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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와 연혁| 개항전·후사 | 교육.문화.경제 | 8.15 전·후 |

 

1. 防穀令事件(방곡령사건)

1-1. 防穀令(방곡령)의 歷史的背景(역사적배경)

元山이 開港(개항)되자 日本人(일본인)들은 居留民團(거류민단)을 組織(조직)하여 本部(본부)를 元山에 두고 咸鏡道(함경도)의 各邑(각읍)에 分散(분산)해서 居住(거주)하였으며 1888年에 咸鏡道觀察使趙秉式(함경도관찰사조병식)은 道內(도내)의 各地方(각지방)에 貨物稅(화물세)와 通過稅(통과세)의 徵收(징수)를 勵行(여행)하였으므로 各處(각처)에서 日本人(일본인)의 輸出入貨物(수출입화물)에 對하여도 課稅(과세)하니 日本領事官(일본영사관)에서는 課稅(과세)의 不當性(부당성)을 指摘(지적)하고 貿易規程(무역규정)에 違背(위배)되며 沮害(저해)하는 方法(방법)이라고 朝鮮政府(조선정부)에 嚴重抗議(엄중항의)하였으므로 一時中止(일시중지)하였다. 그러나 趙監司(조감사)는 다시 徵收(징수)를 斷行(단행)하였으니 各處(각처)에서 地方(지방)官史(관사)와 日本(일본)商人(상인)과의 사이에 衝突(충돌)이 생겼으며 1889年 3月 3南地方(남지방)은 旱害(한해)가 甚(심)하여 政府(정부)에서는 이의 救濟策(구제책)으로 米穀(미곡)의 輸入(수입)에는 免稅(면세)를 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화로 趙監司는 咸鏡도에 대두가 대풍작에도 불구하고 販賣를 禁止(금지)하였다.
  高宗(고종) 26年 11月 (1889年)에 日本代理公使近藤(일본대리공사근등)은 咸興地方(함흥지방)의 大豆販賣(대두판매)를 禁止(금지)함을 抗議(항의)하므로 政府(정부)에서는 監司趙秉式(감사조병식)에게 穀物販賣禁止(곡물판매금지)를 取消(취소)하라고 命令(명령)하였고 한便(한편) 日本(일본)公使館(공사관)은 元山領事(원산영사)에게 通牒(통첩)하기를 今後(금후) 大豆賣買(대두매매)를 障碍(장애)가 있을 때는 속히 영사관에 신고하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일본 거류민에게 공시한지 4일만인 11월18일 德源府使격인 감리 원산항 통상사무 申珩模는 일본영사관에 대하여 정부의 명령에 따라 본년 음력 11월1일부터 향후 1개년 간 일반 곡물류릐 수출을 금지하겠다는 것을 통고하고 급사를 정부에 보내어 훈령을 청하였으며 감리 신형모로부터 방곡령의 통고를 받은 久水 대리영사는 방곡령에 대하여 領事館(영사관)에서 아무 命令(명령)도 없으므로 이를 承諾(승락)할 수 없다고 하고 한便(한편) 公使館(공사관)에 防穀令(방곡령)의 通牒(통첩)을 받은 趣旨(취지)를 報告(보고)하였기 때문에 11月 29日 公使館(공사관)의 抗議(항의)로 政府(정부)에서는 前日(전일)과 같이 곡류 유출 금지를 해제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와 같이 정부에서 방곡령을 해제하였으나 감사 조병식은 대두의 판매를 금지한다고 더욱 강제적으로 단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鏡城(경성) 按撫營에서도 穀類輸出禁止(곡류수출금지)뿐 아니라 日本人(일본인)과의 商去來(상거래)를 一切(일체)하지 않는 紛擾(분요)를 演出(연출)하였다. 이 같은 形勢(형세)가 날로 甚(심)하여 日本人(일본인)의 地方(지방)旅行(여행)은 할 수가 없었고 各地方(각지방)의 賣買(매매)禁止(금지)는 極甚(극심)하였으며 元山市場(원산시장)에서는 日常(일상)必需品(필수품)과 食糧(식량)의 白米(백미)까지 日本人(일본인)에게 販賣(판매)를 禁(금)하였다.
   따라서 米穀(미곡)의 都小賣商(도소매상)에는 官史(관사)를 派遣(파견)하고 檢視(검시)하였으며 萬一(만일) 日本人(일본인)과의 商去來(상거래)하는 것이 發覺(발각)되는 境遇(경우)에는 投獄(투옥)하고 그 物品(물품)은 沒收(몰수) 當(당)하였으며 때로는 首枷(수가)를 씌우고 등에 大鼓(대고)를 지운 囚人(수인)을 日本(일본) 居留(거류)市街地(시가지)로 끌고 다니며, 穀物(곡물)을 賣買(매매)하지 말라고 한 不賣(불매)의 命令(명령)을 犯(범)하여서 罰(벌)을 받았다고 大鼓(대고)를 치면서 돌아다녔으며 더욱이 貿易(무역)과 金融(금융)은 梗塞(경색)되었고 大豆販賣(판매)契約(계약) 밑에 前渡(전도)된 資金(자금)의 回收(회수)는 絶望(절망)에 빠졌다.
   日本(일본)公使(공사)는 監司(감사)의 革職(혁직)을 申請(신청)코자 會談(회담)하여 政府(정부)에서는 高宗27年 1月 18日 國王(국왕)의 親裁(친재)를 얻어 監司趙秉式(감사조병식)에게 三等減俸(삼등감봉)의 處分(처분)을 宣告(선고)하였으니 이는 慣例(관례)에 따라 罷職(파직)되고 그 任地(임지)를 떠나는 處分(처분)임에도 不拘(불구)하고 그는 그 地位(지위)에 그냥 있으면서 防穀令(방곡령)의 解禁(해금)을 告示(고시)하였으며 裏面(이면)으로 各地方吏(각지방사)에게 穀類(곡류)를 搬出(반출)할 때 妨害(방해)할 것을 命令(명령)하였으니 咸興以北(함흥이북)과 沿海(연해)의 船舶出入地(선박출입지)는 이를 嚴守(엄수)하였으며 甚(심)한 곳에서는 大豆(대두)를 가득 실은 船舶(선박)을 抑留(억류)하여 놓고 出港(출항)치 못하게 船具(선구)를 强奪(강탈)하여 日本(일본)商人(상인)들에게 큰 威脅(위협)을 주었다.
   이에 驚愕(경악)한 日本(일본)居留民團(거류민단)은 監司(감사)의 交替(교체)와 損害賠償(손해배상)을 要求(요구)하는 會談(회담)을 訴願(소원)하는 請願書(청원서)를 갖고 同年(동년) 3月에 東京(동경)의 日本(일본)政府(정부)에 代表(대표)를 보내어 直接(직접) 提出(제출) 하였으므로 우리 政府(정부)에서는 監司趙秉式(감사조병식)을 4月 下旬(하순)에 忠淸道(충청도)監司(감사)로 轉任(전임)시키고 後任(후임)으로 韓章錫(한장석)이 赴任(부임)함으로써 完全히(완전히) 放穀解除(방곡해제)를 보았다.
   따라서 元山日人(원산일인) 商業會議所(상업회의소)에서는 防穀令(방곡령)으로 因(인)하여 입은 被害(피해)狀況(상황)과 損害額(손해액)을 調査(조사)하여 同年(동년)10月(월)에 損害賠償(손해배상)을 請求(청구)하였으며 同年(동년)12月(월)에 外務督辨(외무독변) 閔種墨(민종묵)과 日本代理公使(일본대리공사) 梶山(미산)과의 會談(회담)이 있었으나 解決(해결)의 方案(방안)을 찾지 못하였을 때 監司(감사)의 交迭(교질)로 新任監司李源逸(신임감사이원일)이 12月 中旬頃(중순경) 大豆搬出(대두반출)의 盛況期(성황기)에 또 다시 防穀令(방곡령)을 發布(발포)하였으므로 咸興附近(함흥부근)의 各郡吏(각군리)들이 積極的(적극적)으로 이를 同調(동조)하고 搬出(반출)을 妨害(방해)하였기 때문에 輸出貿易(수출무역)에 크게 打擊(타격)을 받았으나 곧 解除(해제)되었다.
   이같이 하여 放穀事件(방곡사건)의 會談(회담)에는 進陟(진척)이 없었고 朝鮮政府(조선정부) 內外(내외)의 政論(정론)은 더욱 紛糾(분규)한 것은 事大(사대)와 權勢(권세)의 黨派的爭論(당파적쟁론)과 因緣 的議論(인연적의론)이 始終結末(시종결말)을 얻지 못하게 되니 高宗(고종) 28年 6月에 日本公使(일본공사)는 防穀令事件(방곡령사건)의 解結權(해결권)은 外務督辨(외무독변)의 資格(자격)으로 主務談判委員(주무담판위원)이 될 수 없으면 領議政(영의정)과 面會(면회)하고 訣問(결문)하겠으며 萬一(만일)만일 解決(해결)이 보이지 않으면 直接(직접) 國王(국왕)을 拜謁(배알)하겠다고 强硬(강경)히 나오자 政府(정부)에서는 任應鎬(임응호)를 辨核官(변핵관)으로 任命(임명)하고 元山以北(원산이북)의 各地(각지)에 派遣(파견)하여 防穀令 前後(방곡령전후)의 商去來(상거래)와 大豆販賣狀況(대두판매상황) 및 運搬狀況(운반상황) 그리고 地方吏(지방리)의 金品掠奪(금품약탈)의 有無(유무)를 詳細히(상세히) 調査(조사)하여 報告(보고)하였으나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여론이 분분할 때 외무 督辨을 교송하고 후임으로 李容植을 임명하여 新任督辨(신임독변)과 日本公使(일본공사)는 會談(회담)을 再開(재개)하고 決答(결답)을 얻으려는 때 日本(일본)에서도 公使(공사)를 交送(교송)하고 辨理公使(변리공사)로 大石(대석)을 任命(임명)하므로써 高宗 30年부터 會談(회담)을 再開(재개)하였으나 妥協(타협)을 얻지 못하게 되자 4月 12日 日本(일본)은 軍艦 八重山(군함팔중산)을 끌고 와서 期限附(기한부)의 回答(회답)을 要求(요구)하게 되었으며 한便(한편) 淸國公使(청국공사) 袞世凱(곤세개)가 仲裁(중재)하였고, 日本公使(일본공사)는 直接國王(직접국왕)을 拜謁(배알)하고 回答(회답)을 請(청)하였으며 5月 12日 外務督辨(외무독변)의 交迭(교질)이 있어 後任(후임)으로 南延哲(남연철)을 任命(임명)하고 5月 19日에 南督辨(남독변)은 日本(일본)이 要求(요구)하는 賠償金(배상금) 4萬8千圓을 補償(보상)하겠다는 覺書(각서)를 大石公使(대석공사)에게 手交(수교)함으로써 3年 9個月(개월)만에 防穀令使件(방곡령사건)은 解決(해결)되었다.
   이로 因(인)하여 日本(일본)의 侵略手段(침략수단)은 積極的(적극적)으로 손을 뻗쳤으며, 一部(일부)에서는 淸國(청국)의 袞世凱(곤세개)에게 聲援(성원)을 얻어 이를 막고자 風雲(풍운)속에 휘말린 朝鮮政局(조선정국)은 두派(파)의 葛藤(갈등)밑에 混亂(혼란)을 비졌으나 一年(일년)도 못되어 끝내 淸日戰爭(청일전쟁)을 惹起(야기)시켰다.

1-2. 元山 開港(원산개항)과 放穀事件(방곡사건)

元山(원산)의 開港(개항
)

   西紀(서기) 1880年 李太王(이태왕) 17年(년) 5月(월)에 咸鏡道 德源郡(함경도덕원군) 元山津(원산진)을 開港(개항)하여 日本人(일본인)의 貿易(무역)을 許諾(허락)하고 同年(동년) 5月 23日에 日本總領事官(일본총령사관)을 開廳(개청)하였다. 이로부터 5年前(년전)에 發生(발생)한 日艦 雲揚號(일함운양호)가 江華島(강화도)에서 砲擊(포격)을 받은 以來(이래) 韓日間紛糾(한일간분규)가 繼續(계속)된 끝에 所謂(소위) 講和條約(강화조약)이 締結(체결)되었으며 이 條約(조약)의 交換(교환)으로 兩國(양국)間(간)에 使臣(사신)을 派送(파송)하고 韓國內(한국내)에 通商(통상)을 위한 開港(개항)을 決定(결정)하였던 것이다.
   開港(개항)에 관한 韓日(한일) 修交條規(수교조규)의 議定(의정)은 그 第5款(제5관) '京畿(경기), 忠靑(충청), 全羅(전라), 慶尙(경상), 咸鏡(함경), 五道(오도)의 沿海中(연해중) 通商(통상)에 便利(편리)한 港口(항구) 2個所(개소)를 指定(지정)하였다. 開港(개항)의 時期(시기)는 1877年 11月 卽(즉) 陰歷丙子年(음력병자년)2月(월)부터 算(산)하여 20個月(개월)에 當(당)하는 때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日本公使 花房義質(일본공사화방의질)은 咸鏡道 沿岸(함경도연안)의 實施 視察(실시시찰)을 決行(결행)하였다.
   當時 日本(당시일본)은 海軍(해군)에서 西南方(서남방)의 朝鮮沿海(조선연해)를 測量(측량)하였으나 江原(강원), 咸北以北(함북이북)은 아직 實測(실측)치 못한였던 것이다. 1879年 6月 日本公使(일본공사) 花房(화방)은 總領事(총령사) 前田獻吉等(전전헌길등)과 더불어 日本(일본) 商人十餘名(상인십여명)을 데리고 日艦(일함) 高雄(고웅)을 타고 永興灣(영흥만)에 回航(회항)하여 港內(항내) 數個處(수개처) 視察(시찰)하고 京城(경성)에 돌아가서 韓國政府(한국정부)와 交涉(교섭)끝에 德源郡(덕원군) 亦田面烽燧洞(역전면봉수동) 一帶(일대)를 日本專管居留地(일본전관거류지)로 決定(결정)하게 되었다. 當時(당시) 그 一帶(일대)는 人家(인가)가 稀少(희소)하고 한낱 草野(초야)에 不過(불과)하였다고 한다. 同年(동년) 7月 禮曹判官沈舜澤(예조판관 심순택)과 花房(화방) 日本公使間(일본공사간)에 元山津 開港豫約(원산진개항예약)을 議定(의정)하였는데 그 第 1 條(제1조)를 보면 '朝鮮(조선)政府(정부)는 1880年(년) 5月 以後(이후) 日本人(일본인)의 貿易(무역)을 위하여 咸鏡道(함경도) 元山津(원산진)을 開港(개항)한다. 그 居留地(거류지)는 長德山(장덕산) 및 그 西面(서면)의 海岸處(해안처)로서 그 地基幅員(지기폭원)은 草梁官(초량관) 의 實測(실측)에 依(의)함'으로 되어 있다.
   그 뒤 朝鮮(조선)政府(정부)는 일찌기 修信使(수신사)로서 日本(일본)에 來往(내왕)한 일이 있는 禮曹參判(예조참판) 金綺秀(금기수)를 德源府使(덕원부사)로 任命(임명)하고 元山開港(원산개항)의 事務(사무)를 擔當(담당)토록 하였다. 그後 日本政府(일본정부)는 元山居留地(원산거류지)에 總領使官(총령사관)을 設置(설치)하고 1880年 5月 20日에 汽船(기선) 秋津丸(추진환)으로써 總領事以下(총령사이하) 官員等(관원등)이 來往(내왕)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商人(상인)들이 들어 오기 시작하였고, 5月 23日에 總領事官(총영사관)의 開廳式(개청식)을 擧行(거행)하였다. 日帝下(일제하)36年 동안 이날을 日人(일인)들은 開港(개항)紀念日(기념일)로 定(정)하고 해마다 行事(행사)를 지낸 것이 8.15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1-3.各國 互市場(각국호시장)이 된 元山港

   上述(상술)한 바와 같이 元山의 開港(개항)은 그 開港(개항) 豫約(예약)의 協定(협정)에 依(의)하여 日人(일인)들에게 關稅(관세)를 徵收(징수)치 않고 다만 入港(입항)船舶(선박)에 대하여 大小(대소)에 따라 若干(약간)의 入港稅(입항세)를 課稅(과세)할 뿐이었으므로 海關(해관)의 施設(시설)이 없었다. 그뒤 李太王(이태왕) 20年에 이르러서 淸國(청국)과 朝鮮(조선)間(간)에 相互(상호)條約(조약)을 締結(체결)하고 會寧(회령), 慶源(경원)등 豆滿江畔(두만강반)의 淸市(청시)라 稱(칭)하는 交易(교역)을 폐하고 새로 京城(경성)을 開棧市場(개잔시장)으로 하였다. 同年(동년) 11月 英國(영국)또한 京域(경역)을 互市場(호시장)으로 할 條約(조약)을 締結(체결)하고 그 翌年(익년)에 同批准交換(동비준교환)을 畢(필)함으로써 各國(각국)이 모두 交易(교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元山港의 貿易(무역) 또한 西紀(서기) 1884年(년) 2月 1日부터 外國貿易(외국무역)의 手續(수속)을 밟게되어 朝鮮政府(조선정부)는 海關(해관)을 日本人居留地(일본인거류지)의 埠頭(부두)에 開廳(개청)하고 英國人(영국인)을 稅關長(세관장)으로 任命(임명)하였다. 이 稅關事務(세관사무)는 李鴻章(이홍장)의 幕下(막하)였던 英國人(영국인) 로버트·허트의 監督(감독)處理(처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同時(동시)에 德源府使(덕원부사)로 하여금 監理元山港 通商事務(감리원산항통상사무)를 兼任(겸임)시키고 監理暑(감리서)를 元山市 長德山麓(원산시장덕산록)의 高地(고지)(日帝時泉町一丁目)(일제시천정일정목)에 建設(건설)하였다. 그 뒤 同年(동년) 11月에 이르러서 元山港(원산항)을 各國 互市場(각국호시장)으로 決定(결정)하였다.
   中國(중국)政府(정부)는 1885年 元山(원산)에 假理事府(가이사부) 卽(즉) 假領事官(가영사관)을 設置(설치)하였으나 그때까지 居留地(거류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中國(중국)商人(상인)들은 日本(일본)居留地(거류지)에서 日人(일인)들과 雜居(잡거)하면서 貿易(무역)에 從事(종사)하였다. 그뒤 1887年 4月에 이르러서야 中國人(중국인)專管(전관)居留地(거류지)의 決定(결정)을 보게되었고 그 理事府(이사부)를 建設(건설)하게되었으나 其他(기타)外國人(외국인)으로 元山(원산)에 처음들어온 것은 基督敎(기독로)宣敎師(선교사)로서 1884年 이었다.

1-4.元山의 放穀事件(방곡사건)

   李太王(이태왕) 26年, 西紀(서기) 1889年 18日 監理(감리) 元山港(원산항) 通商(통상) 事務(사무) 德源府使(덕원부사) 申珩模(신형모)는 日本領事官(일본영사관)에 對하여 朝鮮政府(조선정부)의 命令(명령)에 依據(의거) 同年(동년) 陰曆(음력) 11月 1日부터 向後 一個年間(향후일개년간) 一般穀物類(일반곡물류)의 輸出(수출)을 禁止(금지)할 뜻을 通告(통고)하였다.
   이보다 먼저 咸鏡道觀察使(함경도관찰사) 監使(감사) 趙秉式(조병식)이 咸興地方大豆賣買(함흥지방대두매매)를 禁止(금지)하였다는 與論(여론)이 紛紛(분분)하였다. 이러한 情報(정보)를 들은 元山日本領事代理 久水三郞(원산일본영사대리구수삼랑)은 京城(경성)에 있는 日本公使館(일본공사관)에 이 事實(사실)을 具申(구신)하였고, 日本公使(일본공사) 代理(대리) 近藤(근등)은 韓國政府(한국정부)에 그 禁止令解消(금지령해소)를 咸鏡道觀察使(함경도관찰사)에 命하였다고 傳(전)하였다. 日本公使館(일본공사관)으로부터 이러한 通牒(통첩)을 받은 元山領事館(원산영사관)은 11月 14日에 이 事實(사실)을 日本居留民(일본거류민)에게 公示(공시)하는 同時(동시)에 萬一(만일) 大豆賣買(대두매매)에 障碍(장애)가 있을 때는 卽時(즉시) 領事館(영사관)에 申告(신고)하도록 하였다.
   그 뒤 監理 申珩模(감리신형모)와 久水代理領事間(구수대리영사간)에 防穀領解消與否(방곡령해소여부)에 대한 論難(논란)과 是非(시비)가 벌어졌으나 韓國政府(한국정부)의 命令(명령)에 依(의)하여 前日(전일)의 穀類輸出禁止(곡류수출금지)는 解除(해제)된 旨(지)를 日本領事(일본영사)에 通告(통고)하였다. 그러나 監使趙秉式(감사조병식)은 그 前年(전년)부터 咸鏡道內各地方(함경도내각지방)에 卜稅(복세) 貨物稅(화물세)의 徵收(징수)를 勵行(여행)시켜서 各處(각처)에서 日本人(일본인)의 輸出入貨物(수출입화물)에 이 稅金(세금)을 賦課(부과)하였다. 그리하여 日本領事(일본영사)는 그 課稅(과세)의 不當(부당)함과 貿易(무역)에 支障(지장)이 많다고 抗議(항의)하여왔으나 趙秉式(조병식)은 이를 冷然히(냉연히) 拒絶(거절)하고 日人(일인)의 關與(관여)할 바 아니라고 一蹴(일축)하였다. 할 수 없이 日人들은 元山領事館(원산영사관)을 거쳐 京城公使館(경성공사관)으로 하여금 韓國政府(한국정부)에 抗議(항의)한 結果(결과) 一時的(일시적)으로 課稅(과세)는 中斷(중단)되었으나 며칠이 자나지 못해서 徵稅(징세)를 다시 하는 同時(동시)에 到處(도처)에서 日人과 韓國人間(한국인간)에 衝突(충돌)이 頻繁(빈번)하게 되었다. 日本人(일본인)의 侵略根性(침략근성)과 橫暴(횡포)에 대한 憎惡感(증오감)과 排日感情(배일감정) 은 벌써 이때부터 露骨化(노골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地方官史(지방관사)들과 平素(평소) 日本人(일본인)들의 所行(소행)을 괘씸히 보고있던 韓國人(한국인)들이 防穀令(방곡령)을 契機(계기)로 到處(도처)에서 日本商人(일본상인)뿐 아니라 日人들에게 몰래 米穀(미곡)을 賣買(매매)하는 韓人(한인) 앞잡이들까지도 膺懲處斷(응징처단)하였던 것이다. 西紀(서기) 1889年 3月 三南地方(삼남지방)에 旱魃(한발)이 甚(심)하여 政府(정부)에서는 그 對應策(대응책)으로 米穀(미곡)의 收入稅(수입세)를 免除(면제)까지 하게 되었는데 日人들은 當年 咸南(당년함남)의 大豆(대두)가 豊作(풍작)임을 奇貨(기화)로 이를 輸出(수출)하려고 온갖 手段(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 購買(구매)에 血眼(혈안)이 되었으므로 이를 極力(극력) 防止(방지)하는 韓國人(한국인)과의 사이에 衝突(충돌)이 한층 甚(심)하였다.
   그리하여 大豆等 米穀(대두등미곡)뿐만 아니라 日人(일인)들의 모든 商行爲(상행위)를 干涉(간섭)치 않을 수 없었으며 그 奸狡(간교)한 日人들의 商行爲(상행위)를 憎惡(증오)하는 排日感情(배일감정)은 漸高(점고)되어서 元山(원산)에서부터 鏡城按撫營(경성안무영)까지 鐵桶(철통)같이 賣買禁止(매매금지)를 斷行(단행)하고 江原道 沿岸(강원도연안)의 水産物賣買(수산물매매)에 까지 波及(파급)하여 韓日人間(한일인간)에 紛糾(분규)와 衝突(충돌)이 惹起(야기)되었다.
   이처럼 韓日人間(한일인간)에 形勢(형세)는 日益惡化(일익악화)하여 安邊(안변)과 高城等地(고성등지)에서 日本人(일본인)의 死傷者(사상자)까지 나게 되어 日人들의 地方旅行(지방여행)이 危險(위험)한 事態(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各 地方(지방)에서 日人(일인)들에 대한 賣買禁止(매매금지)는 더욱 極烈(극렬)해지고 드디어는 在元山(재원산) 日人(일인)들은 元山市場(원산시장)에서 日常(일상) 必需(필수)의 糧穀(양곡) 조차 購得(구득) 할 수 없게 되었다. 各米穀商(각미곡상)은 市場(시장)에서도 一切 日人(일체일인)에게는 食糧(식량)이나 米穀(미곡)을 팔지 아니하였으므로 日人(일인)들은 하는 수 없이 日本本土(일본본토)에서 汽船便(기선편)으로 糧穀(양곡)을 실어다 供給(공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元山市民(원산시민)들의 排日感情(배일감정)이 얼마나 高潮(고조)되었음과 그 民族的團結力(민족적단결력)이 얼마나 徹底鞏固(철저공고)하였음을 이 防穀令事件(방곡령사건)한가지만 가지고도 可히 判斷(판단)할 수 있다.
   日本領事館(일본영사관)은 京城公使館(경성공사관)에 累次陳情(누차진정)을 계속하였으나 解禁(해금)은 커녕 形勢(형세)는 더욱 惡化(악화)될 뿐 日本人(일본인)의 商圈(상권)은 날로 萎縮(위축)되는 反面(반면)에 中國人(중국인)의 商勢(상세)는 繁盛(번성)하여 갔다. 日本人(일본인)들은 그들의 商權(상권)을 維持(유지)하고 그 商勢(상세)는 恢復(회복)코자 온갓 奸計(간계)를 부린 나머지 咸鏡監使趙秉式(함경감사조병식)의 革職以外(혁직이외)에 다른 方途(방도)가 없음을 알고 日本代理公使(일본대리공사) 近藤(근등)으로 하여금 京城(경성)에 올라가 隱密(은밀)한 工作(공작)을 꾸민 일도 있다.
   李太王(이태왕) 27年 1月 18日 咸鏡監使趙秉式(함경감사조병식)은 穀物賣買解禁(곡물매매해금)의 告示(고시)를 發(발)하였으나, 이는 다만 表面的(표면적)인 形式(형식)에 不過(불과)하였고 內容(내용)으로는 亦是(역시)各地方官吏(각지방관리)들로 하여금 穀類(곡류)의 搬出(반출)을 못하고록 하였으니 江原道(강원도) 通川 庫底港(통천고저항)에서는 大豆積入船(대두적입선)의 船具(선구)를 奪取抑留(탈취억류)하는 等險惡(험악)한 事態(사태)가 계속되었다. 元山開港(원산개항)으로부터 7, 8年間(년간) 日本商人(일본상인)들의 獨占的(독점적)이었던 貿易(무역)이 1889年부터 淸日間(청일간) 對立競爭(대립경쟁)이 되어 그 去來高(거래고)를 比較(비교)하면 日六, 淸四(청사)의 比例(비례)이나 居留人口(거류인구)의 比率(비율)로 보면 그 反比例(반비례)로 日三(일삼), 淸七(청칠)의 結果(결과)를 빚어냈다. 事態(사태)가 이렇게 되자 日人(일인)들은 참을 수 없었던지 1890年 4月에 그들의 外務大臣(외무대신) 靑木(청목)에게 陳情書(진정서)까지 내었다.
   그 뒤 日人(일인)들이 그 革職(혁직)을 陰謀(음모)한 咸鏡監使(함경감사)은 忠淸道 監使로 도리어 榮轉(영전)하게 되어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趙秉式(조병식)의 後任(후임)으로 韓章錫監使(한장석감사)가 赴任(부임)하게 되자 防穀令(방곡령)은 드디어 解禁(해금)을 보게 되었다.

2. 抗日運動 (항일운동)

2-1. 己未年(기미년) 國恥日(국치일)과 元山(원산) 全市街(전시가) 撤市(철시)

   西紀(서기) 1919年은 3.1.獨立運動(독립운동)이 勃發(발발)하여 萬歲示威(만세시위)가 계속 天地(천지)를 振動(진동)하고 있었다. 이해 8月 29日 國恥日(국치일)을 當(당)하여 元山(원산)에서 國恥日 傳單配布(국치일전단배포)로 靑少年(청소년) 6 名이 檢擧(검거)되었다.
   當時(당시) 日警(일경)은 元山서 무슨 騷動(소동)이라도 일어날 것을 警戒(경계)하여 連日連夜(연일연야) 물샐틈없는 警戒綱(경계강)을 펼치고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 逮捕(체포)에 東奔西走(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情報網(정보망)에 入手(입수)된 傳單(전단) 一枚(1매)로 大驚失色(대경실색)치 않을 수 없었다. 傳單(전단)에 印刷(인쇄)된 檄文(격문)의 內容(내용)을 보면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 決死隊特派員(결사대특파원)의 名儀(명의)로 된 것인데 今 8月 29日은 우리 民族(민족)의 씻지 못할 國恥日(국치일)이다. 우리 同胞(동포) 여러분 우리의 錦繡江山(금수강산)을 奸惡無道(간악무도)한 저 日本(일본)놈들의 총칼 앞에 송두리째 빼앗긴 恥辱(치욕)의 날이다. 자나깨나 저 怨讐(원수)의 日本(일본)놈들을 우리 國土(국토)에서 몰아내자. 이것이 우리 民族(민족)의 所願(소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 徹天之恨(철천지한)을 풀고 이날의 恥辱(치욕)을 가슴속 깊이 잊지 않기 爲(위)하여 元山 (원산) 全市(전시)는 撤市(철시)를 斷行(단행)함으로써 愛國心(애국심)을 發揮(발휘)하고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總進軍(총진군)하라. 萬一(만일) 撤市(철시)를 하지 않는 者(자)가 있다면 그는 朝鮮民族(조선민족)이 아님을 盾做(간주)하고 今夜中(금야중)으로 그 店鋪(점포)에 放火(방화)하고 그 主人(주인)을 殺戮(살육)하는 것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고 尊敬(존경) 하는 同胞(동포) 여러분! 一心團結(일심단결)로써 日本(일본)놈들을 이땅에서 몰아내자.
   以上(이상)과 같은 피눈물 나는 內容(내용)의 傳單(전단)을 29日 새벽 元山(원산) 各處(각처)에 撒布(살포)하였다. 마침내 8月 29日 아침이 되자 元山(원산) 全市街(전시가)는 完全(완전)히 撒布(살포)함으로써 우리 民族(민족)의 抗日鬪爭(항일투쟁)과 그 團結力(단결력)을 誇示(과시)하였다. 이에 놀란 日警(일경)과 日本海兵隊(일본해병대)는 그 暴惡(폭악)한 銃劍(총검)으로 市民(시민)을 威脅(위협)하고 無辜(무고)한 愛國靑少年(애국청소년)과 抗日鬪士(한일투사)들을 檢擧(검거)하였는데 被劍者(피검자)는 金相翊(김상익), 趙炳夏(조병하), 安夢龍(안몽용), 朴義淳(박의순), 趙炳奎(조병규), 金今石(김금석) 등이었으며 當時(당시)의 日警(일경) 取調官中(취조관중)에는 朝鮮人警部(조선인경부) 洪洛龜(홍낙구)라는 叛逆者(박역자)가 끼어 있었다.

