 평원선 , 동해북부선의 중심 또는 기점이 된 원산은 수산물은 물론 , 안변 , 함흥 양평야의 산물의 집산을 신속용이하게 하는 일방 원산항 해륙연락설비의 진보와 더불어 일본해 횡단항로 , 일본 , 해삼위 , 청진선의 삼각항로를 개시하여 천연의 양항으로서의 면목을 차츰 일신하기에 이르렀다 .

 

그래서 원산항은 4 통 8 달의 양항이 되었고 따라서 상권의 확대와 더불어 무역 또한 은성을 다하여 한반도에 있어서 추요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

 

3-1. 해운

해상교통은 철도가 개통되기 전인 개항당초부터 기범선의 편을 이용하여 육상교통보다 먼저 발달되어 왔으나 항해는 대개 불정기편이어서 어떤때는 오래동안 선영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 그러나 원산항은 함경북도연안의 발달 에따라서 성진 청진등의 개항과 더불어 북한방면으로 점차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선박의 왕래가 자연증가하게 되었으며 일인들이 들어오면서 일본과의 정기항로를 개시하게 되었다 . 즉 , 동해를 횡단하는 일본까지의 항로가 1918 년에 비로서 실현되어 북한과 일본간의 거리 , 시간이 단축되었을 뿐 아니라 무역의 신속번성을 기하게 되었다 .

 

3-2. 철도

 

동해안의 운수는 대개 그 지리적 관계상 해로에 의존하여 왔으나 1914 년 8 월 경원철도의 전통을 봄으로써 비로소 육로교통의 편이 열리게되어서 종래의 수송 경로에 일대 변혁을 초래하게 되었다 . 철도는 그 뒤 원산이북으로 북진하여 1915 년에는 영흥까지 , 1923 년 엔 양화성에까지 이르게 되매 원산항의 교통운수상황은 그 당시부터 현저히 발달을 보게 되었다 .

 

동해북부선의 개통에 이어서 평원선의 전통으로 원산은 북한철도사상 획기적인 역사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 평원선의 전통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서포에서 고원까지의 단선철도는 그 길이 2,126 킬로로 처음 1926 년에 기공하여 1927 년에는 서포에서 사인장까지 개통되 었다 . 1931 년에는 고원에서 착공 1936 년에는 서포에서 양덕까지 개통되었으며 1937 년엔 고원에서 다시 성내까지 개통 .1941 년에 전통되기 까지 15 년간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이 평원선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유일한 철도 노선이 되었으니 신천에서 평남선 , 덕천군 , 순천에서

만포선 , 서포에서 경의선 , 고원에서 함경선과 연락되는 것이다

4. 무역

원산항은 한반도 굴지의 양항으로서 일본과의 개항이래 점차 무역액이 상승하여 1924 년에는 수출입액 2 천만원에 달하여 부산 다음가는 중요 무역항이 되었다 . 이것은 주로 일본과의 무역이 중심이되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 대중국 , 대포염 , 그밖에 미국 , 구라파제국과도 그 당시부터 수출입무역이 있었다 .

 

4-1. 원산항의 산물집산 상황

 

1925 년경 원산항을 통하여 수입되었던 것은 속 , 소맥분 , 주류 , 면사포 , 철재 및 철제품 , 도자기 등으로 그 대부분이 원산항을 거쳐서 함남북과 강원도방면으로 판매되었으니 원산시에서 소비된 것은 2,3 할에 불과하였다 . 수출품은 함흥 , 홍원 , 고원 , 영흥 , 통천 , 단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백미와 대두가 주였고 어류는 함남 , 강원으로부터 , 흑연과 , 금광석 은 영흥군에서 원산항을 통하여 일본 및중국 , 기타 제외국으로 나갔다 .