2-2. 3·1 運動記(운동기)

   第 1 次世界大戰(제1차세계대전)이 終末(종말)을 보게 되자 파리에 모였던 世界萬邦會議(세계만방회의)에서 윌슨 美國大統領(미국대통령)의 民族自決原則(민족자결원칙)에 자극을 받은 우리나라 愛國志士(애국지사) 33人이 中心(중심)이 되어 西紀(서기) 1919年 3月 1日을 期하여 서울을 爲始(위시)하여 擧國的(거국적) 獨立運動展開(독립운동전개)를 謀議(모의)함에 있어 元山南村洞(원산남촌동) 監理敎會敎師(감리교회교사) 鄭春洙(정춘수)는 33人의 1人으로 咸鏡南北道(함경남북도)와 江原道(강원도)의 責任者(책임자)로 活動(활동)을 開始(개시)하였다. 먼저 元山地方 代表(원산지방대표)로 敎育者(교육자) 李可順(이가순)을 同年(동년) 2月 26日 서울로 派遣(파견)하여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을 引受(인수) 歸鄕(귀향)하여가지고 同志(동지)들과 協議(협의) 蜂起場所(봉기장소)를 上市場(상시장)으로 定(정)하는 한便(한편) 萬般準備態勢(만반준비태세)를 갖추어 놓고 드디어 西紀(서기) 1919年 3月 1日 午後(오후) 4時(사시) 人力車(인력거)에 分乘(분승)한 郭明理(곽명리), 李可順(이가순), 趙炳喆 指揮(조병철 지휘)로 千餘名 群衆(천여명군중)이 吳京達(오경달)이 指揮(지휘)하는 樂隊(악대)를 先頭(선두)에 세우고 日本市街地(일본시가지)로 行進(행진)하면서 萬歲(만세)를 부르고 지나갈 때 憲兵(헌병)과 警察(경찰)은 解散(해산)을 종용하였다.
   이 보다 먼저 蜂起場所(봉기장소)인 上市場(상시장)에서 數千群衆(수천군중)이 雲集(운집)한 앞에서 李可順(이가순)은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을 朗讀(낭독)하였고 郭明理(곽명리), 趙炳喆(조병철), 李順榮(이순영), 車用運(차용운), 金相翊等(김상익등)은 우리나라 獨立(독립)을 要求(요구)하는 불뿜는 演說(연설)을 하므로 群衆(군중)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天地(천지)가 떠나갈듯한 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한 후 예수 敎人(교인)과 天道敎人(천도교인)이 先頭(선두)에 서서 太極旗(태극기)를 들고 獨立(독립)宣言書(선언서)를 살포하면서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 앞에 到着(도착)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자 日軍警(일군경)은 愛國群衆(애국군중)에게 消火(소화)호스와 其他式器(기타식기)로써 示威群衆(시위군중)에 解散(해산)시켰으나 群衆(군중)은 生死(생사)를 決斷(결단)하고 萬歲(만세)를 부르다가 日警(일경)의 無慈悲(무자비)한 武力(무력)에 依(의)하여 解散當(해산당)하였는데 이날 檢擧(검거)된 人士(인사)는 50餘人(여인)에 達(달)하였다. 그 中 15人은 取調後(취조후) 檢事局(검사국)으로 押送(압송)되었는데 그 名單(명단)은 다음과 같다.
   郭明理(곽명리), 李順榮(이순영), 李可順(이가순), 趙炳喆(조병철), 吳光恩(오광은), 車用運(차용운), 金基憲(김기헌), 吳京達(오경달), 金章錫(김장석), 金鎭定(김진정), 鄭延壽(정연수), 印利極(인리극), 李鎭九(이진구), 李啓述(이계술), 咸泰榮(함태영) 等
그 中에서 郭明理(곽명리)는 取調中(취조중)答辯(답변)이 명료하고 言笑自若(언소자약)하여 取調(취조)하는 사람도 그 기상에 노랐었다. 郭은 그때 20歲였다.
   3月 18日 郭明理 以外(곽명리이외) 15人이 保安法(보안법)違反(위반)으로 起訴(소)되었다는 말을 듣고 數千(수천)市民(시민)이 一大(일대)소동을 일으키고 또다시 萬歲(만세)를 불러 市內(시내)는 긴장하였다. 天道敎區(천도교구)에는 出入(출입)이 禁止(금지)되고 3月 1日事件(사건)의 指揮者(지휘자)로 지목하고 수사하던 警察(경찰)은 文哲模外(문철모외) 예수교인 천도교인 40餘名(여명)을 檢擧(검거)하여 그해 8月 23, 4 兩日間(양일간) 獨立檄文(독립격문)이 市內(시내)에 살포되었는데 3人이 主謨者(주모자)로 檢擧(검거)되었다.
   9月 23日 午後(오후) 10時頃(시경) 예수교에서 經營(경영)하는 保光中學(보광중학)과 公立普通學校(공립보통학교) 生徒(생도) 6百餘名(6백여명)이 示威運動(시위운동)을 하여 市街地(시가지)로 行進中(행진중) 殖産銀行元山支店(식산은행원산지점), 東洋拓殖元山支店(동양척식원산지점), 郵便局(우편국), 警察署(경찰서) 其他(기타)日本人(일본인)住宅(주택) 7個所(개소)를 襲擊(습격)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다가 警察(경찰)의 發砲(발포)로 4.5人이 부상을 당하고 10餘人(여인)이 검거된후 해산을 당하였는데 이것은 海蔘威(해삼위)에서 독립단이 들어와서 激勵(격려)한 것이다.
   한편 5月5日 赤田面(적전면) 사무소에 數百名(수백명)이 달려가서 民籍簿書類(민적부서류)를 빼앗아 들고 萬歲(만세)를 부르다가 검거되어 해산을 당하였는데 指揮(지휘)한 사람은 同面(동면) 光成(광성)학교 선생 朴智策(박지책)이었다. 그는 항상 排日思想(배일사상)을 가졌었으며 그때 面職員(면직원)에게 現下 時局(현하시국)을 알지 못하고 倭(왜)놈에게 아부한다고 하면서 3人에게 辭退(사퇴)를 권한 사실이 있었다.
   이상은 元山의 3.1 運動史(운동사)의 개요이고 3.1運動(운동)의 總本營(총본영)인 서울에서는 33人의 民族代表(민족대표)들이 처음의 豫定(예정)을 變更(변경)하여 年後(후) 2時 태화관에서 獨立宣言式(독립선언식)을 擧行(거행)하였다. 그러나 서울市內(서울시내) 各專門學敎(각전문학교)와 中等學校(중등학교) 學生(학생)들은 豫定(예정)한 正午에 파고다 公園(공원)에 집합하였다. 이때 우리 元山出身(원산출신)인 姜基德(강기덕)은 普成專門法科(보성전문법과) 3學年(학년) 在學中(재학중)인 몸으로 先頭(선두)에 섰고 學生(학생)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秩序整然(질서정연)하게 파고다 公園(공원)에 들이닥쳤고 경신중학, 중동중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延專(연전)은 金元壁(김원벽)이, 경성의전은 韓偉健(한위건), 金成國等(김성국등)을 앞장섯고 또한 梨花女中(이화여중), 淑明女中(숙명여중), 貞信女中(정신여중)등 6千名의 學生(학생)과 일반인이 모인 가운데서 姜基德 (강기덕)은 日警(일경)에 체포되어 고문끝에 不具(불구)에 가까운 몸으로 長期服役(장기복역)까지 하였는데 그 豫審調書(예심조서)와 警察調書(경찰조서)의 記錄(기록)과 姜基德(강기덕)에 對(대)한 取調書內容(최조서내용)은 5-1)의 내용에 있다.

2-3. 元山第2獨立萬歲(독립만세) 運動(운동)

   第 1 차 3月 1日 獨立運動萬歲事件(독립운동만세사건)에 뒤이어 翌年(익년) 8月 美聯邦合衆國(미연방합중국) 上下議員 韓國視察(상하의원한국시찰단)의 來韓(내한)을 契期(계기)로, 이 天載(천재) 一遇(일우)의 機會(기회)를 默過(묵과)할 수 없어 全國的(전국적)으로 抗日運動(항일운동)이 展開(전개)되었다.
元山地方(원산지방)에서는 趙炳喆(조병철), 金章錫(김장석), 李容喧(이용훤), 金秉綸(김병륜)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連日(연일) 秘密會合(비밀회합)을 가지고 擧事(거사)를 謀議(모의)하였다.
 當時의 行動隊責任(행동대책임)은 趙炳喆(조병철), 金相翊(김상익), 李容暄(이용훤) 3人이었고 隊員(대원)의 核心人物(핵심인물)을 보면 金基石(김기석), 趙炳夏(조병하), 朴載淳(박재순), 安夢龍(안몽용), 趙炳奎(조병규),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聖駿(김성준), 崔鍾泫(최종현), 鄭學龍(정학용)등 11名外 數十名(수십명)이었다.
   西紀(서기) 1920年 8月中(월중) 美國(미국) 上下議員團(상하의원단)이 來韓視察(내한시찰)할 時期(시기)에 맞춰서 一薺(일제)히 蜂起(봉기) 獨立萬歲(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의 韓國(한국)에 대한 不當(부당)한 抑壓(억압)과 暴擧(폭거)를 暴露(폭로)함으로써 韓國(한국)에 대한 美議員團(미의원단)의 認識(인식)을 새롭게 하고 韓國(한국)의 自主獨立(자주독립)에 대한 國際與論(국제여론)을 喚起(환기)시키려는 計劃(계획)이었다.
   8月 20日 前期(전기) 核心分子(핵심분자)들은 當時 東亞日報(당시동아일보) 元山 支局(원산지국)에서 會合(회합)을 가지고 敍上(서상)의 趣旨(취지)에 完全(완전) 合議(합의)를 본 후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 決死隊(결사대)라는 名稱(명칭)아래 各者 擔當部暑(각자담당부서)까지 定(정)하였다.
全國民(전국민)이 熱望(열망)하는 韓國民族(한국민족)의 自主(자주) 獨立(독립)을 爭取(쟁취)하기 위하여 日本人(일본인)을 追放(추방)하고 美國(미국)의 援助(원조)를 받도록 2千萬 同胞(동포)는 總蹶起(총궐기)하라는 傳單(전단)을 元山全市街(원산전시가)에 撒布(살포)하였다. '韓國(한국)의 自主獨立(자주독립)을 위하여 美國 國會議員(미국국회의원)을 歡迎(환영)하라. 全市街(전시가)는 撤市(철시)하고 親日派(친일파)는 殺戮(살륙)하라. 親日派(친일파)의 재산은 沒收燒却(몰수소각)하고 日本商品(일본상품)의 賣買(매매)를 禁止(금지)하고 官公署(관공서)는 破壞(파괴)하라'는 激熱(격열)한 內容(내용)의 傳單(전단)을 全市(전시)에 뿌렸다.
   美議員團歡迎(미의원단환영)을 위하여 元山代表(원산대표)로 金相翊(김상익)이 上京(상경) 同年(동년) 8月 24日夜 서울서 蜂起(봉기)한 歡迎(환영) 萬歲運動(만세운동)에 加擔(가담)코 先頭(선두)에 서서 安國洞(안국동) 一帶(일대)의 責任者(책임자)로 活動(활동)하였다.
   同年(동년) 9月 23日 (陰 8月 23日) 달밝은 밤에 崔鍾泫(최종현),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등 前記(전기) 行動隊員(행동대원)들은 元山南山(원산남산)아래 長春橋畔(장춘교반)에 集合(집합)하여 獨立萬歲(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여 同樂座(동악좌)까지 이르는 동안 敎百名(교백명)의 市民(시민)이 이 隊列(대열)에 參加(참가)하여 行進(행진)하였다. 萬歲聲(만세성)은 山河(산하)를 울리고 데모隊(데모대)의 意氣(의기)는 衝天(충천)하였다.
   이에 驚愕(경악)한 日本警察(일본경찰)은 唐慌(당황)한 끝에 銃(총)을 亂射(난사)하면서 示威隊列(시위대열)을 向(향)하여 反擊(반격)하여 오매 示威群衆(시위군중)은 그들과 對決(대결)한 나머지 다시 全市街(전시가)로 번져서 元山市街(원산시가) 全體(전체)가 萬歲(만세)의 물결로 번졌다.
日警(일경)의 發砲(발포)로 男女(남녀) 各(각) 1 名이 殉死(순사)하였으며 數十名(수십명)의 負傷者(부상자)가 發生(발생)하였다. 이 事件(사건)으로 被逮(피체)된 人員(인원)이 처음에는 數千名(수천명)에 達(달)하였는데 그가운데 投獄(투옥)된 數(수)는 49名(명)이었다.

投獄者(투옥자) 名單(명단)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 金秉綸(김병륜), 崔演熙(최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安在燦(안재찬), 李養根(이양근), 李永福(이영복), 鄕鳳升(향봉승), 金源昊(김원호), 李君壽(이군수), 金演根(김연근), 崔明福(최명복), 鄭學龍(정학용),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東俊(김동준),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姜東根(강동근), 崔文煥(최문환), 徐元春(서원춘), 南相斌(남상빈).
   이 事件(사건)에 대한 1920年(년) 豫(예) 第(제) 14 號(호)에 依(의)한 同豫審綜結書(동예심종결서)를 다음에 더듬어서 그 全貌(전모)를 보면 얼마나 거창하고 民族愛(민족애)에 불타는 獨立(독립)鬪爭(투쟁)이었음을 可(가)히 짐작할 수 있다. 먼저 主文(주문)을 보면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 李鳳雲(이봉운)등에 대하여는 出版法(출판법) 및 大正(대정) 8年 制令(제령) 第 7 號(호) 違反(위반)事件(사건)
●金秉綸(김병륜)外(외) 14名에 대하여는 大正(대정) 8年制令(년제령) 第(제) 7 號(호) 違反(위반)事件(사건)
●崔鍾濱(최종빈) 外(외) 4名은 第(제)7號(호) 違反(위반) 및 騷擾事件(소요사건)
●金演熙(김연희) 外(외) 21名은 第(제) 7 號(호) 違反(위반) 및 騷擾(소요), 建物損壞事件(건물손괴사건)
●金長涉(김장섭)에 대하여는 騷擾(소요), 建物損壞事件(건물손괴사건)으로 咸興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의 公判(공판)에 附(부)하였다.

   그 外(외) 李君壽(이군수), 鄭學龍(정학용)등 17名(명)에 대하여는 免訴(면소)한다고 하였다.
   元山(원산)이 낳은 民族運動(민족운동)의 先驅者(선구자)는 抗日獨立鬪士(항일독립투사)이며 愛國者(애국자)의 龜鑑(구감)이라고 할 49人(인)에 대하여 倭(왜)놈들은 온갖 不法(불법)한 罪名(죄명)을 뒤집어 씌워서 裁判(재판)까지 하였으니 지금 생각하여도 實(실)로 痛憤(통분)키 그지 없는 일이다.
   그들이 造作(조작)한 주문을 상고 하면 이들 모든 愛國者(애국자)들이 '排日思想(배일사상)을 抱懷(포회)한 者(자)'로 '大正(대정) 8年(년) 2月以後(2월이후) 鮮內各地(선내각지)에 朝鮮獨立(조선독립) 運動(운동)을 일으켜 其方法(기방법)으로 獨立(독립)思想(사상)을 鼓吹(고취)하여 國憲(국헌)을 紊亂(문난)할 不穩文書(불온문서)를 作成(작성) 配付(배부)하야 民心(민심)을 煽動(선동) 治安(치안)을 妨害(방해) 朝鮮獨立(조선독립)의 實現(실현)을 기하고자' 크게 亂動(난동)하였다는 것이다.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은 大正(대정) 9年(년) 8月中(월중) 美國(미국) 上下議員團(상하의원단)이 同月(동월) 24日頃(24일경) 入鮮(입선)함을 間知(간지), 機會(기회)가 到來(도래)하였다 하여 其(기) 入京(입경)에 앞서 民心(민심)을 煽動(선동), 惑亂(혹난)하야 右議員團(우의원단)으로 하여금 朝鮮民族(조선민족)의 獨立希望(독립희망)을 看取(간취)시켜 其同情(기동정)을 求(구)할 것을 企圖(기도)하여' 會合謀議結果(회합모의결과) '上海(상해)臨時政府(임시정부) 決死隊(결사대)'란 名稱(명칭)으로 名名(명명) 擔當(담당)部署(부서)를 定(정)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朝鮮獨立(조선독립)을 위한 愛國精神(애국정신)이 얼마나 투철하였음과 이를 爭取(쟁취)하기 위한 廣範(광범)한 計劃(계획)과 組織(조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犧牲精神(희생정신)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上海(상해)臨時政府(임시정부) 決死隊(결사대)'의 이름아래 撒布(살포)된 傳單(전단)의 內容(내용)을 보면 '今般(금반) 美國議員 諸氏(미국의원제씨)가 朝鮮(조선)民族(민족)의 獨立(독립)을 熱望(열망)하는 程度(정도)를 周知(주지)코저 卽(즉) 韓國(한국)獨立(독립)을 援助(원조)키 爲(위)하여 8月 24日 入京(입경)함에 吾人(오인) 千萬(천만) 同胞(동포)는 一齊(일제)히 奮起(분기)하여 此一行(차일행)을 歡迎(환영)할지어다. 그리고 此際(차제)에 撤市(철시)치 않는 者(자)는 放火(방화)하며 親日派(친일파)는 殺戮(살육)하고 其家屋(기가옥)을 燒却(소각)하라.

日本(일본)商品(상품)의 賣買(매매)禁止(금지)
官公署(관공서)를 破壞(파괴)하라.


   神(신)은 吾人(오인)의 天賦(천부)의 自由(자유) 獨立權(독립권)을 保護(보호)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에서 親日派(친일파) 殺戮(살육), 官公署(관공서)破壞(파괴) 日本(일본)商品(상품)의 賣買(매매)禁止(금지)등 條項(조항)으로 徹頭徹尾(철두철미) 極限(극한)鬪爭(투쟁)이 歷然(역연)히 나타나 있다.
   金章錫(김장석)과 李鳳雲(이봉운)은 德源郡斗南里(덕원군두남리) 聚星學校(취성학교) 敎師室(교사실)에서 秘密히(비밀히) 同校膽寫版(동교담사판)으로 前記宣言文(전기선언문)을 數百枚(수백매) 印刷(인쇄)하여 東亞日報 元山支局(동아일보원산지국)으로 運搬(운반), 金相翊(김상익) 李用暄(이용훤), 兩人(양인)에게 各半(각반)씩 交付(교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金相翊(김상익), 李用暄(이용훤)은 金秉綸(김병륜)과 더불어 前記(전기) 宣言文(선언문)을 封筒(봉통)에 한장씩 넣어서 8月 22, 23日을 期(기)하여 市內(시내) 南山洞(남산동), 海岸通(해안통)등 都心地帶(도심지대)의 家家戶戶(가가호호)에 뿌렸던 것이다.
 또 全聖球(전성구)도 同年(동년) 23日 金秉綸方(김병륜방)에서 받은    前記宣言文(전기선언문)을 南山麓一帶(남산록일대)의 집집마다에 집어 넣었다고 하였다. 판결문은 5-2) 참조.

2-4. 抗日武裝蜂起準備(항일무장봉기준비)와 爆彈埋藏事件(폭탄매장사건)

   元山(원산)은 日人(일인)들의 소위 元山開港(원산개항)으로 일찍부터 日本人(일본인)들이 來襲(내습)하여 韓國(한국)을 植民地化(식민지화) 하려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北韓(북한)에서 제일 먼저 日人(일인)이 발을 들여딛인 곳도 元山(원산)이요, 日人(일인)들과 먼저 接觸(접촉)을 가지게 되었던 것도 元山人(원산인)들 일뿐 아니라 그들과 去來(거래)를 하게된 것도 元山人(원산인)들이다.
   그래서 日人(일인)들의 侵略性(침략성)과 島國根性(도국근성)을 먼저 알게 된 것도 元山人(원산인)들이다.
   元山(원산)에는 開港(개항)과 同時(동시)에 居留地(거류지)를 定(정)해 놓고 처음에는 10里(리) 以內(이내)로 制限(제한)하였으나 商利(상리)에 약삭빠른 日人(일인)들은 法(법)을 어기고 散散四方(산산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韓國人(한국인)과 接觸(접촉)하고 通商去來(통상거래)를 하는 동안에 韓國人(한국인)들과 摩擦(마찰)이 생기고 싸움이 到處(도처)에서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別項(별항)에서 記述(기술)한 바와 같이 安邊(안변)에서 日人(일인) 1名(명)이 돌로 打殺(타살)된 事件(사건)이 發生(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東海岸(동해안)에서 魚物去來(어물거래)를 나갔던 日人(일인) 5名(명)이 燒死(소사)된 事故(사고)도 惹起(야기)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日人(일인)들이 먼저 上陸(상륙)하였던 元山(원산)에서 排日思想과 抗日鬪爭이 다른 어느 地方(지방)보다도 먼저 發生(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 抗爭運動(항쟁운동)이 熾烈(치열)하였음은 當然(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1運動(운동) 以前(이전)부터 8.15 解放(해방)까지 長久(장구)한 歷史(역사)를 통하여 元山人(원산인)들의 排日愛國鬪爭(배일애국투쟁)은 連綿(연면)하였고 따라서 數多(수다)한 愛國志士(애국지사)가 簇出(족출)한것도 可(가)히 짐작키 어렵지 않다.
   이제 이러한 觀點(관점)에서 出發(출발)하여 3.1運動(운동) 以來(이래)의 몇가지 主要(주요)한 抗日鬪爭事件(항일투쟁사건)을 그 槪略(개략)이나마 紹介(소개)하고자 한다.
   3.1運動(운동) 勃發(발발) 以後(이후) 元山(원산)에서의 抗日愛國鬪爭(항일애국투쟁)은 계속하여 全市的(전시적)으로 蜂起(봉기) 되었으나 3.1運動(운동)은 非武裝鬪爭(비무장투쟁)에 不過(불과)하였다.
   그리하여 非武裝鬪爭(비무장투쟁)만으로는 日本人(일본인)을 追放(추방)하고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獨立(독립)을 爭取(쟁취)할 수 없다는 決論(결론)아래 南性祐(남성우), 趙炳喆(조병철), 金秉奎(김병규) 등이 蹶然(궐연)히 일어났다.
   元山(원산)이 낳은 愛國志士(애국지사) 南性祐(남성우)는 字(자)는 公善(공선), 號(호)는 修泉(수천)으로 元山弘道學校敎師(원산홍도학교교사)였다. 그는 일찍부터 뜻을 품고 海外(해외)에 나가서 韓國(한국)의 獨立(독립)을 위하여 鬪爭(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를 中國本土(중국본토) 上海(상해)에 두는데 反對意思(반대의사)를 表(표)하여 왔었다. 그 理由(이유)는 上海(상해)와 같은 遠距離地域(원거리지역)에 政府(정부)를 두면 一但(일단) 有事之秋(유사지추)에 抗日鬪爭(항일투쟁)을 위한 行動(행동)에 敏活(민활)을 期(기)할 수 없다고 斷定(단정)한 까닭이었다. 上海(상해)와 같은 遠距離(원거리)에 大韓臨時政府(대한임시정부)를 두는 것보다는 韓國本土(한국본토)에서 가까운 南滿洲(남만주)에 「臨政(임정)」을 두는 것이 本國(본국)과의 連絡上(연락상) 便宜(편의)할 뿐아니라 國內活動(국내활동)에도 有利(유리)할 것이라고 修泉(수천) 南性祐(남성우)는 主張(주장)하였다.
   이처럼 上海(상해) 臨政(임정)과 意見(의견)을 달리한 修泉(수천)은 當時(당시)의 中國(중국) 革命指導者(혁명지도자) 孫文(손문)과 協議下(협의하)에 韓國獨立運動(한국독립운동)의 一環策(일환책)으로 軍官學校(군관학교)를 北京(북경)에 設立(설립)할 것에 合意(합의)를 보았으며 國內(국내) 各(각) 地方別(지방별)로 陸軍靑年士官(육군청년사관) 精銳分子(정예분자)를 糾合(규합)한 일까지 있었다.
   修泉(수천) 南性祐(남성우)는 國內(국내)에서 武裝鬪爭(무장투쟁)으로 日人(일인)을 殲滅(섬멸)하는 것만이 韓國獨立(한국독립)의 捷徑(첩경)이라고 看破(간파)한 뒤 國內(국내)로 爆彈(폭탄)등 武器(무기)를 秘密裡(비밀리)에 搬入(반입)하기로 決定(결정)하였다. 즉 爆彈(폭탄)으로 日人(일인)이 占據(점거)하고 있는 主要施設(주요시설)과 建物(건물)을 破壞(파괴)하는 同時(동시)에 一方(일방)으로 北京(북경) 軍官學校(군관학교)에서 養成(양성)한 獨立軍(독립군)을 本土內(본토내)로 進擊(진격)시키려고 꾀하였다.
   當時(당시) 北京(북경) 軍官學校(군관학교) 學生募集次(학생모집차) 元山(원산)에 派遣(파견)되어온 代表(대표) 南徹雨(남철우)는 金相翊(김상익) 宅(댁)에 留宿(유숙)하면서 元山出身(원산출신) 靑年(청년)으로 安夢龍(안몽룡), 安敦雨(안돈우), 趙炳夏(조병하),등 3名(명)을 選拔(선발) 派遣(파견)하였다.
   元山(원산)이 낳은 國內抗日(국내항일) 鬪爭(투쟁)의 巨物(거물)인 趙炳喆(조병철)과 金秉奎(김병규)는 武力鬪爭(무력투쟁)으로만 祖國(조국)의 獨立(독립)을 爭取(쟁취)할 수 있다는 計劃(계획)아래 安敦雨(안돈우)를 海蔘威(해삼위)로 密派(밀파)하여 爆彈(폭탄)을 求得(구득) 國內(국내)로 運搬(운반)키로 하였다.
安敦雨(안돈우)는 海蔘威(해삼위)에서 爆彈(폭탄) 3個(개)를 求(구)하여 國內(국내)까지 密入運搬(밀입운반)하는데 3年(년)이라는 긴 歲月(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當時(당시) 日人(일인)들의 눈을 避(피)하여 요강덩이 같은 폭탄을 짊어지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元山(원산)까지 들어왔다.
   3.1運動(운동) 當時(당시)라 警察(경찰)과 憲兵(헌병)의 監視(감시)는 到處(도처)에 森嚴(삼엄)하였으나 無事(무사)히 元山(원산)까지 運搬(운반)에 成功(성공)하여 元山市(원산시) 海岸通(해안통) 張明吉(장명길)의 집 2層(층)에서 安敦雨(안돈우)가 가지고 온 폭탄 3個(개)를 趙炳喆(조병철)에게 드디어 傳達(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金秉五(김병오)는 爆彈(폭탄) 2個(개)를 求得(구득)하여 海蔘威(해삼위)에서 船便(선편)으로 密入運搬途中(밀입운반도중) 淸津港(청진항)에서 逮捕(체포) 投獄(투옥)되었다.
오래 所望(소망)하고 計劃(계획)하였던 폭탄을 入手(입수)한 趙炳喆(조병철)은 同志(동지) 文武術(문무술), 韓興根(한흥근)과 密議(밀의)하고 元山(원산)을 中心(중심)으로 獨立(독립)을 爭取(쟁취)하기 위한 武力蜂起(무력봉기)를 꾀하였다. 그래서 所持(소지)한 폭탄을 于先(우선) 廣石洞(광석동)과 中淸里(중청리) 무지치 山中(산중)에 깊이 埋臧(매장)하여 두었었는데 擧事直前(거사직전)에 警察(경찰)에 發露(발로)되어 哀惜하게도 成功(성공)치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當時(당시) 이 事件(사건)에 대하여 東亞日報(동아일보)에 發表(발표)된 記事(기사)를 다음에 拔萃(발췌)한다.

大正(대정)10年 6月 5日 陰曆(음력) 辛酉(신유) 4月小29日
東亞日報(동아일보) 제2백81호 3면 揭載(게재)
元山爆彈事件(원산폭탄사건)은
趙炳喆(조병철)이 主謀者(주모자)
취조한 결과 사실이 판명
미구에 함흥으로 넘길터 폭발탄으로써 재등총독을 암살코자 하던 강우규(姜宇奎)의 범죄관계 연루자로 그간 한흥근(韓興根)과 안돈우(安敦雨)가 체포되었고 또 돌연히 元山府(원산부)에서 元山里(원산리) 客主組合(객주조합) 理事(이사) 趙炳喆(조병철)이가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보도하건대 원산경찰서에서는 우선 먼저 체포한 안돈우의 자백으로 大正(대정) 8年 8月 하순 중에 한흥근이가 헌 사기요강을 하나 가지고 와서 어디다가 좀 감춰달라고 하므로 안돈우는 그 내용을 보지도 않고 즉시 그날 오후에 廣石洞(광석동) 松林中(송림중)에다 파묻었다 함으로 즉시 경관일대는 5월26일부터 그 송림을 파헤치다 싶이하다가 마침내 28일 정오에 이르러 그 사기요강을 발견하여 그 속을 본즉 과연 폭발탄 4개와 뢰관 4개가 들어 있었다.
  안돈우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전혀 그 속에 무엇이 들은 지를 알지 못한다 하였으나 사기 요강의 몸은 희고 뚜껑은 푸름을 크게 의심하여 즉시 안돈우의 집을 수색한 결과 뚜껑이 없는 푸른 요강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는 말이 거짓말이요 분명히 안돈우의 집에서 뚜껑을 덮은 일이 판명되어 다시 안돈우를 엄밀히 취조한 결과 안돈우는 다시 아래와 같은 사실을 자백하였다.
『사실인즉 그것은 객주조합 리사 조병철에게 감추어 달라고 하는 의뢰를 받아 조병철의 명하는 바와 같이 전기 송림중에 파묻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산경찰서에서는 다시 활동을 개시하여 즉시 조병철을 구인하며 일변으로는 조병철의 집을 수색하였다.
   조병철은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조도전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으로 원산지방에서는 매우 유력한 신사이라 그는 관헌의 신문하는 바에 대하여 어디까지 태연자약히 조리를 맞추어 자기의 범죄사실을 명백히 자백하였다. 조병철은 재작년 조선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항상 한흥근과 함께 뜻을 허하고 매일 상종하며 항상 조선민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하여서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활동을 하기로 굳게 약속한 후 당시에 한창 간도방면에서 독립군이 횡행할새 물론 불원간 조선으로 쳐들어 올 것인즉 그때에는 힘을 다하여 조력하기로 정하였고 그와 동시에 필요한 때에 사용할 목적으로 장사일로 해삼위 방면으로 자주 왕래하는 한흥근이 폭발탄 4개를 사두었다가 자기 집에 두는 것이 위험하다 하여 안돈우로 하여금 전기 송림중에 파묻어 두게함이라 한다. 비록 한흥근, 안돈우, 조병철 3명의 말이 각각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일경은 강우규의 폭발탄사건의 공범자 최자남(崔子南)과 연락을 하여 그 폭발탄으로 재등총독을 암살하고자 하는 강우규에게 주고자 함이었으나 마침내 기회가 틀리어 주지못함 인듯하다는데 안돈우,조병철 2명은 불일간 원산을 거치어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부치겠으며 조병철은 상당한 교양과 인격이 있음으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취급 하리라더라. (원산)

2-5.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의 抗日鬪爭(항일투쟁)

   抗日精神(항일정신)과 獨立精神(독립정신)이 類(유)달리 强(강)하였던 南相沃(남상옥)이 中心(중심)이 되어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와 鬪爭(투쟁)을 벌인 元山(원산)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은 1928年에 일어난 元山(원산)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總罷業(총파업)을 斷行(단행)하기 위하여 緻密(치밀)한 計劃(계획)을 세우고 工作(공작) 끝에 마침내 成功(성공)하였는데 韓國有史 以來(한국유사이래) 처음 일어났고 世上(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罷業(파업)은 勞動者(노동자)의 權益(권익)을 擁護(옹호)하기 위한 鬪爭(투쟁)이었으나 그 眞意(진의)는 日帝(일제)의 苛酷(가혹)한 政策(정책)에 抗拒(항거)하고 民族(민족) 獨立(독립)을 위한 鬪爭(투쟁)이었다고 해도 過言(과언)이 아니다.
 東海(동해)의 要港(요항)이며 當時(당시)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의 要塞地(요새지)로서 日本軍人(일본군인)이 駐屯(주둔)해 있었고 日本(일본)으로 보내는 荷物(하물)이 山積(산적)되어 있는 元山港(원산항)에서 일어난 勞務者(노무자)의 罷業(파업)은 元山人(원산인)의 獨立精神(독립정신)과 抗日鬪爭力(항일투쟁력)을 誇示(과시)한 偉大(위대)한 抗爭(항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元山(원산)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의 總罷業(총파업)은 全國的(전국적)으로 民族的(민족적)인 支援(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海外(해외)의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들로부터도 많은 激勵(격려)를 받았었다.
自由勞組(자유노조)는 海外(해외)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들과 긴밀(緊密)한 連絡(연락)을 取(취)하면서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의 蠻行(만행)을 糾彈(규탄)하는 元山(원산)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들의 果敢(과감)한 抗日鬪爭(항일투쟁)을 海外(해외)에까지 널리 宣傳(선전)하였던 것이다.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 代表(대표) 南相沃(남상옥)은 日本官憲(일본관헌)의 監視(감시)를 避(피)해 가며 海外(해외)에 나가서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들과 接觸(접촉)하여 韓國獨立(한국독립)에 대한 熟意(숙의)를 하였는데 特(특)히 柳林(유림)과 相面(상면)한 후 앞으로 獨立鬪爭(독립투쟁)에 대한 緊密(긴밀)한 計劃(계획)을 세운바 있었다. 그리고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의 抗日鬪爭(항일투쟁)은 海外(해외)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들로부터 높은 評價(평가)와 讚辭(찬사)를 받은 바도 있었다.
   그 뒤 南相沃(남상옥)은 國內(국내)에 潛入(잠입)하여 活動(활동)하다가 日警(일경)에 逮捕(체포) 投獄(투옥)되었다. 當時(당시) 이 事件(사건)은 朝鮮(조선), 東亞(동아)등 日刊新聞(일간신문)에도 發表(발표)되어 世上(세상)을 驚愕(경악)케 하였다.
   南相沃(남상옥)은 出獄後(출옥후) 日本(일본)놈들의 監視(감시)가 계속 甚(심)하였으나 初志(초지)를 貫徹(관철)코자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였다.
   元山(원산)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罷業(파업)에 당황한 日本官憲(일본관헌)은 다시 總罷業(총파업)이 惹起(야기)되지 않도록 그들의 使嗾(사주)에 應(응)할 수 있는 御用團體(어용단체)를 만들고 있음을 알고 自由勞組(자유노조)는 그 沮止(저지)에 積極(적극) 鬪爭(투쟁)하였으며 御用團體(어용단체) 勞動會(노동회)의 粉碎(분쇄)에도 果敢(과감)히 싸웠다.
   이처럼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와 鬪爭(투쟁)한 自由勞組(자유노조)의 멤버는 代表(대표) 南相沃(남상옥)을 비롯하여 趙時元(조시원), 金大寬(김대관), 柳愚錫(유우석) 등이었다.

2-6. 元山保光中學生(원산보광중학생)의 蜂起事件(봉기사건)

   1923年 3月 1日 3.1運動(운동) 第5回 紀念日(기념일)을 맞이하여 元山保光中學校(원산보광중학교)와 春城講習所學生(춘성강습소학생)들이 總蹶起(총궐기)하였다가 日警(일경)에 逮捕(체포)되어 刑(형)까지 받은 事件(사건)이 있었다.
   元山保光中學校(원산보광중학교)는 일찍부터 많은 愛國靑年(애국청년)들을 輩出(배출)한 元山唯一(원산유일)의 男子私立中學校(남자사립중학교)였거니와 3.1運動(운동) 當時(당시)에도 犧牲者(희생자)를 내었고 그뒤 連綿(연면)히 抗日愛國精神(항일애국정신)으로 불타는 傳統(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드디어는 日帝(일제)의 彈壓(탄압)에 못이겨 廢鎖(폐쇄)되고 말았다.
   3.1運動(운동) 第5回 蜂起事件(봉기사건)은 保光中學校(보광중학교) 代表(대표) 劉寬鎬(유관호), 康奎鎭(강규진)과 春城講習所(춘성강습소) 代表(대표) 宋相玉(송상옥)등 3名(명)이 10代(대)의 弱冠(약관)으로 秘密裡(비밀리)에 數朔(수삭)을 두고 計劃(계획) 組織(조직)하여 오던 中 兩學校(양학교)의 中心人物(중심인물) 10餘名(여명)의 同志(동지)를 糾合(규합) 宣言文(선언문)과 비라를 德興印刷所(덕흥인쇄소)에서 印刷(인쇄)한 후 3월1일 10시에 푸라카드를 높이 들고 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하며 街頭(가두)를 行進(행진)하여 集合場所(집합장소)인 廣石洞(광석동) 너레반석으로 가다가 途中(도중)에서 日警(일경)과 衝突(충돌) 逮捕(체포)되었다.
   이 事件(사건)에서 德興印刷所(덕흥인쇄소)에서 비라를 찍었다하여 康基德先生(강기덕선생)이 1年半(년반)의 獄苦(옥고)를 겪었고 主謀者(주모자) 劉寬鎬(유관호)가 3年 執猶(집유) 康奎鎭(강규진), 宋相玉(송상옥)이 各各(각각) 1年半(년반)의 執猶(집유)를 宣告(선고) 받았다.

2-7. 元山少年爆彈事件(원산소년폭탄사건)

   1928年 11月에 發生(발생)한 元山少年爆彈事件(원산소년폭탄사건)은 韓國人(한국인) 彈壓(탄압)에 부심(腐心)하고 있던 日帝(일제)를 크게 驚愕(경악)시켰다.
   元山出身(원산출신) 南壽岳(남수악)(當時(당시) 16歲(세)) 金富璟(김부경)(當時(당시) 17歲(세)) 兩君(양군)이 主動(주동)으로 三防峽溪谷(삼방협계곡)에서 秘密裡(비밀리)에 心血(심혈)을 기우려 硏究(연구)한 끝에 爆彈(폭탄) 2個(개) 製造(제조)에 成功(성공)하였다. 南(남),金(김) 兩君(양군)은 이 爆彈(폭탄) 2個(개)로 當時(당시) 韓民族(한민족)의 怨府(원부)의 代表機關(대표기관)이라고 할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와 東洋拓殖會社(동양척식회사)를 爆破(폭파)할 目的(목적)이었다.
   그리하여 南(남),金(김) 兩君(양군)이 鷄卵(계란)으로 僞裝(위장)한 爆彈(폭탄) 2個(개)를 서울로 運搬(운반)하던 途中(도중) 列車內(열차내)에서 發覺(발각)되어 洗浦驛(세포역)에서 安邊警察署員(안변경찰서원)에 被逮(피체)되었다. 三防峽驛前(삼방협역전)의 日帝(일제) 앞잡이 旅館主人(여관주인)의 密告(밀고)에 依(의)하였다고 傳(전)한다. 兩君(양군)이 安邊署(안변서)에서 取調(취조)를 받던 途中(도중) 爆彈(폭탄) 1個(개)가 爆發(폭발)하여 取調刑事(취조형사)가 負傷(부상)을 當(당)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兩君(양군)은 獄苦(옥고)를 겪었다.

2-8. 元山埠頭(원산부두) 勞動者總罷業事件(노동자총파업사건)

   
元山勞聯(원산노련)의 總罷業(총파업)은 처음 德源郡內(덕원군내)에 있는 文坪(문평)라이씽 石油會社(석유회사)(英國人(영국인)이 經營(경영)하는 會社(회사))는 그 支配人(지배인) 및 幹部(간부)가 日本人(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勞動者(노동자)들의 生計(생계)는 알바없이 自己(자기)들의 營利(영리)에만 눈이 어두워서 勞動者(노동자)들의 悲慘(비참)한 生活(생활)은 表現(표현)하기 어려우며 참다 못한 勞動者(노동자) 2百餘名(백여명)은 1928年 9月 下旬(하순)에 最低勞動(최저노동) 賃金制(임금제)를 確立(확립)하고 解雇(해고)할 때는 退職金(퇴직금)을 支給(지급)하며 負傷者(부상자)의 治療費(치료비)와 死亡者(사망자)의 慰藉料(위자료)를 補償(보상)할 것을 要求條件(요구조건)으로 하고 同盟罷業(동맹파업)을 斷行(단행)하였으므로 이에 놀란 會社側(회사측)의 12月 28日까지 善處(선처)하여 주겠다는 言約(언약)을 받고 卽時(즉시) 罷業(파업)을 中止(중지)하고 就業(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言約(언약)의 期日(기일)이 지나도 會社側(회사측)에서 回答(회답)은 勿論(물론) 善處(선처)할 意思(의사)도 없음으로 元山勞聯(원산노련)에서는 代表(대표)를 派遣(파견)하여 善處(선처)의 回答(회답)에 對(대)한 談判(담판)을 하였으나 會社側(회사측)은 3個月前(개월전)의 約束(약속)은 잊은듯이 冷情(냉정)하므로 원산노련(元山勞聯)에서는 文坪勞組分會(문평노조분회)에 作業時間(작업시간)은 8時間制(시간제)로 할 것, 沐浴場(목욕장)을 設置(설치)하고 職工(직공)에게 無料提供(무료제공) 할 것, 罷業中(파업중)의 賃金(임금)을 全額支給(전액지급)하고 支配人(지배인)은 辭職(사직)할 것 等(등)의 要求條件(요구조건)을 追加(추가)시키어 罷業(파업)할 것을 指令(지령)하여 3百名(백명)의 勞動者(노동자)들은 1929年 1月14日 正午(정오)를 期(기)하여 罷業(파업)할 것을 宣言(선언)하고 이들은 會社側(회사측)의 態度(태도)와 罷業(파업)을 하게된 眞相(진상)을 밝린 數千枚(수천매)의 印刷物(인쇄물)을 市民(시민)과 勞聯(노련) 傘下團體(산하단체) 勞動者(노동자)들에게 配布(배포)하였다.
   한便(편) 國際通運(국제통운)의 勞動者(노동자)들도 다음과 같은 要求條件(요구조건)을 提出(제출)하여 不應時(불응시)에는 罷業(파업)을 斷行(단행)하겠다고 宣言(선언)하였다. 關稅倉庫內(관세창고내)에서의 繰替賃金(조체임금)과 積船賃金(적선임금)을 引上(인상)할 것 貨車位置(화차위치) 變更料金(변경요금)을 支拂(지불)할 것, 勞動者(노동자)가 負擔(부담)하던 船積危險品(선적위험품)의 破損金(파손금)을 會社側(회사측)에서 負擔(부담)할 것 等(등)을 條件(조건)으로 期限附(기한부)의 回答(회답)을 要求(요구)하고 文坪(문평)라이씽會社(회사)로 가는 貨物(화물)은 一切(일체) 取扱(취급)치 않겠다고 會社(회사)에 宣言(선언)하였더니 文坪石油會社(문평석유회사)와 國際通運會社(국제통운회사)에서 450餘名(여명)의 勞動者(노동자)를 解雇(해고)하고 中國人(중국인)을 募集(모집)하여 採用(채용)하고 强硬(강경)하게 나온 것이 動機(동기)가 되어 元山勞聯(원산노련) 各(각) 傘下團體(산하단체)에 加入(가입)한 1,800餘名(여명)의 勞動者(노동자)들은 連續的(연속적)으로 罷業(파업)을 斷行(단행)하였다.
   1928年 12月에 元山勞聯(원산노련) 代表(대표)가 文坪石油會社(문평석유회사)에 談判(담판)하러 갔을 때 同會社(동회사)에서는 個人(개인)을 相對(상대)할 것이고 勞聯(노련)과의 相對(상대)는 絶對(절대) 아니하겠다고 하므로 이 제네스트는 元山勞動運動(원산노동운동)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첫 試驗(시험)의 鬪爭目標(투쟁목표)인 團體交涉權(단체교섭권)의 獲得(획득)이었기 때문에 그 歸結(귀결)은 全國(전국)의 耳目(이목)이 集中(집중)되었으며 한便(편) 元山勞聯(원산노련)에서 持久戰(지구전)으로 突入(돌입)할 것을 宣言(선언)하고 罷業資金(파업자금)의 唯一(유일)한 資源(자원)인 消費組合(소비조합)의 3萬圓(만원)의 貯金(저금)과 收入金(수입금)을 團束(단속)하였던 것이다.
   元山(원산) 商業會議所(상업회의소)에서는 他地方(타지방)과 元山市(원산시)의 勞動者(노동자) 그리고 消防隊(소방대), 國粹會(국수회), 靑年會員(청년회원 等(등)을 募集(모집)하고 對抗(대항)하였으나 勞聯側(노련측)에서 糾察隊(규찰대)를 組織(조직)하고 對抗(대항)하는 勞動者(노동자)를 威脅示威(위협시위)하는 한便(편) 罷業者(파업자)들을 結束(결속)하고 食糧(식량)을 購入(구입)하였으며 市民(시민)의 日常生活(일상생활)에 直接(직접) 影響(영향)이 미치는 印刷(인쇄), 製油(제유), 車輛(차량), 洋服(양복), 洋靴組合(양화조합)의 勞動者(노동자)들에게 就業(취업)을 命(명)하여 秩序整然(질서정연)하게 進行(진행)하였음으로 元山市民(원산시민)은 勿論(물론) 全民族(전민족)의 同情(동정)이 總集中(총집중)하였으며 罷業基金(파업기금)은 苦學生(고학생)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보내었고 各(각) 社會團體(사회단체)는 禁酒(금주) 또는 다른 方法(방법)으로 募金(모금)하여 보냈고 檄文(격문), 檄電(격전)으로 慰問(위문)하고 지원하였다.
   이와 反對(반대)로 咸南警察(함남경찰)은 數百名(수백명)의 많은 署員(서원)을 出動(출동)시켜 警戒(경계)하는 한便(편) 御用勞動會(어용노동회)를 組織(조직)하고 罷業(파업)을 破壞(파괴)시키고저 主謀者(주모자)로 自由勞組(자유노조) 幹部(간부) 및 勞聯(노련) 幹部(간부)를 2月에 檢擧(검거)하였다.
   元山勞聯(원산노련)에서는 當時(당시) 京城(경성) 辯護士(변호사) 金泰榮(김태영)을 委員長(위원장) 代理(대리)로 推戴(추대)하고 勇敢(용감)하게 鬪爭(투쟁)을 繼續(계속)하였음으로 商業會議所(상업회의소) 元山荷主(원산하주)들과 商業家(상업가)들의 破産者(파산자)가 續出(속출)하였고 文坪石油會社(문평석유회사)에서도 製罐工場(제관공장)이 閉鎖(폐쇄)되어 日本神戶(일본신호)에서 注文(주문)하여 使用(사용)하였으며 元山埠頭(원산부두)에는 貨物(화물)이 山積(산적)되었고 貿易船(무역선)은 連日(연일) 虛航(허항)을 하였다.
   3月 21日 4個所(개소)의 荷主(하주)들은 마침내 要求條件(요구조건)에 服從(복종)하므로 勞聯(노련)에서는 240餘名(여명)을 派遣(파견)하였으니 勝利(승리)의 曙光(서광)은 비친 듯 하였다. 이때 咸南勞動會(함남노동회)의 反動(반동)이 繼續(계속) 커서 罷業者(파업자)들은 4月 1日에 同會館(동회관)을 襲擊(습격)하여 10餘名(여명)의 負傷者(부상자)를 내는 暴動(폭동)까지 發展(발전)하였으나 罷業資金(파업자금)은 떨어지고 萬餘(만여) 人口(인구)의 生活問題(생활문제)는 急迫(급박)하였으며 各處(각처)에서의 精神的(정신적) 物質的(물질적) 援助(원조)는 至極(지극)하였고 日本人(일본인) 勞動者(노동자)들의 聲援(성원)도 大端(대단)히 컷으나 警察(경찰)은 이 제네스트를 外部(외부)와의 連絡(연락)를 遮斷(차단)시키기 爲(위)하여 慰文檄電(위문격전) 罷業資金(파업자금)을 보낸 사람을 모조리 檢擧(검거)하였기 때문에 財政的(재정적)으로 孤立無援(고립무원)이 되었다.
   이에 더 持續(지속)할 수가 없었으므로 4月6日 勞聯幹部(노련간부)들은 悲愴(비창) 한 決議(결의) 밑에 自由復業(자유복업)할 것을 指令(지령)함으로서 끝마쳤으나 이 擧事(거사)는 82日間(일간)이나 굳세게 惡戰苦鬪(악전고투)하던 勞動運動史上(노동운동사상) 最大(최대)의 제네스트로 우리나라 勞動鬪爭(노동투쟁)이 널리 世界(세계)의 耳目(이목)을 끌어온 大事件(대사건)이다.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들의 團結誇示(단결과시)
   1929年 1月 初旬(초순) 라이씽石油會社(석유회사) 元山支店(원산지점)과 元山通運會社(원산통운회사)가 雇用(고용)하는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와의 사이에 賃金(임금) 引上問題(인상문제)로 紛爭(분쟁)이 벌어져 朝鮮人(조선인) 勞動者(노동자)들이 라이씽石油會社(석유회사)의 荷物(하물)을 取扱(취급)하지 아니 하겠다 하니 元山通運會社(원산통운회사)支店長(지점장)이 그 是非(시비)를 가로 맡아 "라이씽石油會社(석유회사)의 荷物(하물)을 취급하지 아니 하겠다면 다른 일도 그만 두라"하고 그들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150名(명)을 一時(일시)에 解雇(해고)하고 그 對策(대책)으로써 中國人(중국인) 勞動者(노동자)들을 募集(모집)하기 시작하니 元山勞動組合(원산노동조합)이 中國(중국)領事館(영사관)에 道義的(도의적)인 警告(경고)를 發(발)하였으므로 (1月20日字(일자) 東亞日報記事(동아일보기사)) 中國人(중국인)들이 應募(응모)하지 아니하였다.
   日本人(일본인) 資本家(자본가)들의 이러한 措置(조치)에 憤慨(분개)한 朝鮮人(조선인)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數千名(수천명)이 同情罷業(동정파업)을 斷行(단행)하니 때마침 舊年末(구년말)이라 元山埠頭(원산부두)에 貨物(화물)이 山積(산적)해 있고 거기에 겹쳐들어 輻輳(폭주)하는 荷物(하물)들이 處理(처리)되지 못하여 元山港(원산항)의 經濟(경제)는 一大(일대) 混亂(혼란)에 빠지고 歲末(세말)의 商街(상가)는 閉門(폐문)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因(인)하여 倒産者(도산자) 夜間(야간) 逃走者(도주자)等(등)이 續出(속출)하였다. (同年(동년) 2月27日字 東亞日報記事(동아일보기사))
   當時(당시) 自由勞組(자유노조) 代表者(대표자)인 南相沃(남상옥)과 金大寬(김대관) 그리고 勞聯幹部(노련간부) 金瓊植(김경식), 金大郁(김대욱)등이 歷史的(역사적)인 罷業(파업)을 指揮(지휘)하였다.
 日本人(일본인)들이 主宰(주재)하는 元山(원산) 商業會議所(상업회의소)는 積極(적극) 朝鮮人(조선인)勞動者(노동자)들을 彈壓(탄압)하고 日本人(일본인) 資本家(자본가)들을 擁護(옹호)하여 2千名(천명)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에 대하여 復業指令(복업지령)을 發(발)하고 그 書記長(서기장) 日本人(일본인)을 仁川(인천)에 急派(급파) 200名(명) 朝鮮人(조선인)勞動者(노동자)를 募集(모집)하여 元山埠頭(원산부두)에 就役(취역)시키되 夜間(야간)은 內務局(내무국) 元山(원산) 土木出張所(토목출장소) 倉庫(창고) 속에 監禁(감금)하고 낮이면 채찍으로서 酷使(혹사)하는 等(등) 苛酷(가혹)한 取扱(취급)을 하였다. 그러던 中(중)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는 1月 29日 元山勞動組合(원산노동조합)의 帳簿(장부)를 押收(압수)하고 그 執行委員長(집행위원장) 尹斗燮(윤두섭)을 檢擧(검거)하는 等(등) 彈壓的(탄압적)인 態度(태도)를 取(취)하였다.   元山埠頭(원산부두)勞動爭議(노동쟁의)가 일어나자 東京(동경)에 크게 反映(반영)되어 日本國(일 본국)의 極右翼(극우익)인 國碎會(국쇄회)는 林田彌太郞(임전미태랑) 等(등) 多數(다수)의 幹部(간부)들을 元山(원산)에 派遣(파견)하여 日本(일본) 資本家(자본가)들을 擁護(옹호) 應援(응원)하고 極左翼(극좌익)인 日本(일본) 勞動黨(노동당)은 元山勞動爭議(원산노동쟁의) 應援團(응원단)을 組織(조직)하여 朝鮮勞動(조선노동) 總聯盟(총연맹)과 連絡(연락)하여 크게 活動(활동)하였다. (1929年 2月 16日字 東亞日報記事(동아일보기사))
   新幹會(신간회) 京城本部(경성본부)는 200名(명) 勞動者(노동자)의 倉庫(창고) 內(내) 夜間(야간) 監禁(감금)과 그 酷使(혹사)는 人道問題(인도문제)라 하여 辯護士(변호사) 李仁(이인)을 元山(원산)에 派遣(파견)하여 對策(대책)을 講究(강구)하고 同會(동회) 元山支會長(원산지회장) 李可順(이가순)은 元山警察署長(원산경찰서장)과 元山府尹(원산부윤)을 訪問(방문)하여 日本人(일본인)들의 不法(불법)을 詰問(힐문)하는 等(등) 活動(활동)을 開始(개시)하였다.
   元山罷業團(원산파업단)을 應援(응원)하기 爲(위)하여 全國各地(전국각지)에서 無産者(무산자)들의 活動(활동)이 널리 開始(개시)되었으니 즉 咸鏡南道(함경남도) 社會團體(사회단체) 聯合會(연합회)를 비롯하여 統營(통영), 水原(수원), 新昌(신창), 安州(안주), 洪原(홍원), 淸州(청주), 安東(안동), 其他(기타) 各地(각지)로부터 多量(다량)의 食糧(식량)이 到着(도착)되고 或(혹)은 多額(다액)의 現金(현금)이 遝至(답지)하며 또한 衣料品(의료품)이 來着(내착)하는 等(등) 많은 物品(물품)이 殺到(쇄도)하였는데 2月 13日엔 糧米(양미) 300가마가 一時(일시)에 到着(도착)하니 意氣揚揚(의기양양)한 勞動者(노동자) 500餘名(여명)이 市街行列(시가행렬)을 敢行(감행)하여 元山警察署員(원산경찰서원)들을 크게 唐慌(당황)하게 하였다. (14日字(일자) 記事(기사))
   또한 咸鏡南道(함경남도) 社會團體聯合會(사회단체연합회)와 勞動組合聯合會(노동조합연합회)가 元山勞組(원산노조)의 罷業團(파업단)을 應援(응원)하기 爲(위)하여 會員(회원)들의 禁酒(금주) 斷煙(단연)으로써 募金(모금)할 것을 決議(결의)하니 그 實行(실행) 1個月內(개월내)에 違約(위약)하는 者(자)가 1人(인)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禁酒(금주)와 斷煙(단연)으로써 節約(절약)한 金品(금품) 2000圓(원)을 元山勞組(원산노조)에 寄贈(기증)하였으며 또한 이들은 罷業團(파업단)과 그 家族(가족)들을 위하여 半年間(반년간)의 食糧(식량)을 確保(확보)함에 必要(필요)한 運動(운동)을 開始(개시)하였다.(1月20日 2月23日 2月27日字)
   埠頭勞動罷業者(부두노동파업자)들이 갈 곳이 없어 埠頭(부두)의 空地(공지)에 簡單(간단)한 施設(시설)을 加(가)하여 合宿(합숙)하고 있으니 元山(원산) 라이씽會社(회사)支店(지점)이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와 合勢(합세)하여 22日 그 宿所(숙소)를 破壞(파괴) 逐出(축출)하고 또한 各地(각지)에서 閑散人夫(한산인부)들을 募集(모집)하려 하였으나 各地(각지)勞動組合(노동조합)의 活動(활동)에 의하여 失敗(실패)하고 窮(궁)한 나머지 元山埠頭(원산부두) 勞動者(노동자)들을 戶別訪問(호별방문)하여 出勤(출근)을 懇請(간청)하였으나 그들은 自身(자신)들의 要求條件(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아니하면 就業(취업)하지 못하겠다 하였다.(2月9日字)
   드디어 日本人(일본인)들은 彈壓(탄압)을 再開(재개)하여 深夜(심야)에 勞動者(노동자) 多數(다수)를 連行(연행)함과 同時(동시)에 自由勞組(자유노조)와 勞聯(노련)의 幹部(간부)들을 收監(수감)하고 이어 咸興檢事가 來元(래원)하여 徹夜(철야) 密議(밀의)한 後(후) 活動中(활동중)인 辯護士(변호사) 李仁(이인)과 그 書記(서기) 趙仁鎬(조인호)를 憲兵隊(헌병대)에 收監(수감)하고 또한 罷業勞動者(파업노동자) 2000餘名(여명)의 家屋(가옥)을 일일이 訪問(방문)하여 크게 威脅(위협)하는 한便(편) 德源郡守(덕원군수) 鄭璞(정박)과 元山每日新聞社長(원산매일신문사장) 西田(서전)이 兩側(양측)을 代表(대표)하여 中間調停(중간조정)을 試圖(시도)하였으나 日本人(일본인)企業主(기업주)들의 一步不讓(일보불양)으로 因(인)하여 決裂(결렬)되었다.(1月10日 16日字(일자))
   그 後(후) 日警(일경)의 元山埠頭勞動者(원산부두노동자)들에 대한 彈壓(탄압)은 極甚(극심)해졌고 日本人(일본인) 企業主(기업주)들의 朝鮮人(조선인) 勞動者(노동자)들의 酷使(혹사)는 殘虐(잔학)을 極(극)하였으니 그러한 消息(소식)을 그後(후) 東亞日報(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報道(보도)하였다.
元山埠頭勞動者(원산부두노동자) 또 罷業(파업)····· 元山內(원산내) 通運會社(통운회사) 常用人夫(상용인부)들은 同盟罷業(동맹파업)前(전)까지는 一日賃金(일일임금) 2圓(원)50錢(전)~3圓(원)50錢(전)씩 받았던 것을 同盟罷業(동맹파업)以後(이후)는 一日(일일) 1圓(원)씩을 주고 出動待期人夫(출동대기인부)에게는 1日 30錢(전)을 支拂(지불)해 주므로 人夫(인부) 150名(명)이 2月1日부터 또다시 同盟罷業(동맹파업)에 들어갔다.) (1929年 2月21日字)

2-9. 元山(원산)의 光州學生事件(광주학생사건)

   1929年 11月3日 全南(전남) 光州(광주)에서 爆發(폭발)한 抗日學生事件(항일학생사건)이 全國的(전국적)으로 波及(파급)되어 그 거센 물결이 惹起(야기)됨에 따라서 反日精神(반일정신)이 유달리 强(강)하였던 元山(원산)에서도 學生運動(학생운동)이 强烈(강렬)하게 怒氣(노기)띤 獅子(사자)와 같이 蹶起(궐기)하였다.
   元山樓氏女高(원산루씨여고), 元山保光學校(원산보광학교), 元山商業學校(원산상업학교), 元山靑年學館(원산청년학관)을 비롯하여 初等學校學生(초등학교학생)들까지도 맨주먹으로 奮然(분연)히 일어나서 傳單(전단)을 뿌리고 抗日口號(항일구호)를 외치면서 市街(시가)로 몰려나와 示威行進(시위행진)을 하였다.
   男女學生(남녀학생) 區別(구별)없이 抗日口號(항일구호)를 天地(천지)가 振動(진동)하리만큼 勇敢(용감)하게 부르짖는 愛國學生(애국학생)들을 殘忍(잔인)한 日人警察(일인경찰)은 無慈悲(무자비)하게 數百名(수백명)을 拘束(구속)하고 拷問(고문)하여 많은 犧牲者(희생자)를 내었다.
   各學校(각학교) 學生(학생)들은 朝會時間(조회시간)에 日帝(일제)의 植民地政策(식민지정책)인 奴隸敎育(노예교육)과 韓國學生(한국학생)을 無差別(무차별) 彈壓(탄압)虐殺(학살)하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蠻行(만행)을 糾彈(규탄) 聲討(성토)하고 各(각) 學校(학교)마다 數百名(수백명)씩 거리로 뛰어 나와서 合流(합류)되어 人道主義(인도주의)에 立脚(입각)한 正當(정당)한 要求(요구)를 貫鐵(관철)키 爲(위)한 피어린 檄文(격문)을 뿌리고 人間同等(인간동등)의 口號(구호)를 高唱(고창)하면서 上洞(상동)에서 場村洞(장촌동)까지 秩序整然(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내려왔다가 舊路(구로)로 되돌아 올라가서 驛前(역전)에 到着(도착)하였을 때 이 危急(위급)한 情報(정보)를 接(접)한 日人警察(일인경찰)은 完全武裝(완전무장)을 갖추어 미리 待機(대기)하고 있다가 示威하는 學生(학생) 群衆(군중)들과 衝突(충돌)하여 學生(학생)들을 肉迫(육박)하면서 逮捕(체포)하기에 血眼(혈안)이 되었으나 씩씩한 學生(학생)들은 日警(일경)의 銃劍(총검)에 조금도 屈(굴)함이 없이 한층 더 奮發(분발)하여 投石(투석)으로 對抗(대항)하였다. 아무리 勇敢(용감)하고 비록 抗日精神(항일정신)에 透徹(투철)한 學生(학생)들 이었으나 强弱(강약)이 不同(부동)으로 示威行進(시위행진)은 挫折(좌절)되고 暴惡(포악)한 日帝(일제)의 魔手(마수)에 억울하게 數百名(수백명)이 檢擧(검거)되었다.