특히 생우는 육로로 영흥 , 양덕등지에서 원산항을 거쳐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

5. 금융

 

원산지방의 금융의 번한은 주로 해륙산물의 풍흉에 의하여 지배되어왔으나 1920 년 , 1930 년대까지도 원산의 산업중 공업의 흥융을 보지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당시는 의연농업과 어업이 산업의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수산업에 있어서는 명태어 그리고 농업에 있어서는 대두 , 백미가 주 로도어 있었다 . 그러므로 이 주요 산물의 수확고의 다과가 직접 일반시민의 경제에 작용하여 경제력의 진퇴를 좌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 수출무역의 소장은 이에 수반하여 발생하였으며 당항 시항의 융체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아 왔었다 . 그리하여 금융계의 번한도 이로말미암아 좌우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 원산지방의 번한경향을 통관하여 보면 1 월부터 5 월까지의 5 개월간은 수확물의 출회시기로서 미 , 대두 , 어류의 수출이 왕성하고 따라서 자금의 회수가 매우 윤택하여 금융계가 비교적 한산함을 면하는 시기다 . 그리고 6 월부터 8 월에 이르는 3 개월간은 농번기에 속하여 소위 하고시기로서 지방농민의 구매력이 극도로 감퇴되고 판매부진으로 말미암아 상항침쇠하고 금융계 또한 매우 한산함을 면치 못하는 시기다 .다음 금융핍박의 상태를 나타내는 10 월에 이르는 기간은 명태어업의 자금수요가 왕성할 뿐 아니라 대두의 출회기이므로 그 매입자금의 수요등으로 금융이 핍박하게 되며 11 월부터 년말까지의 2 개월간이 금융계가 가장 번망한 시기였다 .

 

5-1. 원산의 금융기관

 

원산시내의 금융기관으로는 다음의 5 개은행외에 동양척식회사지점과 원산 , 덕원 양금융조합 및 창고회사등이 있었다 .

 

* 조선은행지점 =1910 년 한일합방 익년 8 월 조선은행법의 실시로 한국의 중앙은행이었던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함에따라서 한국은행 원산지점도 자연히 조선은행원산지점으로 되고 말았다 .

 

* 식산은행지점 =1909 년 원산에 창성되었던 함경농공은행의 후신으로서 식은원산지점이 되었다 .

 

* 조선상업은행원산지점 = 전신은 1919 년 4 월 원산인들로 창립을 보게 되었던 원산상업은행이 조선상업은행에 병합되어서 1923 년에 동행지점으로 되었다 .

 

* 한일은행지점 =1922 년 2 월 원산지점이 개설되어 주로 한국인들의 중요한 금융기관이 되었다 .

 

* 십팔은행지점 =1893 년 지점개설

 

* 동척지점 =1911 년 8 월 개설

*

* 원산금융조합 =1918 년 6 월 개설

 

* 덕원금융조합 =1907 년 6 월 설립

6. 시장

 

원산시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호수조사를 1925 년도 통계로 보면 한국인이 2,356 호 , 일인 693 호 , 중국인 103 호로 계 3,152 호에 달하여 젼호수의 약 5 할을 점하고 있다 .

 

원산시내의 재래시장은 2 개소가 있었다 . 상시와 하시로서 당시 부영이 었다 . 상시는 구력 5 일 , 하시는 10 일로 상하교체로 개시하였다 . 그 당시의 1 년간 총매상고는 상시가 2 만 9 천 6 백원 , 하시가 1 만 8 천 4 백 3 십원 , 합계 5 만 8 천 3 십원에 달하였다 .

 

가축시장 = 생우의 매매는 모두 가축시장에서 행하였는데 1923 년에 5,937 두 , 그 가격이 363,932 원이었다 .