2-10. 元山商業(원산상업) 學生(학생)의 抗日鬪爭(항일투쟁) 事件(사건)

   1942年 3月 第(제)14回(회) 卒業生(졸업생)들에 依(의)한 世稱(세칭)「鯨(경)(구지라)」事件(사건)은 歷史(역사)에 記錄(기록)될 우리 젊은 學徒(학도)들의 抗日鬪爭史(항일투쟁사)의 한페지를 裝飾(장식)하고 있다.
   當時(당시) 所謂(소위) 『內鮮共學(내선공학)』에 依(의)해 韓國人學生(한국인학생) 約(약)30名(명)과 日本人(일본인) 學生(학생) 約(약) 20名(명)으로 한 學級(학급)을 編成(편성)하고 있었는데 當時(당시) 日本人校長(일본인교장) 山本正誠(산본정성)은 매우 狡猾(교활)한 者(자)로서 惡辣(악랄)하기 그지없는 民族差別敎育制度(민족차별교육제도)에 韓人學生(한인학생)들은 참을 수 없는 義憤(의분)을 품고 事事件件(사사건건) 對立(대립) 抗拒(항거)하였다.
   日本人(일본인) 學生(학생)들과의 對立鬪爭(대립투쟁)은 처음에는 暗鬪(암투)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露骨化(노골화)하여 例(예)를 들면 그때 所謂(소위) 大東亞戰爭(대동아전쟁)이 勃發(발발)하여 日本(일본)이 赫赫(혁혁)한 勝戰(승전)을 謳歌(구가)하면서 多彩(다채)로운 行事(행사) 特(특)히 夜間(야간)에 進行(진행)되는 燈(등)불行列(행렬) 等(등) 一切(일체)의 行事(행사)에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들은 參席(참석)치 아니함으로 停退學(정퇴학)을 當(당)하는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이 非一非再(비일비재)하였다.
   1942年 3月 卒業期(졸업기)를 앞두고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 韓泰運(한태운)(當時(당시) 五學年班長(오학년반장))을 先頭(선두)로 하여 韓武鎬(한무호), 趙君實(조군실) 等(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日本人(일본인) 學生(학생)과 完全對立(완전대립) 分離(분리)하여 于先(우선) 卒業紀念(졸업기념) 앨범을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들만이 別途(별도)로 作成(작성)하기로 秘密裡(비밀리)에 決議(결의)한 후 그 앨범 名稱(명칭)을 『鯨(경)(구지라)』이라 하였다.
   그 由來(유래)는 우리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들끼리 그리워하는 祖國(조국)『高麗(고려)』를 『고래(鯨(경))』즉 日語(일어)의 『구지라』로 불러서 祖國(조국)에 대한 그들의 노스탈쟈를 은근하게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3月中(월중)에만 韓人學生(한인학생)들에 依(의)한 앨범鯨(경)을 完成(완성)하여 3月末(월말)에 있을 卒業式(졸업식)에는 學校(학교)에서 行(행)하는 式(식)을 보이콧트하고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들끼리 別途(별도)로 卒業式(졸업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獨立萬歲(독립만세)를 크게 부르짖을 計劃(계획)을 세우고 着着進行中(착착진행중)에 있던 中(중) 卒業式(졸업식) 數日(수일)을 앞두고 이 內容(내용)이 發覺(발각)되었던 것이다.
   學校當局(학교당국)은 이에 唐慌(당황)하여 이 事實(사실)이 社會(사회)에 發露(발로)될까 두려워서 關聯(관련) 學生(학생)들을 撫摩(무마)하는 同時(동시)에 부랴부랴 卒業式(졸업식)을 올렸다. 그러나 大部分(대부분)의 韓國人(한국인) 學生(학생)들은 이 卒業式(졸업식)에 出席(출석)치 아니하였으며 出席(출석)한 學生(학생)들도 日本國歌(일본국가) 『기미가요』와 『우미유까바』를 合唱(합창)할 때는 우리말로 된 『抗日歌(항일가)』를 불렀다.
   卒業(졸업) 後(후) 學生(학생)들은 各各(각각) 職場(직장)을 찾아서 헤어졌으나 몇몇 뜻 있는 學生(학생)들은 계속 連絡(연락)을 取(취)하여 날로 强(강)해지는 抗日(항일) 感情(감정)을 달래가면서 다음과 같은 具體的(구체적)인 組織(조직)과 活動(활동)으로 發展(발전)시켰다.

抗日(항일) 秘密團體(비밀단체) 組織事件(조직사건)

   1942年 10月 ~ 1943年 12月
① 前記(전기) 學生(학생) 中(중) 韓泰運(한태운)은 卒業後(졸업후) 抗日思想(항일
사상)이 한층 濃厚(농후)해져서 張瑞振(장서진), 李在泌(이재필) 등과 合作(합작)
하여 秘密團體(비밀단체)를 組織(조직)하였으나 日本警察(일본경찰)에 發覺(발각)
되어 韓泰運(한태운)은 갖은 拷問(고문) 끝에 1943年(년) 9月(월) 咸興(함흥) 刑務
所(형무소)에서 獄死(옥사)했고 張瑞振(장서진)은 2年(년)의 實刑(실형)을 服役(복
역)하였다.
② 前記(전기) 『鯨(경)』事件(사건) 主動者(주동자) 中(중) 韓武錫(한무석)이 中心
(중심)이 되어 趙君實(조군실), 朴榮瑞(박영서) 等(등)은 別途(별도)로 抗日鬪爭(항일투쟁)을 計劃(계획) 進行(진행) 中(중) 발각되어 1942年(년) 10月(월)에 韓(한), 趙(조), 朴(박) 3人(인)이 一時(일시)에 被逮(피체)되어 江原道(강원도) 襄陽(양양) 警察署(경찰서)에 拘禁(구금) 翌年(익년) 4月(월)까지 近(근) 6個月間(개월간) 갖은 拷問(고문)과 惡刑(악형) 끝에 趙君實(조군실)은 頻死狀態(빈사상태)로 病保釋(병보석)되었고 韓(한), 朴(박), 兩人(양인)은 咸興刑務所(함흥형무소)에 送致(송치)되어 1年半(년반)의 實刑(실형)을 服役(복역)하였다.
   [附記(부기)] 1945年(년) 8月(월)에 解放(해방)이 되자 獄死(옥사)한 韓泰運(한태운)外(외)의 前記(전기) 學生(학생)들은 再會(재회)하여 元山文化聯盟(원산문화연맹) 傘下(산하)에서 한데 뭉쳐 祖國(조국)의 光復(광복) 獨立建設(독립건설)에 힘써 오던 中(중) 所謂(소위) 反託運動(반탁운동)을 前後(전후)하여 趙君實(조군실)을 除外(제외)한 韓武錫(한무석), 朴榮瑞(박영서) 等(등)은 赤色分子(적색분자)가 되어 赤狗(적구)로 北韓(북한)에 남아 있게 되었으며 趙君實(조군실)만은 그들과 뜻을 달리하여 單身(단신) 南下(남하)하여 大韓民國(대한민국)의 폼속에 들었다.

2-11. 千餘(천여) 群衆(군중)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 襲擊(습격)

   民國(민국) 2年(년)(1920年(년)) 7月(월)18日(일) 午前(오전) 8時頃(시경) 南村洞(남촌동) 派出所(파출소) 앞에서 우리 韓國人對(한국인대) 日本人間(일본인간)에 대패밥 모자 한 개 값으로 승강이가 벌어졌다.
이 사소한 韓人對(한인대) 日人間(일인간)의 승강이는 마침내 큰 싸움을 벌어지게끔 만들었고 이어서 官民(관민)의 큰 衝突(충돌)까지 惹起(야기)시키고 말았다.
   싸움의 原因(원인)은 남촌동에 居住(거주)하는 崔昌郁(최창욱)(勞動者(노동자))이 그 이웃에서 장사하는 南瀨(남뢰)라는 日女(일녀)에게 그 전전날인 16日(일) 대패밥 모자 한 개를 外上(외상)으로 해서 썼던바 이튿날 崔昌郁(최창욱)이가 밖에 나가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中(중) 日女(일녀) 南瀨(남뢰)에게 帽子(모자)값의 督促(독촉)과 아울러 입에 담지 못할 갖은 辱說(욕설)을 받았으나 빚진 것이 罪人(죄인)이란 생각으로 다음날 모자 代金(대금)을 支拂(지불)할 것을 約束(약속)하고 奮(분)을 참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輪尼(윤니)라는 日人(일인)이 崔昌郁(최창욱)의 뒤를 좇아가서 無條件(무조건) 무수히 구타를 하여 流血(유혈)이 낭자하였다.
   日人(일인)에게 目不忍見(목불인견)할 程度(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있는 現場(현장)을 目擊(목격)한 日人(일인) 巡査(순사)는 韓人(한인)을 구타하는 日人(일인) 輪尼(윤니)는 그냥두고 피가 흐르는 崔昌郁(최창욱)을 끌고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로 갔었다. 억울하게 얻어 맞고 巡査(순사)에게 끌려간 崔昌郁(최창욱)은 派出所(파출소)에서 韓人(한인) 巡査(순사)와 日人(일인) 巡査(순사)에게 더욱 구타를 당하였다.
   이 暴惡無道(포악무도)한 巡査(순사)놈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는 派出所(파출소)앞의 구경꾼들은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巡査(순사)놈들의 野蠻性(야만성)을 꾸짖고 奮痛(분통)을 참지 못하여 이를 갈고 대들었었는데 그 中(중)에서 激憤(격분)한 靑年(청년) 2名(명)이 派出所(파출소)로 달려 들어가 巡査(순사)놈들의 不法性(불법성)을 抗議(항의)하였다.
   正當(정당)을 主張(주장)하고 崔昌郁(최창욱)의 억울함을 말하는 靑年(청년) 2名(명)을 巡査(순사)놈들은 도리어 그 靑年(청년)들을 때리며 갖은 辱說(욕설)을 퍼부었다.
   靑年(청년)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도 계속해서 巡査(순사)놈들은 發惡(발악)하고 있었는데 밖에 모인 近(근)千名(천명)의 群衆(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야, 우리 韓國(한국)사람은 죽는구나』하고 恨嘆(한탄)하고 哀痛(애통)한 소리를 지르자 群衆(군중)들은 無意識中(무의식중)에 길가의 돌을 주워서 派出所(파출소)에 던지기 시작하였다.
   派出所(파출소)의 유리는 散散(산산) 조각이 나고 殘忍無道(잔인무도)한 巡査(순사)놈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때마침 日人(일인) 巡査部長(순사부장)이 派出所(파출소)로 당도하였다. 이에 群衆(군중)을 代表(대표)한 靑年(청년) 2名(명)이 巡査部長(순사부장)에게 前記事由(전기사유)를 說明(설명)하여 公正(공정)한 處分(처분)을 바랐으나 日人(일인) 部長(부장)은 無一言(무일언) 被害者(피해자) 崔昌郁(최창욱)과 加害者(가해자) 日人(일인) 輪尼(윤니)를 함께 本警察署(본경찰서)로 連行(연행)코자 함으로 興奮(흥분)에 넘친 群衆(군중)들은 喊聲(함성)을 지르며 日人部長(일인부장)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日人部長(일인부장)은 中路(중로)에서 崔昌郁(최창욱)을 돌려보내는 反面(반면)에 群衆(군중)의 最先頭(최선두)에서 正當(정당)한 喊聲(함성)을 외치며 日人部長(일인부장)놈을 탄핵하던 靑年(청년) 2名(명)을 派出所(파출소)로 끌고 들어가 捕縛(포박)을 하였다. 뒤 따르던 群衆(군중)들은 靑年(청년)들의 不法捕縛(불법포박)에 激憤(격분)하여 누구의 指揮(지휘)도 없이 派出所(파출소)로 怒濤(노도)와 같이 몰려 들어가 冊床(책상)이니 椅子(의자)니 유리니 할 것 없이 무엇이던 손발에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밟아 동댕이쳤다. 이 瞬間的(순간적)인 民族的(민족적) 感情(감정)을 爆發(폭발)시킨 것은 元山人(원산인)의 正義心(정의심)과 抗日精神(항일정신)의 發露(발로)로 보겠으며 韓人對(한인대) 日人間(일인간)의 官民衝突事件(관민충돌사건)은 民族的(민족적) 團結(단결)을 誇示(과시)한 鬪爭(투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日本(일본) 巡査(순사)놈들이 휘두르는 칼 앞에서도 民族的(민족적) 굳센 意志(의지)를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抗議(항의)하는 群衆(군중)들의 怒氣(노기)에 巡査(순사)놈들은 恐怖(공포)에 떨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奸惡(간악)한 日本巡査(일본순사)놈들은 本署(본서)에 應援(응원)을 請(청)하게 되어 群衆(군중)들의 解散(해산)과 그들을 회유하기에 血眼(혈안)이 되었다. 同族愛(동족애)를 發揮(발휘)하는 群衆(군중)들은 派出所(파출소) 안에 監禁(감금)된 靑年(청년)들을 석방시키는데 强力(강력)한 抗議(항의)를 하여 밤11時頃(시경) 無事(무사)히 救出(구출)하고 解散(해산)하였다.

2-12. 市場(시장)을 流血化(유혈화)했던 韓人對(한인대) 日人(일인)의 衝突事件(충돌사건)

   1944年(년) 3月(월) 26日(일) 夕陽(석양)에 해안통에 있는 韓國人(한국인) 市場(시장)에서 狂的(광적)으로 發惡(발악)하는 日本人(일본인) 船員(선원)들과 그들의 尤甚(우심)한 行悖(행패)와 非人道的(비인도적)인 行爲(행위)를 制止(제지)하는 韓國人(한국인)들과의 사이에 크게 싸움이 벌어져 雙方間(쌍방간)에 중상자를 여러명 내어 市場(시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當時(당시) 日本(일본) 軍國主義(군국주의)는 世界征服(세계정복)의 野望(야망)을 꿈꾸고 及其也(급기야)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을 爆發(폭발)시켜 그 戰爭(전쟁)이 絶頂(절정)에 達(달)하고 있었을 때 殘忍無道(잔인무도)한 日本(일본) 軍國主義(군국주의)는 우리 韓國人(한국인)을 더욱 抑壓(억압)하고 所謂(소위) 徵兵(징병), 徵用(징용)이라 하여 强制(강제)로 戰場(전장)에 끌어가고 모든 物資(물자)는 統制(통제)하고 마침내는 食糧(식량)의 自由販賣(자유판매)까지 禁(금)하였고 配給(배급)이란 制度(제도)를 實施(실시)하여 食糧去來(식량거래)의 團束(단속)을 强化(강화)하여 韓國人(한국인)들을 飢餓線上(기아선상)에서 헤매게 하였다.
   人類(인류)의 自由(자유)와 平和(평화)를 짓밟는 日本(일본) 帝國主義(제국주의)의 壓迫(압박) 밑에서 갖은 迫害(박해)를 받으며 市場(시장)의 路上(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을 日人(일인) 船員(선원)들은 自己(자기)들이 要求(요구)하는 不當(부당)한 價格(가격)으로 物品(물품)을 팔지 않는다 해서 惡質(악질) 暗商人(암상인)으로 몰고는 集團(집단)으로 暴行(폭행)을 加(가)하고 있었다.
   억울하게도 日人(일인) 船員(선원)들의 作黨(작당)에게 얻어 맞은 그 商人(상인)의 얼굴에서는 피가 마구 흐르는 데도 不拘(불구)하고 그 船員(선원) 中(중) 한놈은 칼을 꺼내서 聖戰(성전)의 勇士(용사)인 우리 日本人(일본인)을 不敬(불경)하는 韓國人(한국인)인 이런놈은 죽어야 한다고 殺氣(살기)에 차서 韓國商人(한국상인)의 배를 찌르려고 다가서고 있었다.
   周圍(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船員(선원)들의 野蠻行爲(야만행위)에 激憤(격분)을 禁(금)치 못하여 恐怖(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申明哲(신명철)이 義憤(의분)에 넘쳐 재빠르고 날쌔게 뛰어 들어가 칼을 든 日本船員(일본선원)의 손을 電光石火(전광석화)와 같이 비틀어 칼을 뺏은 다음 마구 치는데 船員(선원)놈들 作黨(작당)은 申明哲(신명철)에게 달려들어서 때리기 시작하였다.
抗日(항일)정신과 同胞愛(동포애)가 强(강)하였고 義俠心(의협심)이 강한 申明哲(신명철)이 日人(일인) 作黨(작당)들에게 暴行(폭행)을 當(당)하는 것을 본 周圍(주위)의 韓國人(한국인)들은 『저놈들을 죽여라』하며 奮發(분발)하여 怒濤(노도)와 같이 惡毒(악독)한 船員(선원)놈들을 치고 받고 때리고 하였다.
우리 同胞(동포)를 虐待(학대)하며 無視(무시)하고 갖은 惡行(악행)을 敢行(감행)하던 日人(일인) 船員(선원)들과 衝突(충돌)한 韓國人(한국인)과의 싸움은 民族怨恨(민족원한)의 發散(발산)이었으며 또한 同胞愛(동포애)를 發顯(발현)시킨 大血鬪(대혈투)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奸惡(간악)하고 眼下無人格(안하무인격)으로 날뛰던 日人(일인)들은 우리 韓人(한인)들에게 얻어 맞고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고 어느놈은 韓人(한인)들의 怒氣(노기)찬 氣焰(기염)에 怯(겁)을 집어먹고 逃亡(도망)하는 者(자)도 있었다.
   칼을 빼들고 날뛰는 船員(선원)들에게 韓國人(한국인)들은 勇敢(용감)하게 싸웠다. 사무친 民族(민족)의 怨恨(원한)을 풀기에 참고 참았던 民族(민족)의 설움을 풀고 猛虎(맹호)와 같이 날뛰며 마구 쳤다.
참으로 痛快(통쾌)한 光景(광경)이었다. 逃亡(도망)가던 船員(선원)들의 그릇된 報告(보고)에 依(의)해서 武裝(무장)을 하고 現場(현장)에 急(급)히 달려온 日人(일인) 警察官(경찰관)은 拳銃(권총)을 쏘며 또는 長劍(장검)을 뽑아 휘두르며 無條件(무조건) 우리 韓人(한인)들을 때리고 칼로 찌르면서 日人(일인) 船員(선원)들을 擁護(옹호)하기에 餘念(여념)이 없었다. 無慈悲(무자비)하게 휘두르는 警察官(경찰관)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우리 韓人(한인)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暴惡無道(포악무도)한 日本(일본) 巡査(순사)들은 加害者(가해자)인 船員(선원)들은 問責(문책)도 하지 않고 빨리 病院(병원)에 가서 治療(치료)하라고 警官(경관)들이 타고온 車(차)에 태워 道立病院(도립병원)으로 보내고는 억울하게 얻어 맞고 칼에 찔려서 피투성이가 된 申明哲(신명철), 韓相吉(한상길), 金基永(김기영), 李順基(이순기), 金讚河(김찬하) 等(등)을 포박하여 警察署(경찰서)로 連行(연행)하여 갔다. 日本(일본) 警官(경관)들은 連行(연행)한 前記(전기) 5名(명)에게 排日思想(배일사상)을 품고 群衆(군중)을 煽動(선동)하여 日人(일인) 船員(선원)들을 計劃的(계획적)으로 集團暴行(집단폭행) 하였다고 自己(자기)들 마음대로 法(법)을 適用(적용)시켜 罪(죄)를 뒤집어 씌우고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蠻行(만행)을 恣行(자행)하고 있을 때 市場(시장)의 韓人(한인)들은 醫師(의사)를 데리고 警察署(경찰서)에 몰려와서 日人(일인) 船員(선원)들의 잘못을 말했고 連行(연행)한 5名(명)의 無罪(무죄)를 主張(주장)하여 釋放(석방)을 哀切(애절)하게 呼訴(호소)하였다. 萬一(만일)에 不應(불응)하면 警察署(경찰서)를 破壞(파괴)하려는 그 氣勢(기세)와 感情(감정)의 爆發(폭발)을 暗示(암시)하였던 市場(시장) 韓人(한인)들의 굳센 意志(의지)와 勇氣(용기)에 日人(일인) 警官(경관)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形勢(형세)가 火急(화급)함을 感知(감지)하여 連行(연행)한 5名(명)의 釋放(석방)을 約束(약속)하였다.
   이 事件(사건)은 市場(시장)에서 일어난 사소한 事件(사건) 같지만 韓人(한인)들의 義俠心(의협심)과 民族的(민족적) 團結(단결)을 誇示(과시)하였고 偉大(위대)한 同胞愛(동포애)를 發揮(발휘)하여 排日感情(배일감정)을 發露(발로)하였던 것이다. 市場(시장)에서 일어난 韓人對(한인대) 日人(일인)의 그 싸움은 惡質的(악질적)인 日人(일인)들의 行悖(행패)를 막는데 크게 作用(작용)하였으며 그들을 反省(반성) 시키는데 좋은 하나의 敎訓(교훈)이 되었다.

2-13. 東亞基督敎人(동아기독교인) 投獄事件(투옥사건)

   元山(원산) 榮町(영정)에 本部(본부)를 둔 東亞基督敎會(동아기독교회)는 浸禮敎(침례교)로서 일찍이 英國人(영국인) 宣敎師(선교사)가 來韓(내한)하여 宣敎事業(선교사업)에 힘써 오던 중 安大闢(안대벽) 牧師(목사)의 主管下(주관하)에 한층 多方面(다방면)으로 活動(활동)을 展開(전개)하였다. 宣敎(선교)와 더불어 排日愛國思想(배일애국사상)을 傳播(전파)하였을 뿐 아니라 全國的(전국적)이요 멀리 滿洲(만주)에까지 反日鬪爭(반일투쟁)의 組織(조직) 밑에 活躍(활약)한 것이 發覺(발각)되어서 數多(수다)한 投獄者(투옥자)를 내는 犧牲(희생)을 當(당)하였다.
   그리하여 敎人(교인)들이 日警(일경)에게 家宅(가택) 搜索(수색)을 當(당)한 끝에 數十名(수십명)이 逮捕監禁(체포감금)된 나머지 함흥형무소에서 7명의 牧師(목사)와 信徒(신도)가 獄死(옥사) 當(당)하였다.

2-14. 養虎團(養虎團(양호단))의 反日反共鬪爭(반일반공투쟁)
 