敎育 , 文化 , 經濟

 

[ 韓日會談 ] 후 韓國의 敎育機關은 根本的으로 變革을 일으키게 되어서 從來의 書堂敎育이 學校敎育으로 變貌하게 되었는데 1926 年 現在 元山에는 龍洞의 第 1, 新興洞의 第 2( 그후 銘石洞으로 移轉 ) 兩公立普通學校를 비롯하여 私立學校로 基督敎系統에서 經營하는 保光中學校를 비롯하여 培成學校 , 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 進誠學校 , 光明學校등이있어 私學의 隆盛을 말하고 있다 . 當時의 學級 , 敎師 , 學生의 統計를 보면 第 1, 第 2 兩 普通公立學校의 學級數 27, 敎師 29( 그중 日本人 9 名 ), 學生 男 1329 名 , 女 388 名 合計 1717 名이었으며 6 個私立學校의 學級數는 40, 敎師 韓國人 68 名 , 西洋人 6 名 日本人 1 名 合計 68 名에 學生總數는 男 863 名 , 女 641 名으로 合計 1504 名이었다 . 이외에 日本人 爲主의 公立中學校를 1920 年   , 韓日倂合公立商業學校를 1921 年에 각각 開校하였다 .

 

1. 解放前後의 敎育機關

 

解放前의 元山敎育界는 日帝의 植民政策 때문에 實로 微微하기 짝이 없었다 . 韓國人만을 敎育시키는 中等敎育機關 하나 없는 처량한 地境이었다 .

 

멀리 거슬어 올라가 韓末에 創立한 春城高等學校도 韓日合邦과 더불어 廢校되었다 . 그런대도 春城高等學校에서는 獨立鬪士인 康基德 같은 愛國者들이 많이 排出되어 後世에까지 名聲을 떨치기도 했다 . 다음에는 基督敎系統의 保光中學이 있었으나 日帝末葉에 成興永生中學校에 吸收되어 자취가 없어졌다 . 그러나 이학교 亦是 31 運動 當時에 愛國鬪士를 産出한 赫赫한 歷史를 남긴 것이다 . 그리고 韓國人을 相對로 元山簡易商業學校가 設立되었다가 後에는 日本人까지 배우게 한 元山商業學校 ( 乙種 3 年制 )

로 發展하였다가 元山商業學校 ( 甲種 5 年制 ) 로 昇格하여 韓國人 半 , 日本人 半을 收容하는 學制로 編成하였으므로 이것은 韓國人을 위한 敎育機關은 아니었다 . 韓國女性을 相對한 敎育機關은 監理敎에서 創立한 樓氏學校가 唯一한 中等學校였었다 . 그리고 日本人만을 爲한 敎育機關으로 元山中學校 , 元山高等女學校가 있었는데 韓國人 子弟는 名目上 不過 數名程度를 入學시킬 뿐이었다 .

 

 

이렇듯 元山敎育界는 말이 아니었으며 元山에서도 日帝治下에 순 韓國人을 위한 私立中學을 만들려고 基金도 마련하고 活動하였으나 總督府의 認可를 얻지 못하여 流産된 일이 있었다 .

 

그러나 初等敎育機關만은 相當數의 學校가 있었다 . 男子學校로 培誠學校 , 海星學校 , 光明學校 , 新豊里의 德成學校 等等이 있었으나 培成學校 , 光成學校는 廢校되고 德成學校는 德成小學校라 改稱하여 公立으로 만들었다 .

 

女子學校로는 樓氏學校 , 進誠學校가 있었고 日帝末葉에 崔文錫 이 銘石洞에 元山女子 簿記學校를 設立하였는데 그 뒤 松濤園에 移轉하여 松汀女子中學校로 昇格 되었다 .

 

그러나 解放이 되고 보니 元山社會에는 敎育에 대한 熱이 急激히 上昇하여 오래동안 굳게 닫혀있던 敎育의 門이 넓게 열리게 되었다 . 旣存해 있던 元山師範學校가 새로 出發하였으며 進誠學校자리에 工業專門學校가 새로 세워지고 港女中이라 불리던 樓氏女中이 再出發하였다 . 한길중학 金亨奎가 校長 , 明沙中學은 李相浩 가 校長 , 師範學校는 朴熙秉이 初代校長으로 , 松汀女子中學은 金明寬이 校長으로 就任하였다 . 그리고 解放의 歡喜속에서 그렇게 待望하던 中等學校가 여기저기서 생겨났으니 東海中學

 

大成中學이 또 誕生하였는데 都基燦 이 初代 校長이었다 .

 

그러나 大成中學은 다음해인 1946 年에 이르러 運營難에 逢着하게 되자 東海中學이 吸收하여 在學生을 救濟하였다 .

 

그리고 1948 年에 所謂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가 國家敎育機關을 統制한다는 口實하에 北韓全域의 私立學校를 모조리 接受함으로써 校名도 明沙中學은 第 1 中學校 東海中學은 第 2 中學校 , 한길중학교는 第 3 中學校로 改稱해 버렸다 .

 

그 後에 傀儡政府에서 水産專門學校 , 醫學專門學校를 新設하였다 . 최근에는 敎員大學도 設立하였다는 消息이다 .

2. 通信機關

 

1880 年 元山開港과 더불어 日本領事館內에 設置한 郵便事務로부터 元山郵便局이 發足되었다 . 

 

그뒤 1920 年 元山郵便局을 落成 , 그 翌年에 開廳하였으며 春日町의 舊廳舍는 遞信分掌局으로서 咸鏡南道 2 府 16 郡 및 江原道의 淮陽 , 通川 , 干城 , 江陵 , 三陟 , 金化 , 平康 , 伊川 等 10 個郡을 管轄하여 各 郡內의 郵便局 事務一切를 指揮監督 하였을 뿐 아니라 兼하여 管內의 通信事業에 대한 企劃까지도 하였던 것이다 .

 

元山市內의 通信機關으로서는 三個所의 郵便所가 있었으니 즉 本町郵便所 , 元山里郵便所 , 驛前郵便所 等이다 .

 

2-1. 電信

 

西紀 1891 年 7 月 韓國政府는 元山郵遞司內에 電報司를 設하고 電信事務를 비로서

개시하였다 . 當時의 電信은 한글 , 漢文 , 로마자 電報에 極限하였으나 日人들이 1904 년 러일전쟁으로 元山에 臨時通信所를 設하면서 日本語의 電報는 비로서 取扱케 되었다 .

 

2-2. 電話

 

西紀 1906 年 처음으로 電話交換事務가 開始되었는데 當時의 加入者는 不過 106 名이었으나 그 뒤 每年 增加하여 1924 年 末에는 加入者가 765 名에 達하였다 .

3. 交通

 

咸鏡南道와 江原道의 地帶는 南北으로 길게 뻗은 菁梁山脈이 東海岸과 奧地를 遮斷한 關係로 陸上東海岸의 交通은 不便하였고 따라서 船舶便의 利用이 많았으나 그 뒤 東海北部線의 開通과 平原線의 傳統으로 元山港은 海陸과 함께 關北交通의 要衝이 되었다 .

 

海上은 勿論이요 陸上으로는 咸鏡線 , 平原線 , 東海北部線의 中心 또는 기점이 된 元山은 水産物은 勿論 , 安邊 , 咸興 兩平野의 産物의 集散을 迅速容易하게 하는 一方 元山港 海陸連絡設備의 進步와 더불어 日本海 橫斷航路 , 日本 , 海蔘威 , 淸津線의 三角航路를 開始하여 天然의 良港으로서의 面目을 차츰 一新하기에 이르렀다 .

 

그래서 元山港은 四通八達의 良港이 되었고 따라서 商權의 擴大와 더불어 貿易 또한 殷盛을 다하여 韓半島에 있어서 樞要의 地位를 占하게 되었다 .            