   우리나라의 民族史(민족사)를 기리 빛낸 바 있는 저 有名(유명)한 靑山里(청산리) 作戰(작전)에서 우리 三千里(삼천리) 錦繡江山(금수강산)을 銃劍(총검)의 武力(무력)으로 掠奪(약탈)하고 韓民族(한민족)을 虐政(학정)에서 허덕이게 한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를 打倒(타도)하기 爲(위)하여 용맹무쌍한 抗日鬪爭(항일투쟁)으로 大韓獨立戰爭(대한독립전쟁)에 크게 功勳(공훈)을 세운 바 있는 金星(김성) 將軍(장군)은 將次(장차) 大韓獨立(대한독립)의 役軍(역군)이 될 愛國鬪士(애국투사)와 軍官(군관)을 養成(양성)하고자 뜻이 깊고 抗日(항일) 鬪爭精神(투쟁정신)이 强(강)한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을 極秘密裡(극비밀리)에 糾合(규합)하여 養虎團(養虎團(양호단))을 創立(창립)하였다.
   靑少年(청소년)들의 敎養(교양)과 國民道德(국민도덕)을 昻揚(앙양)하며 스포츠를 통한 體力增强(체력증강) 等(등)을 表面(표면)에 내세우고 內的(내적)으로는 祖國(조국)의 干城(간성)이 될 靑少年(청소년)들에게 民族獨立思想(민족독립사상)을 鼓吹(고취)시키고 民族解放運動(민족해방운동)을 展開(전개)하던 養虎團(양호단)은 日帝(일제)의 毒牙(독아)와 같은 監視下(감시하)에서도 피눈물 나는 갖은 逆境(역경)을 무릅쓰고 險(험)한 가시밭을 걸으면서 數(수)많은 投獄者(투옥자)도 낸 바 있고 억울한 犧牲者(희생자)도 내었다.
   金星(김성) 將軍(장군)은 排日思想(배일사상)이 徹底(철저)한 鑛山家(광산가) 李容愼(이용신)과 相議(상의)하여 李容愼(이용신)이 經營(경영)하는 茂山鑛山(무산광산)으로 日本(일본) 軍警(군경)의 手配對象(수배대상)이 였던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을 이끌고 들어가 團員(단원) 및 海外(해외)의 愛國靑年(애국청년)들을 日軍警(일군경)의 눈을 속여가며 山(산)속 깊이있는 訓練所(훈련소)에서 寧日(영일)없는 軍事訓鍊(군사훈련)을 계속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熱中(열중)하였다.
   海外(해외)에 亡命(망명)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指導(지도)하는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와 錦密(금밀)한 連絡(연락)을 取(취)하고 있는 養虎團(양호단)에서는 團員(단원)을 海外(해외)에 派遣(파견)하여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 侵略(침략)을 糾彈(규탄)하고 韓民族(한민족)의 解放(해방)을 呼訴(호소)도 하고 또는 國內(국내) 各地(각지)에 潛入(잠입)시켜서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의 收奪(수탈)에서 自由(자유)를 拘束(구속) 當(당)하고 暗黑(암흑)에서 强壓(강압)에 허덕이는 同胞(동포)들에게 祖國光復(조국광복)의 希望(희망)과 勇氣(용기)를 주고 獨立思想(독립사상)을 喚起(환기)시켜 꾸준히 抗日鬪爭(항일투쟁)을 하였다.
   家庭(가정)을 버리고 一身(일신)의 安樂(안락)을 외면한 채 오직 祖國(조국)의 光復(광복)만을 爲(위)하여 어떠한 犧牲(희생)과 極甚(극심)한 獄苦(옥고)를 甘受(감수)해 가며 獨立鬪爭(독립투쟁)을 끊임없이 展開(전개)하는 養虎團(養虎團(양호단)은 李容愼(이용신)이가 새로이 發鑛(발광)하는 이 鑛山(광산) 저 鑛山(광산)으로 本據地(본거지)를 옮기어 가며 日本(일본) 官憲(관헌)들의 무서운 監視(감시)속에서 벗어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危機一發(위기일발)의 卽前(즉전) 아슬아슬한 고비도 넘기고 때론 日本軍(일본군)의 包圍網(포위망)에서 武力戰(무력전)을 벌리면서 難關(난관)을 벗어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들은 日本官憲(일본관헌)들에게 逮捕(체포)되어 모진 拷問(고문)을 當(당)하여도 屈服(굴복)할 줄 몰랐고 간사한 誘惑(유혹)에도 말려들어 가지 않고 오직 民族獨立(민족독립)만을 외치면서 韓國獨立(한국독립)의 正當性(정당성)만을 부르짖었다. 養虎團(양호단)의 그 빛나는 不滅(불멸)의 抗日鬪爭(항일투쟁)과 百折不屈(백절불굴)의 獨立精神(독립정신) 그리고 그들의 얼은 이 나라 歷史上(역사상)에서 높이 評價(평가)될 것이다. 養虎團(양호단)은 祖國解放(조국해방)을 맞이하여 無秩序(무질서)한 社會(사회)를 秩序整然(질서정연)한 社會(사회)로 維持(유지)하는데 힘썼고 民主主義(민주주의) 建設(건설)과 福祉社會(복지사회) 建設(건설)에 獻身(헌신) 努力(노력)하였다. 養虎團(양호단)은 우리 民族(민족)에게 온갖 悲劇(비극)을 惹起(야기)시킨 魔(마)의 38線(선)을 撤廢(철폐) 시키고저 蹶起(궐기)하여 民族運動(민족운동)을 展開(전개)하는데 앞장섰다. 集會(집회)를 갖고 演說(연설)도 하였으며 群衆示威(군중시위)도 하였다. 蘇聯軍(소련군)과 共産赤狗(공산적구)는 愛國運動團體(애국운동단체)인 養虎團(양호단)을 反動團體(반동단체)로 規定(규정)하고 갖은 迫害(박해)와 彈壓(탄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共産赤狗(공산적구)들은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을 監禁(감금)도 하고 投獄(투옥)도 하여 拷問(고문)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는 西伯利亞(서백리아)로 流配(유배)까지 시키는 行爲(행위)를 恣行(자행)하였다.
   元山(원산)에 進駐(진주)한 蘇聯軍(소련군)으로 하여금 供給(공급)받은 武器(무기)로 武裝(무장)한 共産黨(공산당)과 對決(대결)한 養虎團(양호단)은 生命(생명)을 아끼지 않고 억울하게 投獄(투옥)된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을 脫獄(탈옥)할 수 있게끔 하였고 西伯利亞(서백리아)로 流配(유배)되어 가는 反共鬪士(반공투사)를 九死一生(구사일생)의 作戰(작전)으로 救出(구출)하여 自由大韓(자유대한)으로 越南(월남)시키었다.
   養虎團(양호단)은 그 무시무시한 共産黨(공산당) 治下(치하)에서 참으로 決死的(결사적)이고 英雄的(영웅적)인 對共鬪爭(대공투쟁)을 敢行(감행)하였다. 날이 갈수록 共産赤狗(공산적구)의 惡政(악정)은 더욱 甚(심)하여 投獄者(투옥자)와 西伯利亞(서백리아)로 流配(유배)되는 團員(단원)의 數(수)는 增加一路(증가일로)에 있었고 共産黨(공산당)의 武裝(무장)은 더욱 强化(강화)되어 갔다.
對共鬪爭(대공투쟁)을 서울에 가서 할 것을 決議(결의)한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들은 情(정)든 山河(산하)를 버리고 夜陰(야음)을 틈타서 越南(월남)하였다.
   養虎團(양호단)은 臨時本部(임시본부)를 서울 鐘路區(종로구) 勸農洞(권농동)에 두고 隊列(대열)을 다시 整備(정비) 强化(강화)하여 打共態勢(타공태세)의 準備(준비)를 갖추었다.
   1945年(년) 11月(월) 23日(일) 天道敎(천도교)에서 左翼陣營(좌익진영)은 所謂(소위) 人民代表者會議(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黨(당)의 宣言文(선언문)을 朗讀(낭독)하고 行動網領(행동망령)을 외치며 擴大組織(확대조직)을 꾀하는 同時(동시) 欺瞞宣傳(기만선전)으로 民心(민심)을 眩惑(현혹)시키는 大會(대회)가 進行(진행)되고 있었다.
   義憤(의분)에 넘친 養虎團(양호단)에서는 卽刻(즉각) 行動隊(행동대)를 選拔(선발)하여 赤化(적화)의 野慾(야욕)을 획책할려는 不純(불순)한 人民代表者大會(인민대표자대회)를 沮止(저지)시키는데 크게 成果(성과)를 거두었다. 勇猛(용맹)스러운 養虎團(양호단)의 大會工作(대회공작) 沮止(저지) 鬪爭(투쟁)으로 赤色徒輩(적색도배)들은 會議場所(회의장소)를 中央劇場(중앙극장)으로 옮겨 다시 赤化工作(적화공작)의 會議(회의)를 進行(진행)하고 있는 것을 民主主義(민주주의) 建設(건설)에 粉骨碎身(분골쇄신)의 精神(정신)으로 奉仕(봉사)하는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들은 生命(생명)의 危險(위험)을 무릅쓰고 兇惡(흉악)한 그 大會(대회)를 다시 粉碎(분쇄)하였다.
   天道敎會(천도교회)에서의 人民代表者(인민대표자) 會議(회의)와 이어 中央劇場(중앙극장)에서 進行中(진행중)이었던 兩次(양차)의 赤色大會(적색대회)를 沮止(저지) 粉碎(분쇄)시키는 鬪爭(투쟁)을 벌이다가 美軍(미군) 憲兵(헌병)들에게 連行(연행)되어간 同志(동지)들도 數十名(수십명) 있었다.
   大大的(대대적)인 赤化浸透(적화침투)를 劃策(획책)한 兩次(양차)의 大會(대회)를 粉碎(분쇄)시킨 養虎團(양호단)의 業績(업적)은 反共國家(반공국가) 建設(건설)에 貢獻(공헌)이 컸으며 民主陣營(민주진영)의 政治團體(정치단체)를 爲始(위시)하여 많은 反共愛國團體(반공애국단체)들에게 크게 士氣(사기)를 昻揚(앙양)시키었고 그 功績(공적)으로 養虎團(양호단)은 民主陣營(민주진영)의 反共前衛隊(반공전위대)의 旗手(기수)가 되었으며 烏合之衆(오합지중)이 아닌 反共(반공)의 信念(신념)이 强(강)한 模範團體(모범단체)로서 數(수)많은 靑年團體(청년단체)를 이끄는 先導的(선도적) 役割(역할)을 하게끔 되었다.
   1945年(년) 12月(월) 24日(일)은 우리 民族(민족)의 恥辱的(치욕적)인 날이요 民族(민족)의 激憤(격분)을 絶頂(절정)에 達(달)하게 만든 날이다.
蘇聯(소련)莫府(막부)에서 열린 3相會議(상회의)에서는 이 나라를 信託統治(신탁통치)해야한단고 決議(결의)하여 全世界(전세계)에 宣布(선포)하였다.
   이 恥辱的(치욕적)인 信託統治(신탁통치)의 決議案(결의안)을 反對(반대)하는 擧族的(거족적)이라 하리만큼 大大的(대대적)인 運動(운동)이 全國的(전국적)으로 燎原(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났다.
   信託統治(신탁통치)를 反對(반대)하던 共産黨(공산당)과 左翼陣營(좌익진영)은 하루밤 사이에 急變(급변)하여 信託統治(신탁통치)를 支持(지지)한다고 聲明(성명)하고 反託運動(반탁운동)에 反旗(반기)를 들고 民族(민족)을 背信(배신)하였다.
   이 얼마나 슬프고 哀痛(애통)한 일이랴 屈辱的(굴욕적)인 信託統治(신탁통치)를 反對(반대)하는 烽火(봉화)는 全國(전국)을 휩쓸었고 信託(신탁)을 決死反對(결사반대)하는 信託統治(신탁통치) 反對鬪爭本部(반대투쟁본부)가 서울에 設置(설치)되었다.
   反託運動(반탁운동)에 指導者(지도자)이신 李承晩博士(이승만박사)와 金九先生(김구선생)의 信任(신임)이 두터웠던 養虎團(양호단)은 反託鬪爭本部(반탁투쟁본부)와 더불어 反託運動(반탁운동)의 錦密(금밀)한 計劃(계획)을 세우고 信託統治案(신탁통치안)을 粉碎(분쇄)하는데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여 最大(최대)의 成果(성과)를 거두었다.
   養虎團(양호단)은 反託(반탁)의 檄文(격문)을 數十萬枚(수십만매) 印刷(인쇄)하여 서울 市內(시내)와 地方(지방)에 撒布(살포)하여 모든 國民(국민)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反託運動隊列(반탁운동대열)에 參加(참가)할 것을 呼訴(호소)하였고 街頭(가두) 要所(요소)마다 反託(반탁)의 壁報(벽보)를 貼付(첩부)하여 많은 群衆(군중)을 感動(감동)시켰고 感動(감동)하는 群衆(군중)들 앞에서 反託(반탁)의 熱辯(열변)을 吐(토)하여 群衆(군중)을 興奮(흥분)시키었다.
   反託(반탁)의 壁報(벽보)와 反託(반탁)의 熱辯(열변)으로 激憤(격분)이 極(극)에 達(달)한 數(수)많은 群衆(군중)을 이끌고 反託(반탁)의 市街行進(시가행진)을 하다가 美軍政(미군정)에 連行(연행)되어 獄苦(옥고)를 치른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도 여러명 있었다.
   信託統治(신탁통치)를 反對(반대)하는 國民大會(국민대회)가 서울 運動場(운동장)에서 열리었는데 共産黨(공산당)과 左翼陣營(좌익진영)에서는 온갖 妨害(방해)를 다하였다.
共産黨(공산당)과 左翼陣營(좌익진영)에서는 信託反對國民大會(신탁반대국민대회)를 沮止(저지)시키는데 있어서 黨員(당원)과 團員(단원)을 總動員(총동원)시켜 市民(시민)들의 國民大會(국민대회) 參加(참가)를 못하게끔 恐喝(공갈), 脅迫(협박) 等(등) 갖은 惡質的(악질적)인 手法(수법)을 다 發揮(발휘)했고 奇奇妙妙(기기묘묘)한 작난과 工作(공작)을 하며 跳梁(도량)하였다. 그러나 共産黨(공산당)과 左翼陣營(좌익진영)의 그 惡辣(악랄)한 妨害工作(방해공작)은 養虎團(양호단)의 大會場(대회장) 警備(경비)와 反託(반탁)에 熱烈(열렬)한 모든 政黨(정당) 그리고 愛國團體(애국단체)들의 鬪志力(투지력)에 赤色分子(적색분자)들의 妨害工作(방해공작)은 水泡(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信託(신탁)을 反對(반대)하기 爲(위)하여 서울 運動場(운동장)에 雲集(운집)한 群衆(군중)들은 莫府三相會議(막부삼상회의)의 信託統治案(신탁통치안)을 죽음으로 反對(반대)한다는 悲壯(비장)한 決議文(결의문)을 滿場一致(만장일치)로 採擇(채택)하여 民族(민족)의 거룩한 이름으로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宣布(선포)하였다. 5千年(천년)의 悠久(유구)한 歷史(역사)를 가진 韓民族(한민족)의 獨立精神(독립정신)을 다시 한번 四海(사해)에 誇示(과시) 闡明(천명)하였다.
   養虎團(양호단)은 屈辱的(굴욕적)인 信託統治(신탁통치)를 몰아 내는 反託運動(반탁운동)이 絶頂(절정)에 達(달)하여 列强(열강)들이 唐慌(당황)하고 있을 무렵에 本部(본부)를 鐘路區(종로구) 梨花洞(이화동)으로 移動(이동)하였다.
   對共鬪爭(대공투쟁)에 있어서 많은 功績(공적)을 올린 養虎團(양호단)의 名聲(명성)이 漸次的(점차적)으로 높아져서 國民(국민)의 信任(신임)이 두터워가고 있을 때 團長(단장) 金星將軍(김성장군)은 大韓民國(대한민국)政府樹立(정부수립)과 國土統一(국토통일)을 못본체 宿患(숙환)으로 別世(별세)하셨다.
反共陣營(반공진영)의 큰 별을 잃은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들은 슬픔을 禁(금)치 못하고 땅을 치며 痛哭(통곡)하였다. 이에 金星將軍(김성장군)의 가장 가까웠던 同志(동지) 李容愼(이용신)이 團長(단장)으로 就任(취임) 되었다.
   1946年(년) 3月(월) 6日(일) 서울 運動場(운동장)에서는 數萬名(수만명)의 群衆(군중)이 雲集(운집)한 가운데 38線(선) 撤廢要求(철폐요구) 國民大會(국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大會(대회)의 秩序維持(질서유지)와 警護(경호)를 責任(책임)맡은 養虎團(양호단)은 最善(최선)의 努力(노력)을 다하여 大會(대회)의 妨害工作(방해공작)을 하려는 共産分子(공산분자)들의 所行(소행)을 물리치었다.
   魔(마)의 人爲的(인위적)인 38線(선)을 撤廢(철폐)키 위한 國民大會(국민대회)는 李允榮(이윤영)의 開會辭(개회사)가 있었고 蔡奎恒(채규항), 黃基成(황기성)의 뒤를 이어 演壇(연단)에 오른 젊은 靑年(청년) 申明哲(신명철)의 눈물겨운 以北(이북)의 眞相報告(진상보고)와 38線(선)의 不當性(부당성)과 民族(민족)의 悲劇(비극)인 38線(선) 撤廢(철폐)의 외침은 數萬群衆(수만군중)을 感動(감동)시켰고 滿場(만장)의 拍手(박수)와 喝采(갈채)를 받았다. 養虎團(양호단)은 全國的(전국적)으로 散在(산재)하여 組織的(조직적)으로 民心(민심)을 煽動(선동)하고 共産主義思想(공산주의사상)을 宣傳(선전)하며 破壞工作(파괴공작)을 일삼는 赤色團體(적색단체)를 打倒(타도)하는데 갖은 危險(위험)을 무릅쓰고 嶺南地方(영남지방)에서 또는 湖南地方(호남지방)에서 京仁地域(경인지역)에서 東奔西走(동분서주)하며 鬪爭(투쟁)하여 많은 成果(성과)를 올리었다.
   1948年(년) 3.1節(절)인 3月(월)1日(일)에 李容愼(이용신) 團長(단장)이 領導(영도)하는 養虎團(양호단)에서는 3.1運動(운동) 當時(당시)의 指導者(지도자)였고 33人(인)으로서 生存(생존)해 계시는 분들을 泰和館(태화관)에 招請(초청)하여 3.1運動(운동)의 그 偉大(위대)한 功勞(공로)를 높이 讚揚(찬양)하였고 招請(초청)한 3.1運動(운동) 指導者(지도자)들에게 金指環(금지환)을 膳賜(선사)하여 滿場(만장)의 熱烈(열렬)한 拍手(박수)와 喝采(갈채)를 받았다.
   金指環(금지환)을 膳賜(선사) 받은 그 어른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感激(감격)의 瞬間(순간)이었다. 이 나라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였고 反共運動(반공운동)의 最先鋒(최선봉)에서 피눈물 나는 鬪爭(투쟁)을 하였던 養虎團(양호단)에서 33人(인)었던 그 분들을 招請(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였고, 金指環(금지환)을 記念品(기념품)으로 드린 것은 참으로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를 尊敬(존경)하는 그 마음씨가 훌륭했고 3.1運動(운동)을 다시 한번 喚起(환기)시킨 것은 養虎團(양호단)의 큰 자랑이요 崇高(숭고)한 愛國精神(애국정신)의 象徵(상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33人(인)의 한분이시고 獨立宣言書 起草者(기초자)이신 崔南善(최남선)은 殞命(운명)하시기 卽前(즉전)에 問病(문병)갔었던 李容愼(이용신) 團長(단장)의 손을 붙들고 養虎團(양호단)의 反日反共(반일반공)의 鬪爭(투쟁)을 높이 讚揚(찬양)해 주시고 養虎團(양호단)에서 泰和館(태화관)의 3.1運動(운동) 記念宴會(기념연회)는 참으로 感謝(감사)했으며 내가 이 世上(세상)에 왔다가 이제 命(명)이 다하여 가는데 오직 가지고 가는 것은 이 반지, 養虎團(양호단)의 愛國同志(애국동지)들이 준 이 금반지 하나 만을 가지고 갑니다고 하시었으니 養虎團(양호단)에서 베푼 그 3.1運動(운동) 記念宴會(기념연회)야말로 後世(후세)에 본받을 일을 했다 해도 過言(과언)이 아니다.
   38以北(이북) 共産赤治下(공산적치하)에서 모든 財産(재산)을 버리고 알몸으로 男負女戴(남부여대)하여 越南(월남)하는 同胞(동포)를 救護(구호)하는 데도 養虎團(양호단)에서는 自己(자기) 父母兄弟(부모형제)를 섬기고 도웁는 것처럼 誠心誠意(성심성의)껏 도와주며 生計(생계)와 갈길을 引導(인도)하는데 努力(노력)하였다.
   1948年(년) 8月(월)15日(일) UN總會(총회)에서 韓民族(한민족)의 줄기찬 獨立鬪爭(독립투쟁)의 正當性(정당성)이 認證(인증)되어 비로소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는 樹立(수립)되었다.
獨立國(독립국)의 矜持(긍지)를 誇示(과시)하며 世界平和(세계평화)에 寄與(기여)할 이 나라의 希望(희망)에 찬 우렁찬 鼓動(고동)소리와 함께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들은 軍(군)에 들어가 祖國(조국)의 干城(간성)이 될 것을 다짐하였으며 더러는 官界(관계)에도 들어가 各(각) 分野(분야)에서 맡은 바 職責(직책)에 對(대)한 義務(의무)를 履行(이행)하는 模範的(모범적)인 愛國者(애국자)가 되어 養虎團(양호단)의 救國精神(구국정신)을 더욱 빛내었다.
   中區(중구) 苧洞(저동)으로 移動(이동)한 養虎團(양호단)本部(본부)에서는 박태진이 著述(저술)한 北朝鮮路線(북조선로선) 批判(비판)을 李容愼(이용신) 發行(발행)으로 하여 非人道的(비인도적)인 野蠻行爲(야만행위)를 糾明(규명)하는 反共文化事業(반공문화사업)에도 크게 成果(성과)를 올렸고 또 時局啓夢講演班(시국계몽강연반)을 編成(편성)하여 全國各地(전국각지)를 巡廻(순회)하면서 數(수)많은 群衆(군중)앞에서 赤色徒輩(적색도배)들의 갖은 惡行(악행)을 暴露(폭로)하여 反共意識(반공의식)을 다시 한번 喚起(환기)시키고 나아가서는 反共態勢(반공태세)를 强化(강화)하는데 努力(노력)하여 祖國發展(조국발전)에 크게 貢獻(공헌)하였다.
   1950年(년) 6月(월)25日(일) 平和(평화)스러운 日曜日(일요일) 새벽이었다.
北韓傀儡(북한괴뢰)는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에서 猛威(맹위)를 떨쳤던 蘇聯製(소련제) 60屯(둔) 탱크를 앞세우고 同族(동족)을 殺戮(살육)하는 歷史上(역사상) 類例(유례)없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民族最大(민족최대)의 悲劇(비극)을 惹起(야기)시켜 이 나라 錦繡江山(금수강산)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
韓哲珉(한철민) 쟉크 部隊長(부대장)을 비롯하여 崔一男(최일남), 朴明鐵(박명철) 外(외) 數十名(수십명)은 對北工作(대북공작)에 있어서 銃彈(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戰線(전선)을 뚫고 敵地(적지)에 깊숙히 들어가 傀儡軍(괴뢰군)의 軍事機密(군사기밀)을 探知(탐지)하여 我軍(아군)에게 알리기도 하고 敵(적)의 補給路(보급로)를 遮斷(차단) 破壞(파괴)하는데 決死的(결사적)인 鬪爭(투쟁)을 敢行(감행)하여 크게 武功(무공)을 세운바 있다.
   崔主峰(최주봉) 리바이불 部隊長(부대장)과 李淵福(이연복) 고르 部隊長(부대장)을 비롯하여 王允國(왕윤국), 金佑卿(김우경), 李淵吉(이연길), 崔政淳(최정순)을 비롯하여 數千名(수천명)은 美極東(미극동) 司令部(사령부)에 所屬(소속)된 特攻隊(특공대)를 編成(편성)하고 西海(서해)에서 侵略軍(침략군)에게 軍需物資(군수물자)를 供給(공급)하는 中共軍(중공군) 補給船(보급선)을 拿捕(나포)도 하고 또는 擊破(격파)도 시켜 敵(적)의 主要基地(주요기지)를 襲擊(습격)하는 猛活動(맹활동)을 하였고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에 있어서는 韓國戰亂(한국전란)에 빛나는 武功(무공)을 세운바 있다.
   申明哲(신명철)을 中心(중심)으로 李時雨(이시우), 朴龍(박룡) 外(외) 수십명은 李鍾榮(이종영), 金聖柱(김성주), 盧德述(노덕술) 等(등)과 救國義勇軍(구국의용군)을 編成(편성)하여 젊은 獅子(사자)들을 滅共戰線(멸공전선)으로 나가게 하였다.
   申明哲(신명철)隊長(대장)이 引率(인솔)하는 義勇軍(의용군)과 金聖柱(김성주) 隊長(대장)이 引率(인솔)한 義勇軍(의용군)은 當時(당시) 金錫源(김석원)將軍(장군)이 師團長(사단장)이었던 首都師團(수도사단)에 編入(편입)되어 길이 빛날 많은 戰功(전공)을 세운바 있다.
   6.25動亂(동란)에서 對北工作班(대북공작반) 對北諜報班(대북첩보반) 그리고 特攻隊(특공대) 遊擊隊(유격대) 隊員(대원)으로 敵(적)의 要塞地(요새지)를 爆發(폭발)시키고 數(수)많은 敵軍(적군)을 射殺(사살)하여 赫赫(혁혁)한 功勳(공훈)을 세우고 戰死(전사)를 當(당)한 養虎團(양호단) 團員(단원)이 數十名(수십명)있었음을 여기에 特記(특기)하여 둔다.
   양호단(養虎團) 단원(團員)들은 侵略者(침략자)를 무찌르는데 英雄的(영웅적)인 戰鬪(전투)를 敢行(감행)하여 戰爭史(전쟁사)에 燦然(찬연)한 戰績(전적)을 裝飾(장식)하였고 많은 양호단(養虎團) 단원(團員)들이 美國(미국)의 自由勳章(자유훈장)까지 授與(수여) 받았음을 여기에 特記(특기)하여 둔다.
   1966年(년) 意義(의의) 깊은 3.1節(절)인 3月(월) 1日(일) 正午(정오) 武橋洞(무교동)에 있는 泰和館(태화관)에서 양호단(養虎團) 단원(團員) 同志(동지)와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의 顧問(고문)들 2百餘名(백여명)과 來賓(내빈) 多數(다수) 參席(참석)한 가운데 金星(김성) 將軍(장군)의 뒤를 이어 團長(단장)이 되었던 李容愼(이용신) 先生(선생) 謝恩會(사은회)가 盛大(성대)히 열렸다.
   抗日鬪爭(항일투쟁)과 反共鬪爭(반공투쟁)의 先鋒(선봉)이 되어 赫赫(혁혁)한 功績(공적)을 남겼고 6.25 戰亂(전란) 中(중)에는 反共戰(반공전)에 勇躍(용약)-參戰(참전)하여 犧牲者(희생자)도 많이 내며 超人間的(초인간적)으로 活躍(활약)을 한 나머지 美國(미국)의 自由勳章(자유훈장)까지 받은 단원(團員)도 있었고 이와 같은 찬란한 業績(업적)과 成果(성과)를 올리게 된 裏面(이면)에는 秋岡(추강) 李容愼(이용신)의 物心兩面(물심양면)의 獻身的(헌신적)인 支援(지원)이 絶對的(절대적)이어서 어두움에서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社會(사회) 各(각) 分野(분야)에서 祖國(조국) 近代化(근대화)에 努力(노력)하고 있는 양호단(養虎團) 同志(동지)들이 先生(선생)의 그 功勞(공로)를 感謝(감사)하고 致賀(치하)하는 뜻에서 謝恩會(사은회)를 열었다.
   謝恩會(사은회)의 推進委員(추진위원)이던 申明哲(신명철)의 司會(사회)로 式(식)은 시작되어 역시 推進委員(추진위원)이던 朴泰鎭(박태진)의 開會辭(개회사)와 李鍾珏(이종각)이 先生(선생)에게 꽃다발을 드리고 金佑卿(김우경), 崔圭峯(최규봉) 兩人(양인)에 依(의)하여 記念品(기념품)을 贈呈(증정)하였다.
그리고 徐南龍(서남룡) 咸鏡南道知事(함경남도지사)의 祝辭(축사)가 있은 後(후) 李容愼(이용신)으로부터 感激(감격)어린 答辭(답사)가 있어 一同(일동)은 눈시울을 적시었다. 式(식)을 마친 다음 宴席(연석)이 베풀어져 오래간만에 옛 同志(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回顧談(회고담), 武勇談(무용담)과 所感(소감)들을 나누고 그야말로 和氣(화기)애애한 가운데 下午(하오) 3時(시)에 閉會(폐회)하였다.
   抗日鬪士(항일투사)로서 그 이름을 四海(사해)에 떨쳤고 反共陣營(반공진영)에서 反共鬪爭(반공투쟁)을 指導(지도)한 觀坡(관파) 金星(김성) 將軍(장군)이 創立(창립)한 양호단(養虎團)은 民族史(민족사)의 燦爛(찬란)한 한 페이지를 裝飾(장식)하였고 金星(김성) 將軍(장군)이 심어 놓은 愛國(애국)의 얼은 永遠(영원)히 이 땅에서 빛날 것이다.

幹部名單(간부명단) (無順(무순))
團長(단장) 金星(김성) 將軍(장군) 副團長(부단장) 李容愼(이용신), 韓哲珉(한철민), 朴泰鎭(박태진), 金鍾九(김종구), 李聖敏(이성민), 金佑卿(김우경), 崔圭峯(최규봉), 文哲淳(문철순), 申明哲(신명철), 李時雨(이시우), 朴明鐵(박명철), 朴龍鮮(박용선), 金熙柱(김희주), 李柱孝(이주효), 鄭寅昌(정인창), 朴秉權(박병권), 白基祚(백기조), 尹承鉉(윤승현), 盧葉(노엽), 李淵福(이연복), 方又河(방우하), 李德榮(이덕영), 安東柱(안동주), 朴栢(박백), 金一秀(김일수), 趙權(조권), 李光澤(이광택), 裵光浩(배광호).

3. 社會團體의 活動(사회단체의 활동)

   日本人(일본인)들의 韓國侵略(한국침략)으로 망국지한을 當(당)한 2千萬(천만) 白衣同胞(백의동포) 가운데는 나라를 保存(보존)하지 못한 罪(죄)를 죽음으로써 恨(한)을 씻은 者(자) 그 數(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뜻까지 굽히고 무슨 낯으로 다시 怨讐(원수)를 對(대)하겠느냐는 굳센 意志로 많은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이 單身(단신)으로 或(혹)은 男負女戴(남부여대)하여 뿔뿔이 故國山川(고국산천)을 등지고 저 먼 滿洲(만주)벌판으로 또는 中國(중국) 大陸(대륙)으로 或(혹)은 豆滿江(두만강)을 건너 海蔘威(해삼위)로 떠나갔다.
   故國(고국)을 등지고 떠나는 者(자)나 國內(국내)에서 머무른 者(자)나 다 한결 같이 倭敵(왜적) 日本(일본)에 대한 憎惡(증오)의 마음이야 어찌 굽혔으리요.
國外(국외)에 亡命(망명)한 愛國鬪士(애국투사)들이 海外(해외)에서 祖國光復(조국광복)을 爲(위)하여 活潑(활발)히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함에 발 맞추어서 國內(국내)에서 또한 各種(각종) 社會團體(사회단체)를 組織(조직)하여 民族(민족) 意識(의식)을 鼓吹(고취)하고 團結(단결)을 呼訴(호소)하였다.
中央(중앙)에서는 新幹會(신간회)와 槿友會(근우회)가 發足(발족)함과 同時(동시)에 元山(원산)에서도 여러 團體(단체)가 簇生(족생)하였다.
   1912年(년) 日本(일본)의 明治天皇(명치천황)이 死去(사거)하면서 韓民族(한민족)의 獨立運動(독립운동)은 한층 活潑(활발)하게 展開(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한 團體(단체)가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京鄕(경향) 各地(각지)에서 誕生(탄생)하였다.
 當時(당시)의 團體(단체)는 日人(일인)의 彈壓(탄압)으로 愛國愛族(애국애족)의 名稱(명칭)이나 綱領(강령)은 비록 붙이지 못하였으나 그 內容(내용)은 大槪(대개)가 民族(민족)의 團結(단결)을 呼訴(호소)하는 抗日鬪爭(항일투쟁)의 團體(단체)였다.
 다음에 元山(원산)서 組織(조직) 發足(발족)한 各種(각종) 團體(단체)들의 活動(활동)을 大略(대략) 간추려 보기로 한다.

◇ 元山靑年俱樂部(원산청년구락부)

1913年(년) 3月頃(월경) 『元山靑年俱樂部(원산청년구락부)』가 發足(발족)되었다.
『元山靑年俱樂部(원산청년구락부)』를 發起(발기)한 中心人物(중심인물)들은 趙鍾九(조종구), 朴昌浩(박창호), 金秉綸(김병륜), 南相斌(남상빈), 金相翊(김상익), 韓圭東(한규동), 李元錫(이원석), 金弼皓(김필호) 등 靑年層(청년층)을 網羅(망라)하여 백수십명의 뜻을 같이한 同志(동지)들로 團結(단결)되어서 民族精神(민족정신)과 獨立思想(독립사상)을 鼓吹(고취)하고 時局講演(시국강연)을 開催(개최)하여 民衆(민중)을 啓蒙(계몽)하였다.
 日本(일본) 官憲(관헌)의 迫害(박해)가 日益(일익) 加重(가중)되었으나 不屈(불굴)의 鬪志(투지)로써 끝까지 鬪爭(투쟁)하였으며 心身(심신)의 鍛鍊(단련)을 위하여 庭球(정구), 蹴球(축구), 野球(야구)등 各種(각종) 運動競技(운동경기)도 奬勵(장려)하였다.

◇ 元山靑年會(원산청년회)

元山有志(원산유지) 靑年(청년) 趙鍾九(조종구), 安敦雨(안돈우), 蔡洛奇(채락기), 金相翊(김상익), 安泰浩(안태호) 등의 發起(발기)로 1914年(년) 가을 銘石洞前(명석동전) 春城學校跡(춘성학교적)에서 創立(창립)하였다. 會長(회장)을 趙鍾九(조종구)로 한 同(동) 靑年會(청년회)는 許多(허다)한 難關(난관)과 日帝(일제)의 彈壓(탄압)에도 不拘(불구)하고 民族獨立精神(민족독립정신)의 涵養(함양)과 鬪爭(투쟁)에 항상 先鋒的(선봉적) 役割(역할)을 다하였다.

◇ 元山(원산)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

1928年(년) 元山(원산)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總罷業(총파업)이 일어나기 前年(전년)인 1927年(년) 抗日精神(항일정신)이 强(강)하였던 南相沃(남상옥)의 主導(주도)로 元山(원산)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이 結成(결성)되어 彈壓(탄압)과 投獄(투옥) 갖은 拷問(고문)에도 屈(굴)치 않고 日帝(일제)에 抗拒(항거) 民族(민족) 自主獨立(자주독립)을 爲(위)하여 勞動者(노동자)의 權益(권익) 擁護(옹호)를 위한 鬪爭(투쟁)에 先鋒的(선봉적) 役割(역할)을 다 하였다.
 元山(원산)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은 그 廣範(광범)한 組織網(조직망)과 緻密(치밀)한 計劃下(계획하)에 熱烈(열렬)한 鬪爭力(투쟁력)으로써 總罷業(총파업)을 工作(공작)하고 指揮(지휘)하였다.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 總罷業事件(총파업사건)은 長期間(장기간)에 걸쳐서 全國的(전국적)으로 큰 센세이숀을 일으켰던 만큼 이에 당황한 日本(일본) 警察(경찰)은 다시 總罷業(총파업)이 惹起(야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使嗾(사주)에 應(응)할 수 있는 官制勞動團體(관제노동단체)를 組織(조직)하고 있는 事實(사실)을 探知(탐지)한 「自由勞組(자유노조)」는 그 沮止(저지)에 積極(적극) 鬪爭(투쟁)하였으며 드디어는 誕生(탄생)된 御用團體(어용단체) 埠頭勞動者(부두노동자)들의 收奪體(수탈체)인 勞動會(노동회)의 粉碎(분쇄)에도 鬪爭(투쟁)하였다.
「自由勞組(자유노조)」는 南相沃(남상옥)을 비롯하여 趙時元(조시원), 金演彰(김연창), 柳愚錫(유우석) 등이 中心(중심)이 되어 活動(활동)하였는데 日警(일경)의 檢擧(검거) 旋風(선풍)으로 多數(다수) 逮捕(체포)되었으며 이 事件(사건)이 當時(당시) 東亞(동아), 朝鮮(조선) 등 各(각) 日刊新聞(일간신문)에도 大書特筆(대서특필)로 報道(보도)되어서 世上(세상)을 驚愕(경악)케 하였다.

◇ 黑友會(흑우회)

南相沃(남상옥), 金大寬(김대관), 李鄕(이향) 등을 中心(중심)으로 3百餘名(백여명)의 靑年(청년)이 團結(단결)되어 日帝(일제)의 彈壓(탄압)을 무릅쓰고 民族精神(민족정신)을 높이 宣揚(선양)하였을 뿐 아니라 反日鬪爭(반일투쟁)의 先鋒(선봉)에 서서 不屈(불굴)의 鬪爭(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投獄(투옥)된 犧牲者(희생자)도 여러 사람 있었다.

◇ 元山(원산) 文友會(문우회)

1918年(년) 2月(월) 上里(상리)2洞(동) 원산상공회의소내에서 靑年(청년) 有志(유지) 安廷協(안정협), 趙鍾九(조종구), 趙性喆(조성철), 安敦雨(안돈우), 河聖寬(하성관), 徐泰鎬(서태호), 朴容大(박용대), 元常元(원상원), 金相翊(김상익) 등의 發起(발기)로 150餘名(여명)의 靑年(청년)이 集合(집합)하여 創立總會(창립총회)를 열고 發足(발족)되어 元山靑年(원산청년)의 道義(도의) 啓蒙(계몽)과 愛國史上(애국사상) 鼓吹(고취)를 目標(목표)로 活動(활동)하였다.

◇ 양호단(養虎團)

金星(김성) 將軍(장군)이 創立(창립)하여 數百名(수백명)의 愛國靑年(애국청년)을 團員(단원)(團員)으로 反日愛國精神(반일애국정신) 武裝(무장)과 抗日鬪爭(항일투쟁)에 猛烈(맹렬)한 活動(활동)을 계속하였다.

◇ 元山女子靑年會(원산여자청년회)

元山女子靑年會(원산여자청년회)는 1920年(년) 7月(월) 9日(일) 銘石洞(명석동) 進誠女學校(진성여학교) 講堂(강당)에서 創立總會(창립총회)를 開催(개최)함으로써 發足(발족)되어 當時(당시) 封建的(봉건적)인 舊道德(구도덕)의 遺習(유습)에 얽매였던 女性(여성)들의 開化啓蒙(개화계몽)과 抗日民族意識(항일민족의식)의 敎養育成團結(교양육성단결)에 큰 貢獻(공헌)이 있었다. 同(동) 女子靑年會(여자청년회)의 主要人物(주요인물)은 다음과 같다.
裵明進(배명진), 吳仁善(오인선), 李仁善(이인선), 金泰淳(김태순), 朴恩姬(박은희), 金滿子(김만자), 承敬愛(승경애), 金마리아, 金貞淑(김정숙).