 

3-1. 海運

海上交通은 鐵道가 開通되기 前인 開港當初부터 汽帆船의 便을 利用하여 陸上交通보다 먼저 發達되어 왔으나 航海는 大槪 不定期便이어서 어떤때는 오래동안 船影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 그러나 元山港은 咸鏡北道沿岸의 發達 에따라서 城津 淸津等의 開港과 더불어 北韓方面으로 漸次 航路를 開拓하기 始作하면서 船舶의 往來가 自然增加하게 되었으며 日人들이 들어오면서 日本과의 定期航路를 開始하게 되었다 . 즉 東海를 橫斷하는 日本까지의 航路가 1918 年에 비로서 實現되어 北韓과 日本間의 距離 時間이 短縮되었을 뿐 아니라 貿易의 迅速繁盛을 期하게 되었다 .

 

3-2. 鐵道

 

東海岸의 運輸는 大槪 그 地理的 關係上 海路에 依存하여 왔으나 1914 年 8 月 京元鐵道의 全統을 봄으로써 비로소 陸路交通의 便이 열리게되어서 從來의 輸送 經路에 일대 變革을 招來하게 되었다 . 鐵道는 그 뒤 元山以北으로 北進하여 1915 年에는 永興까지 , 1923 年 엔 陽化城에까지 이르게 되매 元山港의 交通運輸狀況은 그 當時부터 顯著히 發達을 보게 되었다 .

 

東海北部線의 開通에 이어서 平元線의 全通으로 元山은 北韓鐵道史上 劃期的인 歷 史를 이룩하게 된 것이었다 . 平元線의 全通經緯를 보면 다음과 같다 .

 

西浦에서 高原까지의 單線鐵道는 그 길이 2,126 킬로로 처음 1926 年에 起工하여 1927 年에는 西浦에서 舍人場까지 開通되었다 . 1931 年에는 高原에서 着工 , 1936 年에는 西浦에서 陽德까지 開通되었으며 1937 年엔 高原에서 다시 城內까지 開通 ,1941 年에 全通되기 까지 15 年間의 長久한 歲月이 흘렀다 .

 

이 平元線의 全通으로 말미암아 東海岸과 西海岸을 連結한는 唯一한 鐵道 路線이 되었으니 信天에서 平南線 , 德川郡 , 順天에서

滿浦線 西浦에서 京義線 , 高原에서 咸鏡線과 連落되는 것이다 .

4. 貿易

元山港은 韓半島 屈指의 良港으로서 日本과의 開港이래 漸次 貿易額이 上昇하여 1924 年에는 輸出入額 2 千萬원에 達하여 釜山 다음가는 重要 貿易港이 되었다 . 이것은 주로 日本과의 貿易이 中心이되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 對中國 , 對浦鹽 , 그밖에 美國 , 歐羅巴諸國과도 그 當時부터 輸出入貿易이 있었다 .

 

4-1. 元山港의 産物集散 狀況

 

1925 年頃 元山港을 通하여 輸入되었던 것은 粟 , 小麥粉 , 酒類 , 面紗布 , 鐵材 및 鐵製品 , 陶磁器 等으로 그 大部分이 元山港을 거쳐서 咸南北과 江原道方面으로 販賣되었으니 元山市에서 消費된 것은 2,3 割에 不過하였다 . 輸出品은 咸興 , 洪原 , 高原 , 永興 , 通川 , 端川 等地에서 生産되는 白米와 大豆가 주였고 魚類는 咸南 , 江原으로부터 , 黑鉛과 , 金鑛石 은 永興郡에서 元山港을 通하여 日本 및 中國 , 其他 諸外國으로 나갔다 .

특히 생우는 陸路로 永興 , 陽德等地에서 元山港을 거쳐서 日本으로 輸出되었다 .