◇ 元山新聞記者團(원산신문기자단)

3.1獨立運動(독립운동) 以後(이후) 數種(수종) 日刊新聞(일간신문)이 發行(발행)되면서 元山(원산)에도 同支社(동지사),支局(지국)이 發足(발족)함에 따라 記者(기자)들의 活動(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記者團(기자단)이 組織(조직)되었다. 日本人(일본인) 記者團(기자단)과 對立(대립)하여 항상 民族正氣(민족정기)의 先導昻揚(선도앙양)을 爲(위)하여 筆鋒(필봉)을 들었다. 1920年代(년대)의 韓國人(한국인) 記者(기자)들의 活動(활동)은 昭詳(소상)치 아니하나 1930年代(년대)부터 8.15解放(해방)까지 金希俊(김희준), 崔文錫(최문석), 康奎鎭(강규진), 邊龍甲(변용갑), 金鐵煥(김철환), 韓曉(한효), 南相孝(남상효) 등이 新聞記者(신문기자)로서 活動(활동)하였다.
元山新聞記者團(원산신문기자단)은 1937年(년) 金相翊(김상익), 金河善(김하선), 金燦文(김찬문), 盧文麒(노문기), 李弘俊(이홍준), 金河敦(김하돈), 金景律(김경율), 康奎鎭(강규진), 尹順旭(윤순욱), 金希俊(김희준) 諸氏(제씨)의 發起(발기)로 元山佛敎布敎所(원산불교포교소) 講堂(강당)에서 社會(사회) 有志(유지)들 參席裡(참석리)에 發足(발족)되었다.

◇ 元山體育會(원산체육회)

 元山體育會(원산체육회)는 1922年(년)에 創立(창립)되었으며 年(년) 1回式(회식) 關北蹴球大會(관북축구대회)를 開催(개최)하였다.
 會長(회장)에 金景俊(김경준), 理事長(이사장)에 安南奎(안남규), 理事(이사)에 韓永圭(한영규), 李錫保(이석보), 金阿榮(김아영), 魏鳳煥(위봉환), 朴長星(박장성), 李善揆(이선규), 朴載善(박재선), 千一南(천일남), 張君文(장군문), 李昌俊(이창준) 등이며 당시 會員(회원)은 150名(명)이었다.

   ◇ 元山靑年會(원산청년회)

1930年(년) 봄, 南相沃(남상옥), 金大寬(김대관), 趙時元(조시원), 金演彰(김연창) 등 抗日精神(항일정신)이 透徹(투철)한 知識層(지식층) 靑年(청년)들이 糾合(규합)되어 元山靑年會(원산청년회)를 組織(조직)하고 活動(활동)을 展開(전개)하였다. 南相沃(남상옥) 會長(회장)을 中心(중심)으로 하여 靑年會員(청년회원)들은 組織(조직)과 基盤(기반)을 强化(강화)하고 民族獨立思想(민족독립사상)을 鼓吹(고취)하는 同時(동시)에 抗日鬪爭(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또 後輩(후배)들의 民族獨立思想(민족독립사상) 武裝(무장)을 위한 敎養(교양)과 讀書(독서)에 힘쓰는 一方(일방) 勤儉精神(근검정신)의 培養(배양) 實踐(실천) 民族團結(민족단결)을 부르짖고 抗日獨立鬪爭(항일독립투쟁)에 專念(전념)하였다.
會長(회장) 南相沃(남상옥)
幹部(간부) 金大寬(김대관), 趙時元(조시원)
◇ 元山少年斥候隊(원산소년척후대)
 1935年(년) 4月(월) 元山基督靑年會(원산기독청년회) 會館(회관)에서 崔璟在(최경재), 李相文(이상문), 韓浩錫(한호석), 河榮洛(하영락), 金希俊(김희준), 張道永(장도영) 등의 發起(발기)로 원산보이스카우드를 組織(조직) 團體訓練(단체훈련)과 自治性(자치성) 涵養(함양)에 힘썼다.

   ◇ 自力更生會(자력갱생회)

1932年(년) 4月(월)15日(일) 元山光明學校(원산광명학교)에서 수백명이 參席(참석)한 가운데 자력갱생회를 創立(창립)하여 人材養成(인재양성)을 爲(위)하여 헌신노력하는 白頭山奬學會(백두산장학회) 會長(회장)인 노창갑의 祖父(조부)인 노기만을 會長(회장)에, 副會長(부회장)으로는 韓浩錫(한호석) 總務(총무)에 김희준을 選出(선출)하였다. 갱생회는 事大主義(사대주의) 思想(사상)과 外來風潮(외래풍조)를 排擊(배격)하고 民族固有文化(민족고유문화)와 民族精神(민족정신)을 昻揚(앙양)하며 우리 同胞(동포)가 生産(생산)하는 國産品(국산품)을 愛用(애용)하는 運動(운동)을 展開(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自主(자주)와 自立精神(자립정신)을 鼓吹(고취)하여 크게 成果(성과)를 거두었고 國力(국력)을 培養(배양)하는데 努力(노력)하여 民族運動(민족운동)에 貢獻(공헌)하였다.

  ◇ 一心會(일심회)

西紀(서기) 1941年(년) 4月(월) 日本(일본)의 所謂(소위) 大東亞戰爭(대동아전쟁)이 勃發(발발)된 後(후)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敗亡(패망)이 不遠(불원)하다는 것을 信念(신념)으로 靑少年(청소년)의 愛國思想(애국사상)을 불러일으키고 同志(동지)를 糾合(규합)해서 有事時(유사시) 日本帝國(일본제국)에 抗拒鬪爭(항거투쟁)하자는 것을 目的(목적)으로 秘密組織(비밀조직)을 꾀하다가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에 檢擧(검거)되어 治安維持法(치안유지법)에 抵觸(저촉)되어 投獄(투옥)되었다.
一心會(일심회)의 重要(중요) 멤버는 李淵福(이연복), 崔政淳(최정순), 崔圭峯(최규봉), 全世錄(전세록), 崔聖範(최성범), 朴成萬(박성만), 盧鳳錫(노봉석), 李鶴鏞(이학용), 李淵吉(이연길) 등으로서 李淵福(이연복)은 6.25當時(당시) 平北水運島(평북수운도) 近海(근해)에서 諜報工作(첩보공작) 中(중) 壯烈(장렬)한 戰死(전사)를 했고 盧鳳錫(노봉석)과 李鶴鏞(이학용)은 8.15 後(후) 元山(원산)에서 反共鬪爭(반공투쟁)하다 自宅(자택)에서 保安署員(보안서원)의 銃彈(총탄)으로 哀惜(애석)하게 犧牲(희생)되었다.

  ◇ 大元俱樂部(대원구락부)

1930年(년) 5月(월) 元山商議所(원산상의소)에서 結成(결성)한 大元俱樂部(대원구락부)는 民族獨立運動(민족독립운동)과 社會運動(사회운동) 그리고 靑年運動(청년운동)을 하면서 高齡(고령)의 老人(노인)들을 慰安(위안)하기 위한 敬老會野宴(경노회야연)도 開催(개최)하는 等(등) 많은 活動(활동)을 하였다.
會長(회장) 金相翊(김상익) 副會長(부회장) 南命祐(남명우).

  ◇ 新幹會元山支部(신간회원산지부)

1937年(년) 8月(월)에 發足(발족)한 新幹會元山支部(신간회원산지부)는 民族解放(민족해방)을 爲(위)하여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와 鬪爭(투쟁)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寄與(기여)한 바 크다.
會長(회장) 李可順(이가순), 副會長(부회장) 金相翊(김상익), 韓興根(한흥근), 文武術(문무술).

4. 反共鬪爭記(반공투쟁기)

蘇聯軍(소련군)이 元山(원산)에 進駐(진주)한 것은 1945年(년) 8月(월) 22日(일)이었다.
所謂(소위) 解放軍(해방군) 이라고 自稱(자칭)하고 元山(원산)에 進駐(진주)한 蘇聯軍(소련군)은 進駐(진주)하자부터 약탈(掠奪)과 强姦(강간), 暴行(폭행)을 마음대로 하였고 또 共産黨(공산당)은 이의 앞잡이로 暗躍(암약)하여 無法天地化(무법천지화)하였다. 그뿐 아니라 占領軍(점령군)의 命令(명령)에 依(의)하여 많은 民族主義(민족주의) 愛國者(애국자)들이 속속 檢擧(검거)되어 或(혹)은 處斷(처단) 或(혹)은 流刑(유형)되었다.
이 때부터 反共鬪爭(반공투쟁)이 陰陽(음양)으로 表現化(표현화)하게 되었다. 個人(개인) 或(혹)은 集團的(집단적)으로 끊임없는 反共鬪爭(반공투쟁)이 繼續(계속)되었다.
 集團的(집단적) 鬪爭(투쟁)을 한 것으로는 양호단(養虎團)과 白衣社(백의사)를 들 수 있다. 양호단(養虎團)은 滿洲(만주)에서 抗日鬪爭(항일투쟁)을 시작하여 저 有名(유명)하였던 靑山里(청산리) 싸움에서 李範奭(이범석) 將軍(장군)과 같이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고 돌아온 金星(김성) 將軍(장군)이 日帝(일제) 彈壓下(탄압하)에서 組織(조직)하여 靑年中心(청년중심)의 强力(강력)한 團體(단체)로 訓鍊(훈련)과 敎養(교양)을 쌓아오다가 日帝末葉(일제말엽)에 地下(지하)로 숨어 버렸던 것인데 解放(해방)이 되고 다시금 蘇聯(소련) 共産黨(공산당)의 出現(출현)으로 뜻하지 않았던 暴政(폭정)이 나타나게 되자 金星(김성) 將軍(장군)이 主動(주동)이 되어 同志(동지)들을 再糾合(재규합)하여 再建(재건)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1945年(년) 10月頃(월경) 어느 날 山祭洞(산제동) 韓哲珉(한철민) 宅(댁)에서 金星(김성) 將軍(장군) 韓哲珉(한철민) 朴泰鎭(박태진) 等(등)이 會合(회합)하여 現下祖國(현하조국)의 情勢(정세)를 判斷(판단)하건대 우리의 鬪爭舞臺(투쟁무대)는 元山(원산)이 아니고 首都(수도) 서울이라는데 意見(의견)의 一致(일치)를 보고 金星(김성) 將軍(장군)과 韓哲珉(한철민), 申明哲(신명철) 等(등)은 同志(동지)들과 함께 上京(상경)하고 朴泰鎭(박태진)은 元山(원산)에 머물며 秘密(비밀) 連絡(연락)을 取(취)하기로 하였다.
 上京(상경)한 양호단(養虎團)과 朴泰鎭(박태진)은 隨時(수시)로 情勢交換(정세교환)을 하였고 이듬해인 46年(년) 봄에는 서울에서 打共運動(타공운동)의 最先鋒(최선봉)에서 果敢(과감)하게 鬪爭(투쟁)하였던 韓哲珉(한철민) 自身(자신)이 元山(원산)에 들어가 現況(현황)을 몸소 把握(파악)하고 上京(상경)하는 中途(중도)에서 共産軍(공산군)과 單獨交戰(단독교전)을 하여 勇敢(용감)한 戰果(전과)를 거둔 事實(사실)은 特記(특기)할 만한 功勞(공로)였다.

4-1.反蘇(반소) 鬪爭(투쟁) 義擧(의거)

 歷史的(역사적)으로 抗日鬪爭(항일투쟁)에 그 愛國(애국)精神(정신)과 民族運動(민족운동)을 熱烈(열렬)히 發揮(발휘)하였던 元山市民(원산시민)은 8.15以後(이후) 蘇軍(소군)의 進駐(진주)와 더불어 그 野蠻的(야만적)인 虐殺(학살)과 彈壓(탄압)에 대하여도 排日精神(배일정신) 以上(이상)으로 英雄的(영웅적)인 抗拒(항거)와 鬪爭(투쟁)을 계속하였다.
 蘇軍(소군)은 元山(원산)이 港口(항구)인 까닭에 北韓(북한)에서 제일 먼저 8月下旬(월하순)에 上陸(상륙)하였다. 第(제)2次(차) 世界大戰(세계대전) 終末期(종말기)라 그들은 糧穀(양곡)과 物資(물자)가 極度(극도)로 窮乏(궁핍)하였던 때라 모든 物資(물자)를 닥치는 대로 약탈(掠奪)하여 蘇聯(소련)으로 실어갔다.
 元山(원산)의 3大(대) 工場(공장)인 石油(석유), 鐵道(철도), 造船工場(조선공장)을 占據(점거)하고 그 復舊運營(복구운영)이 目的(목적)이 아니라 그 施設(시설)과 物資(물자)를 빼앗아 가는 것이 蘇軍(소군)의 目的(목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大工場(대공장)뿐 아니라 群小工場(군소공장) 等(등)과 個人(개인)의 집에까지 뛰어들어 온갖 物資(물자)를 그들의 貪慾(탐욕)이 許(허)하는데 까지 약탈(掠奪)을 恣行(자행)하였다.
 共産主義(공산주의)란 本來(본래) 私有財産(사유재산)이나 個人(개인)의 所有(소유)를 認定(인정)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必要(필요)한 物資(물자)를 가져가기도 하였지만 마치 北韓(북한)땅을 敗戰地域(패전지역)이나 被占領地區(피점령지구)로 看做(간주)하고 갖은 惡辣(악랄)한 方法(방법)으로 약탈(掠奪)을 强行(강행)하였다. 또 그들은 韓國人(한국인)의 所有物(소유물)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가져가고 싶은 物資(물자)가 있을 때는 言必稱(언필칭) 日本人(일본인)의 것이라고 僞稱(위칭)하고 빼앗아 갔다.
 길에 가는 行人(행인)들을 銃(총)칼로 威脅(위협)하고 타고 가던 自轉車(자전차)를 뺏고 時計(시계)도 强奪(강탈)하는것쯤은 普通(보통)이었다. 白晝(백주)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家具(가구)나 衣服(의복)도 奪取(탈취)하였으며 女子(여자)들을 强姦(강간)까지 하였을 뿐 아니라 집까지도 뺏었다.
 이러한 險惡(험악)한 事態下(사태하)에서 元山(원산) 市民(시민)들은 蘇軍(소군)을 「解放(해방)의 恩人(은인)」이라고 呼稱(호칭)하는 共産徒輩(공산도배)들의 宣傳(선전)이 그 虛僞(허위)임을 確實(확실)히 알게 되었고 共産社會(공산사회)에서 成長(성장)한 蘇軍(소군)들의 野蠻性(야만성)을 把握(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無知幕知(무지막지)한 言動(언동)에서 共産社會(공산사회)의 敎養(교양)과 思考方式(사고방식)이 얼마나 幼稚(유치)하고 野蠻的(야만적)임을 確實(확실)하게 認識(인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蘇軍(소군)의 약탈(掠奪)과 蠻行(만행)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義憤(의분)과 反抗(반항)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各(각) 都市(도시)와 地方(지방)에서는 蘇軍(소군)의 蠻行(만행)을 未然(미연)에 防止(방지)하기 爲(위)하여 집집마다 설렁줄을 매고 빈깡통을 달아놓고 萬一(만일) 밤중이라도 蘇軍(소군)이 侵入(침입)하여 들어올 때는 이웃간에 줄을 흔들고 連通(연통)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쫓아 버렸다.

4-2. 3大工場(대공장) 施設(시설) 약탈(掠奪)과 反蘇抗拒(반소항거)

元山(원산)에서 제일 많은 物資(물자)와 施設(시설)의 약탈(掠奪)은 石油(석유), 鐵道(철도), 造船(조선)등 3大工場(대공장)이었다.
  이 3大工場(대공장)의 施設(시설)과 物資(물자) 특히 糧穀(양곡)등을 모조리 약탈(掠奪)하여 運搬(운반)하는 꼴을 눈 앞에 보고 있던 前記(전기) 工場(공장) 從業員(종업원)들은 참을 수 없는 義憤(의분)으로 蘇軍(소군)에 抗拒(항거)하였으나 强弱(강약)이 不同(부동)이라 견딜 道理(도리)가 없었다. 蘇軍(소군)들은 汽車(기차)로 또는 船便(선편)으로 貴重(귀중)한 物資(물자)와 食糧(식량)을 실어 갔지만 甚至於(심지어) 낡은 궤짝이나 空甁(공병) 같은 허주레한 物品(물품)까지 실어가는데 서슴지 아니하였다.
  各(각) 工場(공장)에는 8.15 直後(직후)부터 自治委員會(자치위원회)나 運營委員會(운영위원회)를 組織(조직) 構成(구성)한 후 日本人(일본인)이 물러간 뒤 새出發(출발)을 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蘇軍(소군)의 蠻行(만행)에 부닥치게 되자 激憤(격분)한 群衆(군중)들은 蘇軍(소군)이 物資(물자)와 食糧(식량)과 施設(시설)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鬪爭(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民族的(민족적) 義憤(의분)에 抗拒(항거)하는 韓國人(한국인)을 蘇軍(소군)과 共産徒輩(공산도배)는 『反動(반동)』『異端者(이단자)』라 規定(규정)하고 處刑(처형)하였다.
  어느 날 밤 이에 憤慨(분개)한 몇 사람의 愛國同志(애국동지)들은 熟意(숙의) 끝에 獨立(독립)된 祖國(조국)의 再建復興(재건부흥)을 위하여 이 工場(공장)들을 살리지 못하고 怨讐(원수)의 蘇聯(소련)으로 빼앗겨 보낼찐댄 없애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結論(결론)을 짓고 燒却(소각)해 버리기로 決議(결의)하였다.
  그리하여 前記(전기) 3大工場(대공장)의 施設(시설)과 物資(물자)는 아깝게도 우리의 손으로 烏有(오유)에 歸(귀)하였으며 葛麻驛(갈마역) 附近(부근)에 있던 內元山里(내원산리) 食糧(식량) 倉庫(창고)도 하룻 밤에 火炎(화염)이 衝天(충천)하여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蘇軍(소군)과 共産徒黨(공산도당)은 이 事實(사실)을 探問(탐문)하고 宋秉柱(송병주) 等(등)에게 이 火災(화재)의 責任(책임)을 지워서 20餘名(여명)의 愛國靑年(애국청년)을 炭鑛(탄광) 또는 西伯利亞(서백리아)로 流刑(유형) 시켰다.

4-3) 中里派出所(중리파출소) 襲擊(습격) 事件(사건)

1945年(년) 8月末(월말) 强姦(강간)하려는 蘇聯軍人(소련군인)에게 必死的(필사적)으로 抗拒(항거)하여 蘇聯軍人(소련군인)을 危境(위경)에 몰아 넣은 反共鬪士(반공투사) 金基順(김기순)양의 壯擧(장거)를 讚揚(찬양)은커녕 도리어 保安署員(보안서원)은 反動分子(반동분자)로 몰아서 中里派出所(중리파출소)에 連行(연행)하여 女子(여자)로서 참기 어려운 온갖 욕설을 퍼부며 마구 구타 하였다.
  元山女性(원산여성)의 氣槪(기개)를 發揮(발휘)하였고 勇敢(용감)하게 抗拒(항거)한 金基順(김기순)양을 天人共怒(천인공노)할 惡質行爲(악질행위)로 拷問(고문)하는 保安署員(보안서원)의 만행에 동리사람들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양호단(養虎團) 團長(단장)인 金星(김성) 將軍(장군)은 民族的(민족적) 義憤(의분)에 激憤(격분)하여 血氣旺盛(혈기왕성)한 申明哲(신명철)에게 金基順(김기순)양의 救出(구출)을 命(명)하였다.
  滿洲(만주) 北路署(북로서) 副司令官(부사령관)이었고 靑山里(청산리) 作戰(작전)에서 勇名(용명)을 떨쳤던 百戰老將(백전노장)인 金星(김성) 將軍(장군)에게서 奇襲作戰(기습작전)에 對(대)한 戰法(전법)을 듣고 난 申明哲(신명철)은 李德榮(이덕영), 高致萬(고치만) 外(외) 數名(수명)과 더불어 9.9式(식) 日本(일본) 小銃(소총)을 發射(발사)하며 派出所(파출소)를 襲擊(습격)하여 西伯利亞(서백리아) 流配(유배) 直前(직전)에 있었던 金基順(김기순)양의 救出(구출)에 成功(성공)하였다.
  밤 하늘을 요란하게 울리었던 그 銃擊戰(총격전)에서 李德榮(이덕영)은 超人間的(초인간적)인 戰鬪(전투)를 하다가 保安署員(보안서원)의 兇彈(흉탄)에 맞아 23歲(세)를 一期(일기)로 애석하게 戰死(전사)를 當(당)하였고 申明哲(신명철)은 政治保衛部(정치보위부)에 拘束(구속)되어 무서운 拷問(고문)을 當(당)하여 갖은 獄苦(옥고)를 겪다가 奇蹟的(기적적)으로 脫出(탈출)하여 越南(월남)하였다.

4-4) 東海中學 中心(동해중학중심)의 鬪爭(투쟁)

1945年(년) 10月(월)에 東海中學(동해중학)이 歷史的(역사적) 開校(개교)를 보자 同時(동시)에 朴泰鎭(박태진) 校長(교장)은 過去(과거) 日帝時(일제시) 大學敎育(대학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韓國人(한국인)인 까닭에 學校敎鞭(학교교편)마저 잡지 못하고 있었던 憂國同志(우국동지)들을 敎職員(교직원)으로 포섭하여 名實共(명실공)히 强力(강력)한 敎授陳(교수진)을 만들고 民主敎育(민주교육)의 아성으로 君臨(군림)하게 되었다.
  한편 朴泰鎭(박태진) 校長(교장)의 夫人(부인)이 蘇聯出身(소련출신) 韓國人(한국인)인 까닭에 朴校長(박교장)은 그를 蘇聯軍(소련군) 通譯(통역)으로 들여보내 캐패우 物資部(물자부) 檢察所(검찰소) 等(등)에서 勤務(근무)하면서 蘇聯(소련) 占領軍(점령군)의 秘密(비밀)을 모조리 探知(탐지)하여 貴重(귀중)한 情報資料(정보자료)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土臺(토대)가 되어 朴泰鎭(박태진) 校長(교장)이 越南(월남)한 후 1949年(년) 1月(월)에 美公報院長(미공보원장) 스튜워드씨의 주선으로 美國政府(미국정부)의 資金(자금)을 얻어 『北朝鮮路線批判(북조선노선비판)』 2萬部(만부)를 出版(출판)하여 反共啓蒙運動(반공계몽운동)의 큰 役割(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東海中學(동해중학) 敎員(교원)들이 中心(중심)이 되고 其他(기타) 民主主義(민주주의) 思想(사상)이 투철한 各(각) 學校(학교) 敎員(교원)들이 秘密裡(비밀리)에 會同(회동)하여 反共敎育(반공교육)을 끈덕지게 持續(지속)해 갔으나 時日(시일)이 흐름에 따라 共産政權(공산정권)은 組織的(조직적)으로 집요하게 스파이網(망)을 通(통)하여 監視(감시)가 더욱 심해져서 큰 成果(성과)도 거둘 수 없이 쓸데 없는 犧牲(희생)만을 초래할 것이 明若觀火(명약관화)하게 되자 여러 同志(동지)들을 한 사람 두 사람 越南(월남)시키게 되었다.
  東海中學(동해중학) 常務理事(상무이사) 朴山根(박산근), 同敎務主任(동교무주임) 金昌漢(김창한), 訓育主任(훈육주임) 韓道俊(한도준), 英語敎師(영어교사) 朴陽厚(박양후), 慮先生(여선생), 數學敎師(수학교사) 洪鎭泳(홍진영), 國語敎師(국어교사) 咸陽隆(함양륭), 數學敎師(수학교사) 金快傑(김쾌걸), 金泰善(김태선), 地理敎師(지리교사) 韓恒錫(한항석) 그리고 明沙中學校敎師(명사중학교교사) 李道俊(이도준), 朴廷三(박정삼) 等(등)을 秘密裡(비밀리)에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朴根祐(박근우)와 劉永寅(유영인)은 最後(최후)까지 鬪爭(투쟁)하다 6.25와 더불어 아깝게도 死刑(사형)을 當(당)하고 만 것이다. 그 뿐 아니라 東海中學出身(동해중학출신)의 많은 學生(학생)들도 朴(박), 劉(유)와 함께 놈들에게 학살 當(당)하고만 슬픈 史跡(사적)을 남기고 말았다.

4-5)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 特派員(특파원) 事件(사건)

  1945年(년) 10月(월) 上海(상해)에 亡命(망명)하였던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가 還國(환국)하게 되자 臨時政府(임시정부)의 國內組織(국내조직)의 必要性(필요성)을 痛感(통감)한 나머지 臨政議政院(임정의정원)의 議決(의결)을 거쳐 內務部長(내무부장) 申翼熙(신익희) 領導下(영도하)에 全國的(전국적) 下部組織(하부조직)을 開始(개시)하면서 上海(상해)에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關連(관련)이 있는 徐尙虎(서상호) 外(외) 4名(명)을 北韓組織責(북한조직책)으로 任命(임명)하게 되자 徐尙虎(서상호)는 王允國(왕윤국)을 帶同(대동)해 元山(원산)에 潛入(잠입)하여 組織(조직)에 着手(착수)하였던 것이다. 우선 李弘俊(이홍준), 金相翊(김상익), 康基德(강기덕), 張禮學(장예학), 姜顯元(강현원)等(등)과 接觸(접촉)하여 暗暗裡(암암리)에 臨政下部組織(임정하부조직)을 시작하였으나 王允國(왕윤국)은 共産政權에 被逮되었다가 天佑神助로 脫出하였다.
 그 後(후) 李弘俊(이홍준)은 越南(월남)하여 申翼熙(신익희) 밑에서 次長(차장)을 지냈다.

  4-6) 遊說(유세)를 通(통)한 鬪爭(투쟁)

西紀(서기) 1948, 9年代(년대)만 해도 南韓(남한)에서의 左翼分子(좌익분자)들의 活動(활동)은 地下(지하) 地上(지상)을 通(통)하여 猛烈(맹렬)하였으니 무시무시했던 麗水(여수) ,順天反亂事件(순천반란사건), 濟州道事件(제주도사건) 等(등)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나 大韓民國(대한민국) 國民(국민)들은 共産黨(공산당)의 正體(정체)를 그때까지 確實(확실)히 把握(파악) 못하고 右往左來(우왕좌래)하는가 하면 中間路線的(중간노선적) 態度(태도)를 가진 灰色分子(회색분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北韓(북한)에서 共産黨(공산당)의 만행을 體驗(체험)한 越南人士(월남인사)들은 痛嘆(통탄)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불투명한 政治情勢(정치정세)를 깨달은 元山同志(원산동지)들은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遊說를 通(통)한 反共啓蒙運動(반공계몽운동)을 展開(전개)하게 하였다.
  朴泰鎭(박태진)은 西紀(서기) 1949年(년) 4月(월) 海軍本部(해군본부) 報道課長(보도과장)의 重責(중책)을 맡고서 濟州道(제주도)를 爲始(위시)하여 南韓(남한) 各地(각지)에서 138回(회)의 反共遊說(반공유세)를 하면서 共産黨(공산당)의 暴惡(포악)을 여지없이 暴露(폭로)하였다. 서울, 釜山(부산), 大邱(대구), 馬山(마산), 晋州(진주), 仁川(인천), 群山(군산), 木浦(목포), 統營(통영) 等地(등지)에서 그리고 서울市內(시내) 各級學校(각급학교) 學生(학생)들을 相對(상대)로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였다.
  한편 申明哲(신명철)은 西紀(서기) 1949年(년) 內務部(내무부)에 屬(속)하고 있으면서 慶尙南道(경상남도), 全羅南北道(전라남북도) 一圓(일원)에 걸쳐서 피를 吐(토)하는 獅子(사자)와 같은 熱辯(열변)으로 遊說活動(유세활동)을 하여 큰 成果(성과)를 거둔 것이다.
勿論(물론) 反共鬪爭(반공투쟁)을 한 越南人士(월남인사)들이 많았던 것은 事實(사실)이지만 元山同志(원산동지)들과 같이 組織的(조직적)으로 鬪爭(투쟁)한 사람들은 比較的(비교적) 적었다고 생각할 때 元山(원산)사람들의 자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4-7) 著書(저서)를 通(통)한 反共鬪爭(반공투쟁)

越南(월남)한 元山人(원산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熱烈(열렬)하게 反共鬪爭(반공투쟁)의 先頭(선두)에서 決死的鬪爭(결사적투쟁)을 하였다는 事實(사실)은 自他가 共認(공인)하는 바이지만 文書(문서)를 通(통)한 反共鬪爭(반공투쟁)에 있어서도 뚜렷한 功績(공적)을 남긴 것이다.
   1955年(년) 東邦輿論協會(동방여론협회)를 創立(창립)하여 全國的(전국적)으로 反共啓蒙(반공계몽)에 온갖 힘을 傾注(경주)한 것은 바로 金希俊(김희준)이다.
그는 오랜 新聞記者生活(신문기자생활)을 通(통)하여 쌓아온 豊富(풍부)한 技能(기능)을 發揮(발휘)하여 機關紙(기관지)인 東邦輿論紙上(동방여론지상)에 共産黨(공산당)의 악랄한 實情(실정)을 파헤침으로서 共産主義(공산주의)의 正體(정체)를 餘地(여지)없이 暴露(폭로)하여 큰 感銘(감명)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또한 輿論協會(여론협회)를 가짐으로써 산 反共運動(반공운동)의 前衛隊役割(전위대역할)을 한 것인데 1967年 12月까지 繼續鬪爭(계속투쟁)한 業績(업적)을 讚揚(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崔文錫(최문석)은 1.4後退時(1.4후퇴시)에 越南(월남)하여 그때 情勢(정세)로 볼 때 一種(일종)의 政治的(정치적) 犧牲物(희생물)이 되어 囹圄(영어)에서 因境(곤경)을 겪은 事實(사실)도 있었으나 公正無私(공정무사)한 再審(재심)에서 無罪釋放(무죄석방)되어 反共鬪爭系列(반공투쟁계열)에서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을 시작하였다. 1955年에 '눈물의 望鄕(망향)'이라고 題(제)한 反共(반공)書籍(서적)을 當時(당시) 海軍(해군)에서 除隊(제대)하여 反共(반공)書籍(서적) 出版(출판)을 目的(목적)으로 發足(발족)한 新潮社(신조사)의 處女(처녀)出版物(출판물)로서 世上(세상)에 내놓아 一大(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킴으로써 그의 徹底(철저)한 反共思想(반공사상)을 雄辯(웅변)으로 表示(표시)한 것을 特記(특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 6.25動亂前(동난전)부터 한週(한주)에 一回式(일회식) 海軍(해군)을 代表(대표)하여 朴泰鎭(박태진)은 對以北放送(대이북방송)을 專擔(전담)하였는데 以北同胞(이북동포)들은 밤 子正(자정)이면 이북속에서 對以北放送(대이북방송)을 듣고 많은 感銘(감명)을 받았다는 것이 1.4 後退時(후퇴시)에 南下(남하)한 故鄕人士(고향인사)들의 所感(소감)으로 밝혀진 것이다.

  4-8)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元山市黨(원산시당)의 活動(활동) (在北)재북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黨首(당수)인 曺晩植(조만식)과 同期同窓(동기동창)인 張禮學(장예학)은 平壤(평양)에서 잠시 反共運動(반공운동)을 하다가 元山(원산)에 들어와서 反共同志(반공동지)들을 糾合(규합)하여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元山市黨(원산시당)을 結成(결성)하여 反共運動(반공운동)을 展開(전개)하였다.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元山市黨(원산시당)에서는 共産主義(공산주의) 虐政下(학정하)에서 自由(자유)를 잃고 呻吟(신음)하는 北韓同胞(북한동포)들을 爲(위)하여 地下(지하)에서 生命(생명)을 걸고 反共鬪爭(반공투쟁)을 하여 많은 業績(업적)을 쌓았으며 또한 많은 投獄者(투옥자)도 내었다.
  委員長(위원장)인 張禮學(장예학)과 幹部(간부)들인, 劉麟(유린), 朴鳳林(박봉림), 李相宜(이상의), 尹一民(윤일민) 等(등)은 殺氣(살기)등등한 亦治下(역치하)에서 反共(반공)의 信念(신념)을 共産赤狗(공산적구)들에게 굽히지 않고 熱烈(열렬)한 對共鬪爭(대공투쟁)을 하는데 앞장 섰고 民主主義(민주주의) 國家建設(국가건설)에 努力(노력)하였다.

  4-9) 東北同志會(동북동지회)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더불어 북한에 진주군으로 상륙한 소련군의 蠻行(만행)은 전쟁의 慘禍(참화)를 直接的(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平和(평화)로웠던 元山市民(원산시민)에게 戰爭(전쟁)의 慘相(참상)을 일깨우는데 充分(충분)하였다.
  그들은 닥치는데로 掠奪(약탈)해 가고 婦女子(부녀자)들을 强姦(강간)해서 到處(도처)에서 阿鼻叫喚(아비규환)의 도가니속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無秩序(무질서)와 混亂(혼란)속에서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들은 人民委員會(인민위원회)란 旗幟(기치)를 들고 北韓人民(북한인민)을 强壓支配(강압지배)하기 始作(시작)하자 一心會(일심회)의 會員(회원)이었던 靑年(청년)들은 日本軍(일본군)이 숨겨 놓았던 武器(무기)를 찾아내어 武裝(무장)하고 蘇軍(소군)과 治安官署(치안관서) 및 要員(요원)을 襲擊(습격)하여 反共擧事(반공거사)를 일으켜 共産黨(공산당)의 凶謀(흉모)를 粉碎(분쇄)하고 南韓(남한)의 右翼人士(우익인사)와 提携(제휴)해서 統一政府(통일정부)를 樹立(수립)하는데 一助(일조)가 되고자 劃策(획책)하고 武器(무기)를 確保(확보)하는데 一次的(일차적)인 力量(역량)을 集注(집주)하였다.
  日本軍의 隱匿武器(은닉무기)를 蒐集(수집)하고 蘇軍將校(소군장교)의 拳銃(권총)을 襲擊奪取(습격탈취)해서 相當量(상당량)의 武器(무기)를 確保(확보)하는데 成功(성공)한 一心會員(일심회원)들은 한편으로 南韓(남한)에 李淵福(이연복), 盧鳳錫(노봉석)을 派遣(파견)해서 南韓政治情勢(남한정치정세)를 살피고 右翼陣營人士(우릭진영인사)들과도 接線(접선)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李淵福(이연복), 盧鳳錫(노봉석), 方又河(방우하) 等(등)은 松田(송전)의 惡質保安隊長(악질보안대장)을 膺懲(응징)키 위해서 北朝鮮共産黨(북조선공산당) 監察部 地方巡察班(감찰부지방순찰반)을 假裝(가장)하고 松田(송전)에 내려가 保安署長(보안서장) 以下(이하) 惡質黨員(악질당원)들을 逐出(축출)하고 돌아오는等 그들은 手段方法(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對共鬪爭(대공투쟁)에 專念(전념)하며 擧事(거사)를 緻密(치밀)히 計劃(계획)하다가 1945年 12月 23日 崔政淳(최정순)의 結婚祝日(결혼축일)을 期(기)해 最終的(최종적)인 計劃(계획)을 다듬기 爲(위)해 夜間(야간)의 祝宴(축연)을 利用(이용)해서 謀議中(모의중) 金永錄(김영록)의 背信(배신)으로 檢察隊(검찰대) 張世林(장세림), 全泰範(전태범)에게 情報(정보)가 漏泄(누설)된 事實(사실)이 알려져 散會(산회)하자 檢察隊幹部 全泰範(전태범)은 隱密(은밀)히 頭目格(두목격)인 李淵福(이연복)을 尾行(미행)해서 場村洞市場(장촌동시장) 入口(입구)에 이르러 앞길을 가로막고 拳銃(권총)을 들이대며 順順(순순)히 逮捕(체포)될 것을 强要(강요)하자 瞬間(순간) 李淵福(이연복)은 날쌘 動作(동작)으로 全泰範(전태범)의 拳銃(권총)을 빼았고 逃走(도주)하는데 同人以下(동인이하) 數名(수명)의 保安署員(보안서원)에게 威脅發射(위협발사)해서 간신히 逮捕(체포)의 危機(위기)를 冒免(모면)했으나 盧鳳錫(노봉석)은 그날 밤 保安署員(보안서원)에게 包圍(포위)된 新興洞自宅(신흥동자택)에서 愛惜(애석)하게도 應戰(응전)끝에 射殺犧牲(사살희생)되었다.
  이 事件(사건)으로 元山(원산)에서의 組織(조직)이 崩壞(붕괴)되자 各組織員(각조직원)들은 北韓(북한)을 脫出(탈출) 南下(남하)하여 서울에서 合流(합류)하였다. 서울에 集結(집결)한 李淵福(이연복), 方又河(방우하), 崔圭峰(최규봉), 全世錄(전세록), 朴成萬(박성만), 李淵吉等(이연길등)은 養虎團(양호단)에 集結(집결)하여 赤徒一色(일색일색)이었던 서울에서 建國準備委員會(건국준비위원회)를 襲擊(습격) 打倒(타도)하는 等(등) 多樣(다양)한 反共鬪爭(반공투쟁)에 挺身(정신)하였다.
  서울에서 이렇게 反共鬪爭(반공투쟁)을 繼續(계속)하다가 1946年 2月 民主議院統計局長(민주의원통계국장)인 趙鍾九(조종구)와 韓哲珉(한철민)의 周旋(주선)으로 '하지 司令部(사령부)'의 密命(밀명)을 받고 北派(북파)를 志願(지원)하는 한便 共産黨頭目(공산당두목)으로 南韓(남한)에서 活動(활동)하고 있던 李舟河(이주하)의 끈덕진 歸鄕說得(귀향설득)을 當時(당시) 滿京中(만경중)에 있던 金富安(김부안)을 通(통)해서 받아 들이는체 假裝(가장)해서 派北時(파북시)의 身邊保護策(신변보호책)을 講究(강구)하고 李淵福(이연복), 全世錄(전세록), 李淵吉(이연길), 朴成萬等(박성만등)은 다시 元山(원산)으로 돌아가 各己(각기) 細胞組織(세포조직)과 密命(밀명)을 遂行(수행)하는데 盡力(진력)하엿다. 그러나 1946年 5月 養虎團員(양호단원)으로 서울에서 活躍(활약)하다가 元山(원산)에 돌아온 同志(동지)들의 保安署主催(보안서주최) 歡迎宴會場(환영연회장)에서의 逮捕事件(체포사건)을 探知(탐지)하게 되자 逮捕(체포)의 손이 미칠 것을 直感(직감)하고 當日(당일) 밤中으로 元山(원산)을 脫出(탈출)하여 다시 南下(남하)하였다.
  約(약) 3個月間(개월간) 滯鄕暗躍中(체향암약중) 韓哲珉(한철민)은 諜報資料(첩보자료)를 蒐集(수집)하기 위해서 安邊近處(안변근처)까지 潛行(잠행)하여 數次(수차)에 걸쳐서 元山(원산)의 組織綱(조직강)과 連結(연결)하여 諜報資料(첩보자료)를 서울까지 搬送(반송)하는데 成功(성공)하였다. 脫出(탈출)에 成功(성공)한 이들은 서울에서 在集結(재집결)하여 反共鬪爭(반공투쟁)에 보다 더 積極參與(적극참여)하였다.
  顧問(고문) 趙鍾九(조종구), 文武術(문무술), 會長(회장) 金河敦(김하돈), 副會長(부회장) 趙時元(조시원), 金浩賢(김호현).
  幹部陳(간부진)으로 李淵吉(이연길), 方又河(방우하), 崔一男(최일남), 李淵福(이연복), 黃進(황진), 朴成萬(박성만), 朴龍(박용), 李泰煥(이태환), 金政勳(김정훈), 朴聖哲(박성철), 黃鍾羽(황종우), 申鉉日(신현일) 等(등)으로 構成(구성)되었다.
  이렇게 東北同志會(동북동지회)를 鍾路區校洞(종로구교동) 硏武官(연무관)에서 結成(결성)하고 看板(간판)을 西本願寺(서본원사)자리 4號室(호실)에 걸고 一絲不亂(일사불난) 組織擴張(조직확장)을 꾀하니 越南元山靑年(월남원산청년)은 勿論(물론) 元山隣接郡 出身(원산인접군출신) 靑年(청년)들의 呼應(호응)을 얻어 날로 會勢(회세)는 擴大一路(확대일로)에 있었고 民主主義建設(민주주의건설)에 크게 貢獻(공헌)한 바 있다.

  4-10) 大韓民國(대한민국) 元山地方(원산지방) 政治指導院(정치지도원) 投獄事件(투옥사건)

元山地方(원산지방)에서 社會的(사회적)으로 重要(중요)한 役割(역할)을 하고 있었던 反共精神(반공정신)이 强(강)한 愛國鬪士(애국투사)들이 團結, 共産徒黨(공산도당)을 打倒(타도)하기 爲(위)하여 秘密裡(비밀리)에 組織(조직)된 大韓民國元山地方政治指導院(대한민국원산지방정치지도원)은 1947年 10月에 發足(발족)하였다.
  政治指導院(정치지도원)은 地下(지하)에서 그 組織綱(조직강)을 通(통)하여 反共人士(반공인사)들을 包攝(포섭)하면서 猛烈(맹렬)한 反共鬪爭(반공투쟁)을 展開(전개)하였고 元山地方(원산지방)에 散在 (산재)하고 있는 各(각) 反共愛國(반공애국) 地下團體(지하단체)들을 指導(지도)하며 그들의 反共運動(반공운동)을 積極(적극) 支援(지원)하는데 있어서 心血(심혈)을 기우렸고 또한 많은 工作金(공작금)도 調達(조달)하여 주었다.
  委員長(위원장) 權儀奉(권의봉), 富委員長(부위원장) 姜湊秀(강주수), 同金碩鉉(동금석현), 同吳秉桂(동오병계), 總務部長(총무부장), 朴鳳林(박봉림), 監察部長(감찰부장) 朴章憲(박장헌), 政治部長(정치부장) 劉永寅(유영인), 組織部長(조직부장) 李德泰(이덕태), 內務部長(내용부장) 李相宇(이상우), 財政 部長(재정부장) 金德熙(김덕희), 商工部長(상공부장) 韓道俊(한도준), 學生部長(학생부장), 朴根祐(박근우), 金滿石(김만석), 崔榮春(최영춘), 韓봉용 外(외) 數名(수명) 等(등)을 幹部(간부)로 한 政治指導員(정치지도원)은 여러 反共團體(반공단체)들과 錦密(금밀)한 連絡(연락)을 取(취)해가며 反共意識(반공의식)을 昻揚(앙양)시키는데 눈부신 活動(활동)을 하여 많은 成果(성과)를 올렸다.
  1948年 國際聯合總會(국제연합총회)의 決議(결의)에 依(의)한 韓國總選擧(한국총선거)를 치루기 爲(위)해 國際聯合(국제연합)韓國(한국)委員團(위원단)의 歷史的(역사적)인 來韓(내한)을 계기로 同委員團(동위원단)이 韓國(한국)에 들어옴을 맞아 莫大(막대)한 工作金(공작금)으로 그의 入北(입북)을 工作(공작)하며 殘忍無道(잔인무도)한 共産徒黨(공산도당)의 蠻行(만행)을 暴露(폭로) 糾彈(규탄)할 義擧(의거)를 各反共愛國團體(각반공애국단체)와 더불어 착착 準備(준비)하고 있을 때 1948年 4月 24日 새벽에 共産徒黨(공산도당)의 악란한 政治保衛部(정치보위부)에 依(의)하여 全部(전부)가 檢擧(검거)되었다.
  눈부신 反共鬪爭(반공투쟁)을 하였고, 共産徒黨(공산도당)의 打倒(타도)에 있어서 용감하게 싸왔던 政治指導院(정치지도원)의 行動隊(행동대)에는 東海中學(동해중학)을 爲始(위시)하여 各級學校(각급학교)의 熱烈(열렬)한 反共(반공)學生(학생)들이 總網羅(총망라)되었다. 이들 反共鬪士(반공투사)인 幹部(간부)와 行動隊(행동대)의 大部分(대부분)은 投獄(투옥)되어 모진 拷問(고문)을 當(당)했고, 이 事件(사건) 關聯者(관련자)들은 咸興(함흥)으로 移送(이송)되어 金碩鉉(김석현), 權儀俸(권의봉), 姜湊秀(강주수), 朴根祐(박근우), 劉永寅(류영인), 金錫憲(김석헌), 金滿石(김만석), 등은 死刑臺(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運動(운동)은 天人共怒(천인공노)할 共産黨(공산당)의 檢擧(검거)로써 끝난 것이 아니고 더욱 奮發(분발)하여 法曹界(법조계)에서 德望(덕망)이 높았던 魯相龜(노상구)와 申應福(신응복)등을 爲始(위시)하여 對共(대공)의 戰列(전렬)을 整備强化(정비강화)하여 暗暗裡(암암리)에 피눈물나는 反共鬪爭(반공투쟁)을 敢行(감행)하다가 그 機密(기밀)이 漏洩(누설)되어 다시 政治保衛部(정치보위부)에 魯相龜(노상구), 申應福(신응복) 등 殘餘幹部(잔여간부)와 行動隊(행동대)가 被檢(피검)되었고 魯相龜(노상구)와 申應福(신응복)은 赤拘(적구)들의 殘忍(잔인)한 魔手(마수)에 드디어 死刑(사형)되고 말았다.
  國家(국가)와 民族(민족)을 爲(위)하여 反共鬪爭(반공투쟁)을 하다가 投獄(투옥)되어서 갖은 獄苦(옥고)를 겪던 愛國鬪士(애국투사)들인 李禎福(이정복), 朴相林(박상림), 林春根(임춘근), 千相泰等(천상태)등은 國軍進駐 直前(국군진주 직전)에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脫獄(탈옥)하여 아슬아슬한 危機(위기)를 冒免(모면)하였고 其他(기타) 棧餘收監者多部分(잔여수감자다부분)은 虐殺(학살)을 當(당)하고 말았다.
  2次(차)에 걸처서 投獄(투옥)되었던 元山地方(원산지방) 政治指導院(정치지도원)의 內務部長(내무부장)인 李相宇(이상우)는 奇蹟的(기적적)으로 出獄(출옥)하게 되여 死刑(사형)을 免(면)하게 되었다.
  政治指導院(정치지도원)과 元山地方(원산지방)의 各(각) 愛國團體(애국단체)들의 愛國的(애국적)인 그 義擧(의거)가 事前(사전)에 機密(기밀)이 누설되어 비록 失敗(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그 計劃(계획)은 거창하였고 그 工作(공작)은 雄大(웅대)한 工作(공작)이라 아닐 할 수 없다.


  4-11) 大同(대동) 靑年團(청년단) 元山市團(원산시단)
   1948年 6月에 大同靑年團(대동청년단) 元山市團(원산시단)이 臨時政府(임시정부) 要人(요인)이며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功績(공적)이 큰 李靑天(이청천) 團長(단장)과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의 顧問等(고문등) 多數參度(다수참도)한 가운데 元山市團(원산시단)이 結成(결성)되었다.
  大同靑年團(대동청년단) 元山市團(원산시단)은 越南(월남)한 元山(원산) 靑年(청년)들로 組織(조직)되었고 그 主要(주요) 멤버를 보면 委員長(위원장) 李奭基(이석기), 幹部(간부)에 崔庚熙(최경희), 洪善澤(홍선택), 張福成(장복성), 朴栢(박백) 等(등)이었다.
  市團(시단)에서는 反共精神(반공정신)을 鼓吹(고취)하는 對北宣撫工作(대북선무공작)과 對以北(대이북) 放送(방송)등을 하여 反共啓蒙(반공계몽)에 크게 成果(성과)를 올렸고 對共鬪爭(대공투쟁)에 있어서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獨立鬪士(독립투사)인 文武術(문무술)의 回甲宴(회갑연)을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와 더불어 昌慶苑(창경원)에서 開催(개최)하였다.

4-12)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元山市黨(원산시당) (서울)
1949年 12月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中央黨部(중앙당부) 黨舍(당사)에서 數百名(수백명)이 參席(참석)한 가운데 結黨(결당)이 되었다. 委員長(위원장)에 金河敦(김하돈), 幹部(간부)에 徐尙虎(사상호), 李鍾泰(이종태), 姜英浩(강영호), 黃進(황진) 등이었다.

白衣(백의) 靑年團(청년단) 事件(사건)

共産徒輩(공산도배)를 打倒(타도)하기 爲(위)하여 組織(조직)된 靑年團(청년단)은 姜熙澤(강희택), 李聖立(이성립), 李炳奎(이병규), 尹一民(윤일민), 尹萬鎬(윤만호), 等(등)들 幹部(간부)로 하여 熾烈(치열)한 反共運動(반공운동)을 展開(전개)하였다.
  靑年團(청년단) 에서는 서울에 本部(본부)를 두고 對共鬪爭(대공투쟁)하는 養虎團(양호단)과 密接(밀접)한 關係(관계)를 맺고 情報活動(정보활동)에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던中 江原道政治保衛部(강원도정치보위부)에 全員(전원)이 被檢(피검)되어 惡(악)랄한 拷問(고문)을 받으며 獄中(옥중)에서 갖은 苦楚(고초)를 겪다가 反共鬪士(반공투사)인 姜熙澤(강희택), 李聖立(이성립), 李炳奎(이병규), 等(등)은 反共運動(반공운동)에 빛나는 鬪爭記錄(투쟁기록)을 세우고 犧牲(희생)되고, 尹一民(윤일민), 尹萬鎬(윤만호)는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脫獄(탈옥)하엿다.

大韓靑年團(대한청년단) 元山市團(원산시단)

1950年 亦治下(역치하)에서 서울이 收復(수복)된 9月 大韓靑年團(대한청년단) 元山市團(원산시단)이 組織(조직)되어 北進(북진), 元山(원산)에 들어가 對共鬪爭(대공투쟁)을 벌였다. 團長(단장) 張福成(장복성), 副團長(부단장) 朴栢(박백), 幹部(간부) 秦英浩(진영호), 金炳基(김병기).

愛國鬪士(애국투사) 後援會(후원회)

1950年 10月 國軍(국군)이 元山(원산)에 進駐(진주)하면서 反共愛國鬪士(반공애국투사)와 그 家族(가족)들을 救出(구출)하고 保護(보호)하는 빛나는 活動(활동)을 展開(전개)하였다.
  委員長(위원장) 金成經(김성경), 副委員長(부위원장) 李相宇(이상우), 幹事(간사) 金德熙(김덕희), 韓道俊(한도준)

5. 항일운동 재판판결문

5-1) 3.1 운동 강기덕 판결문

被告人(피고인)   姜基德(강기덕)

大正(대정) 8月 3日 9日

警務總監部(경무총감부)에서

檢事(검사)  小澤佐(소택좌) 1 郞

書記(서기)  長瀨誠三助(장뢰성삼조)

(문)    本籍地(본적지) 出生地(출생지), 姓名(성명), 年齡(년령)은

(답)    姓名(성명)은 姜基德(강기덕), 31歲(세), 普成專門學校生徒(보성전문학교생도)

住所(주소)   京城府安國洞(경성부안국동)34

本籍(본적)  咸鏡南道德源郡國赤田面(함경남도덕원군적전면) 堂上里(당상리)12

出生地(출생지) 同上

(문) 위기 종군기장, 연금 은급 공직이 있는가

(답)  없다.

(문)    지금까지 형벌을 받은 일은 없는가

(답)    없다.

(문)    그대는 보성법율상업전문하교 몇 학년인가.

(답)    법과 3학년이다.

(문)    교장은 누구인가.

(답)    尹益善(윤익선)이다.

(문)    그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떤학교를 마쳤는가

(답)    元山高等春城學校(원산고등운성학교)를 마친 후 師範學校(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3년간 집에 있다가 졍성에 와서 지금 그 학교에 재학중이다.

(문)    이번 獨立運動(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는

(답)    경성 南大門(남대문) 밖에서 경성전부의 學生(학생)이 朝鮮(조선)獨立(독립)萬歲(만세)를 부르게 될 때 그 중에 들어가서 같이 만세를 불렀으며 또 인력거를 타고서 旗(기)를 가지고 군중을 指揮(지휘)하다가 체포되었다.

(문)    체포된 것은 몇 시가량인가.

(답)    3月 5日 오전 9시 10분경이다.

(문)    피고가 지휘할 때 가졌던 깃자루(旗棒)(기봉)가 이것인가 (이때 압수품 중 제42호를 보임)

(답)    그렇다.

(문)    피고는 무슨 연고로 이러한 기를 들었던가

(답)    3月 1日 孫秉熙(손병희)이하 33人이 체포되므로 獨立運動(독립운동)이 沈滯(침체)될까 하여 사기를 양양한 것이고 또 그후 발간된 독립신문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취지가 기재되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이다.

(문)    피고가 독립운동에 갈담하게 된 동기는

(답)    본년 2月15日 종로 청년회관에 갔을 때 朴熙道(박희도)가 나를 보고 孫秉熙(손병희)씨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말을 하였고 그후 2月 28日 李甲成(이갑성)에게서도 독립운동에 관한 말을 듣고서 나도 조선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문)    피고는 李甲成(이갑성)에게서 어떠한 말을 들었는가

(답)    나는 李甲成(이갑성)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 동인은 金文珍(김문진)과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것을 의논할 때 金文珍(김문진)으로부터 내가 가장 적당하다는 말을 들은 결과 李甲成(이갑성)은 2月 28日오후 4시경 정동예배당에서 선언서 배부를 나에게 의뢰하므로 나는 이것을 승낙하고 金文珍(김문진)에게서 선언서 1千5百매를 받았다.

(문)    피고가 직접 李甲成(이갑성)과 의논한 일은 없나

(답)    2月 28日 오후 4時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나 말을 들었다.

(문)    그 선언서는 李甲成(이갑성)이가 누구에게 받았다고 하던가

(답)  李甲成은 선언서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묻지도 않았다.

(문)    피고가 金文珍(김문진)의 손을 거쳐 李甲成(이갑성) 받았다는 선언서가 이것인가 (이때 압수한 선언서를 보임)

(답)    그렇다.

(문)    피고는 金文珍(김문진)에게서 받은 1千5百매의 선언서를 어떤 방법으로 배부하였는가

(답)    2月 28日밤에 정동예배당에서 중등학교 6, 7교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각각 분배하였다.

(문)    그때 집합한 자의 성명과 소속학교는

(답)    집합된자의 소속학교는 中央(중앙), 普成(보성), 善隣(선린), 培材(배재), 徽文(휘문), 藥學校(약학교)이고 기타는 알지 못한다.

(문)    그러면 이학생들이 선언서를 시중에 배포하였는가

(답)    그렇다.

(문)    그날밤 이대표자들을 소집한 방법은

(답)    金文珍(김문진)이가 소집하였다.

(문)    각 학교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대표자를 선발하였는가

(답)    그 학교안에서 학생들이 선거하였다.

(문)    각 학교대표자가 한장소에 집합하여 하였는가.

(답)    2月 20日경 勝洞(승동)예배당에 각 전문학교 대표자 일동이 회합하여 孫秉熙(손병희)가 독립운동을 한다하니 우리학생들도 조선민족이니 만큼 묵과할 수 없다 하고 협조하기로 하였다.

(문)    그후 또 회합한 일은 없는가.

(답)    전에 말한바와같이 2月 28日밤 각 전문학교와 각 중학교 대표자에게 선언서를 분배하였을 뿐이다.

(문)    이것을 본 일이있는가 (이때 독립신문이라고 제(題)한 인쇄물을 보임)

(답)    본 일이 없다.

(문)    그대가 재학하는 그 학교장 尹益善(김익선)은 평소 조선족립의 의사를 가르친 일이 있는가

(답)    그러한 일이 없다.

(문)    그대는 이것을 본 일이 있나 (이때 국민대회라고 題(제)한 인쇄물을 보임)

(답)    본 일이 없다.   

(문)    그대는 어째서 조선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였나

(답)    그것은 내가 조선사람이니까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다.

(문)    그대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어떠한 감정을 가졌는가

(답)    총독정치는 日鮮人(일선인)의 차별이 심하므로 나는 불찬성이다.

(문)    그래서 어떠한 수단으로 독립을 하려고 하였던가

(답)    조선사람이 일본정부에 심복되지 않는 것을 보임으로써 독립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문)    그러면 외국인의 손을 거쳐서 독립을 하려고 하였는가

(답)    그런것을 듣지 못하였다.

(문)    그대는 孫秉熙(손병희)와 만난 일이 있는가

(답)    개인적으로는 만나 본 일이 없다.

(문)    무슨 종교를 신앙하는가

(답)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

(문)    그대의 부친의 직업과 종교는

(답)    부친은 8년전에 사망하셨는데 직업은 농업이다.  종교는 신앙하지 않았다.

(문)    그대는 순사에 대하여 말한것과 지금 말한 것이 다르니 어찌된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순사는 지금 같이 상세하게 묻지 않으므로 그저 심문하는 대로 대답하였을 뿐이다.

右被告人(피고인)  姜基德(강기덕)

大正(대정) 8年 4月 17日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 豫審掛(예심괘)

豫審判事(예심판사) 堀眞喜(굴진희)

書記(서기)  渡部眞太郞(도부진태랑)

(문)    姜基德(강기덕)인가

(답)    姜基德(강기덕)이다.

(문)    운동에 참가한 둥등학교의 교명은

(답)    儆新學校(경신학교), 中央學校(중앙학교), 普成高等(보성고등)普通學校(보통학교),  養正高等普通學校(양정고등보통학교), 善隣商業學校(선린상업학교), 藥學校(약학교) 등이다.

(문)    그러면 다른 중등생도의 학교에는 연락을 한 일이 없는가

(답)    먼저 말한 것과 같다.  중등학교는 韓偉健(한위건), 金玉珠(김옥주), 張基兆(장기조)가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문)    학생들끼리 3月 1日 이후 운동할 계획이 있었는가

(답)    각 대표자가 2月 20日경 승동예배당에서 회답하엿을 때 韓偉健(한위건)이 천도교와 야소교도의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우리 학생들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발언하였으나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천도교 야소교측이 돌립선언의 시일을 발표할 때까지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단지 선언서가 발표 된 후의 일이라고 하였다. 2月 28日 정동예배당에서 선언서를 배부할 때 韓偉健(한위건)은 내일 천도교와 야소교의 독립운동에 학생도 시민과 같이 참가하고 또 학생들은 3月 5日 남대문에서 집합하여 독립운동을 하자는 의견을 말하였는데 다른 학생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문)    3月 1日 운동에는 전문학교의 생도는 나오지 않고 중등학교 생도만 참가하였는가.

(답)    그렇지 않다.

(문)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가 牛耳洞(우이동)에 모였던가.

(답)    그런 일은 없으며 한위건이 활동하였다. 나는 박희도에게서 들은 바를 한창식에게 말한즉 또 동인은 韓偉健(한위건)에게 전한 관계로 그 후는 韓偉健(한위건)이가 직접 운동에 관해서 나에게 말하였고 각 대표자는 韓偉健(한위건)과 직접 상담하였다.

(문)    전문학교 대표자중 누가 웅변가인가.

(답)    나는 별로 웅변을 연습하지 않았으나 나와 韓偉健(한위건), 金元壁(김원벽)일 것이다.

(문)    2月 28日 회합에서 3월 1일 독립운동에 대하여 학생측에서는 어찌 하자고 하였는가.

(답)    학생은 될수있는대로 다수 참가하고 선언서는 중등학교 생도를 시켜서 배부하자고 하였으며 별로 계획은 한 일이 없다.

(문)    기타 시중 각처에 貼付(첩부)하여서 시민을 선동할 계획은 없었던가.

(답)    없다.

(문)    국민대회를 아는가.

(답)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문)    이것을 아는가 (이때 압수중 제 1, 2 호를 보임)

(답)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문)    孫秉熙(손병희) 등은 어찌하여 선언서를 발표를 하려고 하던가

(답)    孫秉熙(손병희) 외 32人이 파고다공원에 가서 선언을 하라고 하였다.

(문)    3월 1일에 한 피고의 행동을 자세히 말하여라

(답)    나는 3월 1일의 독립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시중에서 시민들이 독립운동하는 모양을 보고져 남산공원에 올라갔다.

(문)    당일 명월관지점에 간 일이 없는가

(답)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아침 10시경에 金文珍(김문진)이가 찾아와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다고 하더니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하였다고 말하므로 나는 그 변경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날 오후 1시경에 태화관으로 孫秉熙(손병희)를 찾아가서 그 변경한 이유를 물은즉 어떤 사람인지는 기억 나지 않으나 그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말하기를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 반드시 경찰이 와서 우리를 체포할 것이고 따라서 다수 군중이 소요를 할가하여 이곳에서 선언하단고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남산공원으로 가서 등정을 보았다.

(문)    다른 말은 없었는가.

(답)    나는 학생들에게 孫秉熙(손병희)등이 빠고다공원에 와서 독립선언을 하려고 하엿으나 사정상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고 전하였다.  또 빠고다공원에서는 학생만 모여서 독립운동을 하되 불법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학생들에게 이말을 전함과 동시에 학생이 불법행위를 한다면 그 책임을 지게되므로 주의해 줄 것을 바란다고 하고는 그대로 남산공원으로 갔었다.

(문)    그러면 그 독립선언에 있어 군중 가운데 폭행할 자가 있을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각 학교의 대표자가 집합할 때 마다 이 운동에서 절대로 폭행행위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운동에 참가할 사람이 다수이니 만치 어떠한 행동이 있을지 알지 못하였다.

(문)    孫秉熙(손병희) 등도 그런 생각을 가졌던가.