5. 金融

 

元山地方의 金融의 繁閑은 주로 海陸産物의 豊凶에 依하여 支配되어왔으나 1920 年 , 1930 年代까지도 元山의 産業중 工業의 興隆을 보지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當時는 依然農業과 漁業이 産業의 重要한 地位를 占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水産業에 있어서는 明太魚 , 그리고 農業에 있어서는 大豆 , 白米가 주 로 되어 있었다 . 그러므로 이 主要 産物의 收穫高의 多寡가 직접 一般市民의 經濟에 作用하여 經濟力의 進退를 左右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輸出貿易의 消長은 이에 隨伴하여 發生하엿으며 堂港 市況의 隆替 또한 이에    影響을 받아 왔었다 . 그리하여 金融界의 繁閑도 이로말미암아 左右되었던 것이다 .그 當時 , 元山地方의 繁閑傾向을 通觀하여 보면 1 月부터 5 月까지의 5 個月間은 收穫物의 出廻時期로서 米 , 大豆 , 魚類의 輸出이 旺盛하고 따라서 資金의 回收가 매우 潤澤하여 金融界가 比較的 閑散함을 免하는 時期다 . 그리고 6 月부터 8 月에 이르는 3 個月間은 農繁期에 屬하여 所謂 夏枯시기로서 地方農民의 購買力이 極度로 減退되고 販賣不振으로 말미암아 商況沈衰하고 金融界 또한 매우 閑散함을 면치 못하는 時期다 .다음 金融逼迫의 狀態를 나타내는 10 月에 이르는 期間은 明太漁業의 資金需要가 旺盛할 뿐 아니라 大豆의 出廻期이므로 그 買入資金의 需要등으로 金融 이 逼迫하게 되며 11 月부터 年末까지의 2 個月間이 金融界가 가장 繁忙한 時期였다 .

 

5-1. 元山의 金融機關

 

元山市內의 金融機關으로는 다음의 5 個銀行外에 東洋拓植會社支店과 元山 , 德源 兩金融組合 및 倉庫會社等이 있었다 .

 

* 朝鮮銀行支店 =1910 年 韓日合邦 翌年 8 月 朝鮮銀行法의 實施로 韓國의 中央銀行이었던 韓國銀行을 朝鮮銀行으로 改稱함에따라서 韓國銀行 元山支店도 自然히 朝鮮銀行元山支店으로 되고 말았다 .

 

* 殖産銀行支店 =1909 年 元山에 創設되었던 咸鏡農工銀行의 後身으로서 殖銀元山支店이 되었다 .

 

* 朝鮮商業銀行元山支店 = 前身은 1919 年 4 月 元山人들로 創立을 보게 되었던 元山商業銀行이 朝鮮商業銀行에 倂合되어서 1923 年에 同行支店으로 되었다 .

 

* 韓一銀行支店 =1922 年 2 月 元山支店이 開設되어 주로 韓國人들의 重要한 金融機關이 되었다 .

 

* 十八銀行支店 =1893 年 支店開設

 

* 東拓支店 =1911 年 8 月 開設

 

* 元山金融組合 =1918 年 6 月 開設

 

* 德源金融組合 =1907 年 6 月 設立

6. 市場

 

元山市內에서 商業에 從事하는 戶數調査를 1925 年度 統計로 보면 韓國人이 2,356 戶 , 日人 693 戶 , 中國人 103 戶로 計 3,152 戶에 達하여 全戶數의 約 5 割을 点하고 있다 .

 

元山市內의 在來市場은 2 個所가 있었다 . 上市와 下市로서 當時 府營이 었다 . 上市는 舊曆 5 日 , 下市는 10 日로 上下交替로 開市하였다 . 그 當時의 1 年間 總賣上高는 上市가 2 萬 9 千 6 百원 , 下市가 1 萬 8 千 4 百 3 拾원 , 合計 5 萬 8 千 3 拾원에 達하였다 .

 

家畜市場 = 生牛의 賣買는 모두 家畜市場에서 行하였는데 1923 年에 5,937 頭 , 그 價格이 363,932 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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