(답)    내가 가서 말할 때에는 폭행하는 행위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므로 만일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가 책임을 진다고 하였다.

(문) 孫秉熙(손병희)등 33인중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답)    내가 孫秉熙(손병희)등 33인이 있는 곳에 갔을 때 각각 말을 함으로 나에게 직접 말한 사람은 孫秉熙(손병희)가 아니고 천도교인이 응대하였다.  그때 孫秉熙(손병희) 등은 상을 한가운데 놓고 그 주위에 둘러 앉아 있었다.

(문)    李申成(이신성)을 그곳에서 만난 일이 없나.

(답)    내가 그곳에서 나올 때 문밖에서 보았으나 별로 말은 없었다.

(문)    孫秉熙(손병희)등이 파고다공원에 오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마음에 불평이 있었다.

(답)    무슨 일로 3월 1일의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답)    먼저 말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문)    그날 그 운동에 참가하면 체포될 것이므로 뒷 날의 운동에 지장이 있을까 하여 참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답)    그런 것은 아니다.

(문)    남산공원에 가서 무엇을 하였는가.

(답)    오후 2시반경까지 정세를 보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문)    孫秉熙(손병희)등이 체포된 것을 언제 알았는가.

(답)    그 이튿날 金文珍(김문진)에게서 들었다.

(문)    3월 2일은 무엇하였나

(답)    병원에 있었다.

(문)    3월 3일은

(답)    3월 3일에 퇴원하여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문)    3월 4일에는

(답)    3월 4일은 하숙집에 있었다.

(문)    3월 5일은

(답)    당일은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운동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인력거를 타고 남대문으로 갔었다.  그때 준비하였던 조선독립이라고 쓴 旗(기)를 들고 남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도로 남대문으로 오면서 만세를 부르던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문)    그때 피고가 가졌던 깃대가 이것인가 (이때 압수증 제 42호를 보임)

(답)    그렇다.

(문)    이것은 그대가 가졌던 기인가(이때 압수증 제 115호를 보임)

(답)   그때 가졌던 것은 4각기인 데 이것은 아니다.

(문)   이것을 아는가(이때 압수증 제118호를 보임)

(답)    그때 현장에서 이런 붉은 수건을 본 일이 없고 경찰에서 처음보았다.

(문)    이것을 아는가. 남대문에서 만세부르자는 삐라는 누가 뿌렸나 (이때 압수증 제 154 호를 보임)

(답)    알지 못한다.

(문)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간 것은 무슨 뜻인가.

(답)    시간이 늦어서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군중을 만나 나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남대문으로 왔었는데 그때 金元壁(김원벽)도 나와 같이 인력거를 타고 군중앞에서 지휘하였다.

(문)    그 장소에 있던 각 학교의 대표자는 누구 누구인가.

(답)    내가 본 것은 金完壁(김완벽)외 에는 혼잡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였다.

(문)    동창생은 누가 왔던가.

(답)    李龍禎(이용정)만 보았다.

(문)    얼마나 모였던가.

(답)    다수이기 때문에 그 수를 알 수 없다.

(문)    崔麟(최린)을 아는가

(답)    우리학교의 선생으로 있어서 안다.

(문)    이운동에 관해서 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한일이 있는가

(답)    계급이 달라서 서로 회견한 일도 없다.

(문)    33인의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을 전부터 아는가

(답)    이름은 들어 알지만 만난 일은 없다.

(문)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에 보았다지

(답)    그렇다.

(답)    독립신문과 기타 인쇄물을 본일은 없는가

(답)    3월 1일 오후에 보았다.

(문)    독립운동과 이태왕전하의 薨去(훙거)와는 관계가 없나

(답)    하등 관계가 없다.

(문)    이태왕전하의 훙거 하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돌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생각하여 보았나

(답)    정의인도로써 독립이 될 것이니 유언비어는 하등 믿을 바가 아니다.

(문)    독립이 되면 어떠한 국체와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

(답)    그것은 독립 후 할 것이므로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현재 20세기에 따라 공화국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    33인 중 누구를 숭배하는가.

(답)    孫(손)선생과 吉(길)선생이다.

(문)    언제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

(답)    합방한 후부터다.

(문)    그 이유는.

(답)    총독정치에 불만이 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교육 기타 조선인 대우등 여러가지에 불합리 한 것이 있는데 첫째 일본서는 경찰제도하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조선은 헌병 제도를 써서 죄가 있고 없고 간에 인민을 확대하고 있고 둘째, 조선에 와 사는 일본인을 내지인이라고 부르며 조선인을 멸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은 식민지 교육을 하여 관리등용 기타 여러 가지에 불평이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세계대세에 순응하여 일본과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서로 원조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被告人(피고인) 姜基德(강기덕)

5-2) 원산 제2독립만세 운동 판결문

다음 同豫審終結書(동예심종결서)를 보면 2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安在燦(안재찬), 李養根(이양근), 李永福(이영복),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金岩壽(김암수), 金演根(김연근), 崔明福(최명복), 鄭學龍(정학용),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張月淵(장월연), 安成連(안성연), 趙權熙(조권희),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黃材弘(황재홍), 權明周(권명주), 梁長福(양장복), 姜東根(강동근), 韓得吉(한득길), 金基石(김기석), 崔文煥(최문환), 徐元泰(서원태), 南相斌(남상빈), 등은 大正 8年 3月以後(3월이후), 鮮內各地(선내각지)에 朝鮮獨立(조선독립)의 示威運動(시위운동)이 勃發(발발)하여 其方法(기방법)으로 多數(다수)의 鮮人(선인)이 群集(군집)하여 朝鮮(조선)獨立(독립)萬歲(만세)를 高唱(고창), 橫行(횡행)하였음을 알고 其趣旨(기취지)에 贊同(찬동)하고 機會(기회)를 노리고 있던 中(중)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等(정도린등), 7名은 大正(대정) 9年 23日 (陰 8月 12日) 夕陽(석양), 元山府(원산부) 南村(남촌)東南(동남)山羊(산양)에서 沐浴(목욕)을 하고 그 歸途(귀도) 同日(동일) 午後(오후) 8時頃(8시경) 附近(부근)南山(남산)아래 新道路(신도로) 長春橋畔(장춘교반) 至(지)하야 崔鍾濱(최종빈) , 金演熙(김연희), 兩名(양명)은 먼저 漢陽歌(한양가)라는 不穩唱歌(불온창가)를 先唱(선창)하고 李容九(이용구)以下(이하) 5名(명)의 被告(피고)역시 이에 和唱(화창)하자 附近一帶(부근일대)의 鮮人多數集合(선인다수집합)하매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의 發意(발의)에 依(의)하야 朝鮮獨立運動方法(조선독립운동방법)으로 獨立(독립)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할 것을 發議(발의)한즉 大衆(대중)은 이에 呼應(호응), 이에 被告7名(피고7명)은 自己等(자기등) 主唱地下(주창지하) 右群衆(우군중)과 같이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連呼(연호), 漸次(점차) 參加(참가)한 數百(수백)의 群衆(군중)을 煽動指揮(선동지휘)하여 同所(동소)에서 西方(서방) 南山橋(남산교)를 넘어 公立(공립)普通(보통)學校(학교) 앞을 지나 劇場(극장) 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 到達(도달)하는 동안의 新道路(신도로)를 驀進(맥진), 꾸준히 喊聲(함성)을 질러 獨立萬歲(독립만세)를 合唱(합창), 獨立(독립)示威運動(시위운동)을 하였고 여기에 나타난 豫審終結書(예심종결서)는 可及的事實(가급적사실)을 宿所穩0(숙소온0)하려고 하였으나 實地(실지)로 數千名(수천명)의 愛國市民(애국시민)들이 獨立(독립)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하면서 堂堂(당당)히 市街行進(시가행진)을 하였던 것이다.  怒濤(노도)와 같이 물결쳐서 示威行進(시위행진) 하며獨立(독립)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하는 南元山市民(남원산시민)의 高喊(고함)과 다불어 各處(각처) 主宰(주재), 끝까지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實現(실현)을 期(기)하고자 直視(직시) 比集團(비집단)에 加入(가입)하야 더욱더 獨立(독립)萬歲(만세)를 絶叫(절규)하여 本來(본래)의 希望(희망)을 達成(달성)시킬 것을 力說(역설), 右群衆(우군중)을 선동 同樂座附近의 群衆(군중)및 其他(기타) 集團(집단)과 같이 自己(자기)의 先唱之下(천창지하)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連呼하여 獨立示威運動(독립시위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元己福(원기복), 安在燦(안재찬), 李養根(이양근), 李永福(이영복),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金源昊(김원호), 李君壽(이군수), 金演根(김연근), 崔明福(최명복), 鄭學龍(정학용),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張月淵(장월연)等(등)은 同夜(동야) 前示(전시) 數百(수백)의 群衆(군중)이 喊聲(함성)을 질러 南山(남산) 麓下(녹하) 新道路(신도로)의 長春橋(장춘교)에서 公立普通學校前(공립보통학교전)을 經由(경유), 同樂座前(동악좌전)에 進行(진행), 同所附近(동소부근)에서 떠들 때 이와 同一行動(동일행동)을 取(취)하고자 該集團(해집단)에 參加(참가)하여 다같이 獨立萬歲(독립만세)를 絶叫(절규)合唱(합창)하여 獨立示威運動(독립시위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黃材弘(황재홍), 權明周(권명주), 梁長福(양장복), 姜東振(강동진), 韓得吉等(한득길등)은 同夜(동야)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 蝟集(위집)한 數百(수백)의 示威運動群衆(시위운동군중)이 新道路附近(신도로부근)에서 或(혹)은 同樂座前方(동악좌전방)의 小路(소로)에서 西方鐵道線路(서방철도선로)로 나가 舊道路踏切地點(구도로답체지점)을 넘어 北村洞(북촌동) 市場(시장) 同警察官(동경찰관) 派出所方面(파출소방면) 一帶(일대)에 밀려 들 때 各自(각자) 이와 同一(동일)한 行動(행동)을 取(취)할 것을 企圖(기도) 順次(순차) 該(해) 集團(집단)에 加擔(가담),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絶叫高唱(절규고창)하여 獨立(독립)萬歲(만세)運動(운동)을 하였고

   이와 같은 生生(생생)한 記錄(기록)에서 當時(당시)의 熾烈(치열)하였던 事實(사실)을 눈앞에 보는 듯하며 여기에 씌어진 鬪士(투사)들의 熱烈(열렬)하였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被告(피고), 金期石(김기석), 崔文煥(최문환), 徐元泰(서원태), 南相斌(남상빈)等(등)은 同夜(동야) 前示(전시) 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 蝟集(위집)한 集團(집단)이 同樂座前(동악좌전)을 빠저 舊道路市街(구도로시가)에 나가 北村洞(북촌동) 警察官派出所前(경찰관파출소전)에 殺到(살도)할 때 모두가 이와 同一(동일)한 行動(행동)을 取(취)하고자 同破出所(동파출소)앞에서 該集團(해집단)에 參加(참가)하여 다같이 朝鮮(조선)獨立(독립) 萬歲(만세)를 高唱連呼(고창연호)하여 獨立示威運動(독립시위운동)을 하였고 이로써 加上(가상) 被告37名(피고 37명)은 政治(정치)의 改革(개혁)을 目的(목적)으로 多數共同(다수공동)의 安寧秩序(안녕질서)를 妨害(방해)하였다.

 

    ‘3被告(제3피고)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長月淵(장월연), 趙權喆(조권철), 姜東根(강동근),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安在燦(안재찬), 李養根(이양근), 鄭鳥升(정조승), 楊仁成(양인성), 崔文煥(최문환),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金東俊(김동준), 金長孫(김장손), 金元輔(김원보), 宋一鳳(송일봉), 等(등)은 大正(대정) 8年以後(8년이후) 鮮內各地(선내각지)에서 鮮人多數集合(선인다수집합)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餘勢(여세)에 便乘(편승)한 騷擾(소요)의 徒(도)가 集團(집단)을 만들어 附近(부근) 面事務所(면사무소) 警察官(경찰관)派出所(파출소) 郵便所及(우편소급) 內地人(내지인) 住家等(주가등)을 襲擊(습격), 暴行(폭행)을 加(가)하여 建物器具等(건물기구등)을 破壞(파괴)한 것을 聞知(문지)하고 있던 中(중) 마침 前記(전기) 9月 23日 (陰 8 月 12日)夜, 南山附近(남산부근)一帶(일대)의 新舊道路上(신구도로상)에 聚合(취합)한 數百(수백)의 鮮人(선인)이 萬歲(만세)를 高唱連呼(고창운호)하여 喧擾(선요)하는 勢(세)에 乘(승)하여 多數(다수)와 같이 跋扈跳梁(발호도양)하며 或(혹)은 警察官(경찰관)派出所(파출소)를 倒壞(도괴)하라 又(우)는 巡査(순사)를 殺害(살해)하고 日本人(일본인)을 追放(추방)하라는 等(등) 高聲喧  唱(고성선창)하며 數隊(수대)로 分類(분류)하여 或(혹)은 同樂座(동악좌)앞에서 或(혹)은 附近小路(부근소로)에서 又(우)는 西方鐵道線路方面(서방철도선로방면)에서 喊聲(함성)을 질러 北村洞(북촌동), 南村洞(남촌동), 上里(상리), 中里(중리), 場村洞(장촌동)의 舊道路(구도로), 市街地(시가지) 各所(각소)에 疾走(질주), 殺到(살도)하여 北村洞(북촌동), 場村洞(장촌동)의 兩警察官派出所(양경찰관파출소), 元山里(원산리) 郵便所(우편소) 及(급) 附近一圓(부근일원)의 日本人商店十數個所(일본인상점십수개소)를 襲擊(습격)하여 或(혹)은 投石(투석) 又(우)는 破壞(파괴)하는 等(등) 尤甚(우심)한 亂暴(난폭) 浪籍(낭적)을 極(극)하여 騷擾(소요)할때,

     被告(피고) 崔鍾濱, 金連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張月燃燈(장월연등)은 前示(전시) 同樂座(동악좌) 附近(부근)에서 모두가 多衆(다중)을 指揮煽動(지휘선동)하며 率先(율선)해서 舊道路(구도로) 市街地(시가지)에 밀려가서 群衆(군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李容九(이용구)는 北村洞(북촌동) 警察官派出所(경찰관파출소)에 被告(피고) 趙起千(조기천), 張月淵(장월연)은 場村洞(장촌동), 派出所(파출소)에 被告(피고) 金連熙(김연희)는 北村洞(북촌동) 場村洞(장촌동) 警察官(경찰관) 派出所及(파출소급) 附近(부근) 日本人(일본인) 商店數軒(상점수헌)에 被告(피고) 金鳳洵(김봉순), 元己福(원기복), 鐵道   (철도) 踏切附近日本人(답체부근일본인) 商店及(상점급) 北村洞(북촌동) 派出所(파출소)에 投石(투석) 建造物(건조물), 器具(기구), 商品等(상품등)을 損壞(손괴)하였고

   以上(이상)의 內容(내용)에서 抗日鬪爭(항일투쟁)의 激烈(격렬)함과 犧牲的(희생적)인 民族愛(민족애)를 可(가)히 窺視(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全貌를 알 수 있다.

    群衆(군중)이 總蹶起(총궐기)하여 警察(경찰)과 郵便所(우편소)와 一人店鋪(일인점포) 襲擊(습격)하고 獨立萬歲(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였으니 이로 同事件(동사건) 規模(규모)가 거창하였고 激甚(격심)하였음을 能(능)히 推察(추찰)할 수 있다.

   ‘被告(피고)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姜東根等(강동근등)은 前示集團(전시집단)에 參加(참가)하여 鐵道附近(철도부근)에서 모두가 群衆(군중)을 이끌고 前方(전방)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 石和房治方(석화방치방)에 投石(투석)하여 同家屋(동가옥) 및 商品等(상품등)을 損壞(손괴)하였고, 被告(피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崔文煥(최문환),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金東俊(김동준), 金長孫等(김장준등)은 前示集團(전시집단)에 參加(참가)하여 北村洞(북촌동) 警察官派出所(경찰관파출소) 附近(부근)에서 群衆(군중)을 이끌고 同破出所(동파출소)에 投石(투석)하여 이를 破壞(파괴)함으로써 群衆(군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金元輔(김완보)는 前示集團(전시집단)에 參加(참가), 群衆(군중)을 이끌고 北村洞(북촌동), 場村洞(장촌동), 兩警察官派出所(경찰관파출소)에 投石(투석) 이를 破壞(파괴)하여 多衆(다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宋一鳳(송일봉)은 右集團(우집단)은 加入(가입) 群衆(군중)에 앞서 北村洞(북촌동) 警察官(경찰관)派出所(파출소) 元山里(원산리) 郵便所(우편소) 附近(부근)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 等(등)에 投石(투석)하여 各建造物(각건조물)을 損壞(손괴)하여 多衆(다중)을 도왔고,

   以上(이상) 被告(피고) 26名은 모두가 多衆(다중)을 集合(집합), 暴行(폭행)과 騷擾(소요)의 極(극)을 敢行(감행)하였으며

   以上(이상) 事實(사실)은 基證憑(기증빙) 10分(10분)으로 第 1 事實中(사실중)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李容喧(이용훤)의 不穩文書著作(불온문서저잘)의 行爲(행위)는 各朝鮮判事令第42條(각조선판사령제42조)로서 刑名(형명)을 變更(경)한 出版法(출판법) 第 11 條(제11조)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로 被告(피고) 金場錫(김장석)의 不穩文書(불온문서)印刷(인쇄)의 行爲(행위)는 前同法(전동법) 第 11 條 (제11조) 第 2 項 (제2항),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에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의 不穩文書(불온문서) 領布(영포)의 行爲(행위)는 前同法(전동법) 第 11 條 (제11조)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에 以上(이상) 被告 3 名 (피고3명)의 安寧秩序(안녕질서)를 妨害(방해)할 目的(목적)의 行爲(행위)는 各大正(각대정)8年制令(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1項(제1항)에 各其該當(각기해당)하며 一個(일개)의 行爲(행위)로서 數個(수개)의 罪名(명)에 저촉되는 바 刑法(형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한)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 手段(수단) 結果(결과)의 關係(관계)에 있어 同法(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後段(후단) 第10條(제10조)를 通用(통용)하고 또한 被告(피고) 金場錫(김장석)에 있어서는 再犯(재범)인 關係(관계)로 同法(동법) 第56條(제56조) 第1項(제1항) 第57條(제57조)를 適用(적용)하고 被告(피고) 李風雲(이풍운)의 不穩文書(불온문서) 印刷幇助(인쇄방조)의 所爲(소위)는 前揭(전게) 出版法(출판법) 第 11 項(제11항),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 刑法(형법) 第62條(제62조) 第1項(제1항)의 安寧(안녕)秩序(질서)의 行爲(행위)는 大正(대정) 8年制令(년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項(제1항) 刑法(형법) 第62條(제62조) 第1項(제1항)에 該當한(해당) 所爲(소위), 저촉되는 點(점)에 있어 同法(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하고 被告(피고) 金秉綸(김병륜), 全聖球(전성구)의 所爲(소위)는 各(각) 大正(대정) 8年制令(년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2項(제2항), 第1項(제1항)에 該當(해당)하고

   여기에서 當時(당시) 萬歲(만세)運動(운동)이 얼마나 激烈(격렬)하였고 廣範圍(광범위)하였음을 알수 있는 同時(동시)에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을 展開(전개)하였음을 눈앞에 보는듯 하다.

   日人들의 銃劍(총검)에 抗拒(항거)하여 맨주먹으로 警察署(경찰서) 郵便局(우편국)등 機關(기관)을 侵襲(침습)하고 日本人(일본인)의 商品(상품)을 不賣(불매)하며 親日派(친일파)를  膺懲(응징)하는 이 快擧(쾌거)야말로 지금 想像(상상)만하여도 痛快無比(통쾌무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日人들은 이러한 愛國者(애국자)들은 그들의 殖民地化(식민지화) 野慾(야욕)을 充足(충족)시키기 위하여 모두 重刑(중형)에 處(처)하였다.  實(실)로 哀痛ater(애통)하기 그지 없는 일이나 이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先驅者(선구자)들은 日帝(일제)의 이러한 暴惡(포악)한 重刑(중형)도 民族(민족)을 위하여 또 이 나라의 獨立(독립)과 主權(주권)을 찾기 위하여 欣然(흔연)ater히 甘受(감수)하였던 것이다.

   다시 日帝(일제)의 豫審(예심)終結(종결)서를 拔萃(발췌)하여 보기로 한다.

   ‘2號(제2호) 37名(37명)의 所爲(소위)는 大正(대정) 8年制令(년제령) 第 7 號(제7호) 第1條(제1조) 第1項(제1항)에 該當(해당)하고 第2被告(제2피고) 26名의 各騷擾(각소요)의 所爲(소위)는 各形法(각형법) 第106條(제106조) 第2號(제2호),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以外(최종현이외) 殘餘被告(잔여피고)22名의 建造物損壞(건조물손괴)의 所爲(소위)는 各同法(각동법) 第2060條(제2060조) 前段(전단)에 各己(각기) 該當(해당)하고 所爲(소위) 2罪名(죄명)에 저촉되매 各同法(각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ater(제1항)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ter를 適用(적용)하고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連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貫(김인관), 姜東根(강동근), 崔文煥(최문환), 張月淵(장월연)에 대하여는 各2罪(명2죄)에 倂發關係(병발관계)로 形法第45條(형법제45條前段第47條(전단제47조),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 處斷(처단)할 各犯罪(각범죄)라고 思料(사료)됨에 刑事訴訟法(형사소송법) 第167條(제167조) 第1項(제1항)에 依(의)한다.

   ‘被告(피고) 李君壽(이군수), 鄭學龍(정학용)은 各前示(각전시) 第3(제3)의 騷擾(소요)에 加擔(가담)하여 電話機(전화기)를 損壞(손괴)하고 警部補(경부보) , 巡査(순사) 4名(명)을 傷害(상해)하고 日本人(일본인) 民家十數戶(민가십수호)에 投石(투석)하여 板戶家具類(판호가구류)를 損壞(손괴)한 바 名公訴事實의 證憑(증빙) 充分(충분)치 않으므로 刑事(형사)訴訟法(소송법) 第165條(제165조) 第1項(제1항)에 依(의)하여 各免訴(각면소)의 言渡(언도)를 내린 것으로되어있다.  여기서 日人警察(일인경찰) 4名(명)을 傷害(상해)하고 日人(일인) 家屋十數戶(가옥십수호)를 破壞(파괴)하였다는 事實(사실)이 仔細(자세)히 들어나있다.

   ‘被告(피고) 崔昌熙(최창희)는 大正(대정) 9年 8月 22日夜(일야) 聚星學校(취성학교) 敎師室(교사실)에서 金章錫(김장석)이 前示(전시) 第1記載(제1기재)의 不穩文書(불온문서)를 印刷(인쇄)하는 情(정)을 알면서 同交備置(동교비치)의 膽寫器具(담사기구) 一切(일체)를 同人(동인)에 貸與(대여) 등사 現場(현장)에서 基印刷(기인쇄)를 도왔으며,

   被告(피고) 朱星極(주성극)은 同月(동월) 23日夜(일야) 金相翊(김상익)에게서 前喝(전갈) 不穩文書(불온문서) 配付(배부)의 依賴(의뢰)를 받고 其情(기정)을 알면서 其中(기중)에서 20-30 枚(매)를 受取(수취), 同夜(동야) 이것을 元山府(원산부) 榮町(영정), 石隅洞(석우동) 附近(부근)의 韓國人商店(한국인상점)에 配付(배부), 被告(피고) 金光甫(김광보), 金德甫(김덕보), 李福童(이복동), 李根植(이근식), 金永柱(김영주), 安述道(안술도), 李鍾坤(이종곤), 崔永範(최영범), 趙達元等(조달원등)은 前示(전시) 第2及(제2급)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하여 建造物(건조물)을 破壞(파괴)한 公訴事實(공소사실),

   被告(피고) 車貴男(차귀남)은 前示(전시) 第2及(제2급)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 또 電話機(전화기)등을 損壞(손괴)하였고 巡寫及(순사급) 警部甫(경부보)等(등)을 傷害(상해)하였으며 民家(민가)에 投石(투석) 板戶及(판호급) 家具類(가구류)를 損壞(손괴)한 事實(사실)

   被告(피고) 朱星極(주성극), 朱仲孫(주중손)은 前示犯行(전시범행)에 加擔(가담)한 事實(사실)의 公訴事實(공소사실)

   被告(피고) 林京洙(임경수)는 前記(전기)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하여 建造物건조물)을 損壞(괴)한 事實(사실)의 訴訟事實(소송사실)은 모두가 其證據(기증거) 不充分(불충분)하므로 刑事訴訟(형사소송) 第165條(제165조) 第1項(제1항)에 依據(의거), 同(동), 被告等(피고등)은 各(각) 免訴(면소) 且(차) 放免(방면)의 言渡(언도)를 할겅이며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이 建造物(건조물)을 損壞(손괴)한 事實(사실)과 巡査(순사), 警部(경부) 補4名(보4명)을 傷害(상해)한 事實(사실)은 證憑(증빙) 不充分(불충분)함으로 右(우)는 同被告等(동피고등) 前喝第3의 所爲(소위)와 一個(일개)의 行爲(행위)로 數罪名(수죄명)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免訴(면소)의 言渡(언도)를 할 것으로 한다.

   이로써 主文(주문)과 如히(여히) 決定(결정)한다.

   大正 9年 12月 2日

   咸興地方法院  元山支廳(원산지청)

   豫審掛(예심괘) 職務代理(직무대리)

   朝鮮(조선)  總督星府判事(총독성부판사)

   山口均四郞(사구균사랑)

   右正本也(우정본야)

   大正(대정) 9年(년) 12月(월) 2日(일)

   咸興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 元山支聽(원산지청)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裁判所書記(재판소서기)

   以上(이상)으로 同豫審終結書(동예심종결서)의 主要部分(주요부분)을 拔萃(발췌)하였거니와 그 內容(내용)을 一瞥(일별)함으로써 熾烈(치열)하였던 抗日鬪爭(항일투쟁)과 元山人士(원산인사)들의 愛國愛族精神(애국애족정신)의 一端(일단)을 窺視(규시)할 수 있다.

   民族獨立(민족독립)을 絶叫(절규)한 第2 獨立萬歲(독립만세) 豫審終結書(예심종결서)寫本(사본)

   大正(대정) 9年 豫(예) 第14號(제14호)

   豫審(예심) 終結書(종결서)

   元山府(원산부) 新村洞(신촌동) 54 番地(번지)

     在籍(재적) 同府(동부) 場村洞(장촌동) 175 番地(번지) 住(주)

     雜貨商業(잡화상업) 新聞通信員(신문통신원)   金相翊(김상익)  8月 14日生 (25年)

   咸鏡南道(함경남도) 德源郡(덕원군) 縣面(현면) 斗小里(두소리) 2番地(번지)

     在籍(재적) 住(주)

   元山靑年會 書記(원산 청년회 서기)  金章錫(김장석)   5月 29日生(일생) (29年)

   元山府場村洞 108番地(원산부 장촌동 108번지)

   在籍(재적) 住(주)

   雜貨商(잡화상)  李容暄(이용훤)  7月 25日生(일생) (29年)

   同府中里 3洞 38番地(동부 중리 3동 38번지)

     在籍 同府 新村洞 90番地 住(재적 동부 신촌동 90번지 주)

     漁業(어업)  金秉綸(김병륜)   9月 17日生 (28年)

   江原道襄陽郡 縣北面 共士面里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공사면리)

     在籍咸鏡南道 德源郡 縣面 斗南里 608番地 住 (재적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608번지 주)

     私塾敎師(사숙 교사)   李鳳雲(이봉운)  3月 24日生 (36年)

   咸鏡南道德源郡 縣面 斗南里 64番地(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 64번지) 

     在籍(재적) 住(주)           

     學校敎師(학교 교사)  崔昌熙(최창희)  8月 19日生  (38年)

   元山府中里 3洞 24番地(원산부 중리 3동 24번지)

     在籍(재적) 住(주)

     雇人(고인) 金聖駿(김성준)    1月 18日生  (24年)

   平安南道(평안남도) 江東郡(강동군)  晶湖面(정호면) 石廩里(석름리)

     在籍元山府 榮町33番地 住 (재적 원산부 영정 33번지 주)

     麵商(면상)  朱星極(주성극)  5月 9日生   (48年)

   元山府(원산부) 場村洞(장촌동) 172 番地(번지)

     在籍(재적) 住㈜

     雜貨商(잡화상)  崔鍾濱(최종빈)   11月 13日生    (20年)

   同府 (동부) 場村洞(장촌동)

     在籍(재적) 同府(동부)  新村洞(신촌동) 192番地(번지) 住(주)

   雇人(고인)   金演熙  7月 23日生  (20年)

   同府(동부) 場村洞(장촌동)

     在籍(재적) 住(주)

     雇人(고인) 李容九(이용구)   8月 22日生  (20年)

   同府場村洞 90番地(동부 장촌동 90번지)

     在籍(재적) 住(주)

     雇人  金鳳洵  6月 6日生  (19年)

   同府中里 4洞 24番地(동부 중리 4동 24번지)

     在籍(재적) 住(주)

     米穀商(미곡상)  趙起千(조기천)  3月 2日生  (20年)

   同府新村洞 50番地(동부 신촌동 50번지)

     在籍住(재적 주)  金聖球  11月 19日生   (19年)

   同府場村洞 223番地(동부 장촌동 223번지) 

     在籍住(재적 주)

      雜貨商(잡화상)  鄭道潾  2月 30日生  (21年)

   同府場村洞 170 番地(동부 장촌동 170번지)

      在籍住(재적 주)

   果實商(과실상)  崔鍾泫(최종현) 8月 23日生  (24年)

   同府中里1洞 3番地(동부 중리1동 3번지)

     在籍同里1洞 3番地(재적 동리1동 3번지)

     雇人(고인) 元己福(원기복)7月 27日生  (22年)

黃海道金川郡 金川面 文明里 206番地(황해도 김천군 김천면 문명리 206번지)

在籍元山府 上洞 31番地 住 (재적 원산부 상동 31번지 주)

代書業 (대서업)  安在燐(안재린) 8月 29日生  (21年)

元山府上洞 55番地(원산부 상동 55번지)

在籍住(재적 주)

紙物業(지물업) 李養根(이양근)1月 16日生  (18年)

咸鏡北道吉州郡 吉城面 吉南里 (함경북도 길주군 길성면 길남리)

在籍 元山府 南村洞 110番地(재적 원산부 남촌동 110번지)

行商(행상) 鄭鳳升(정봉승)6月 18日生  (30年)

元山府南山洞 94番地(원산부 남산동 94번지)

在籍住(재적 주)

自轉車 修繕業 ( 저 전차 수선업)   楊仁成(양인성) 7月 24日生  (23年)

同府(동부) 龍洞(둉동) 19番地(번지)

在籍(재적) 住(주)

牛車夫(우차부)  金源昊(김원호)11月 30日生  (22年)

同府廣石洞 22番地(동부 광석동 22번지)

在籍(재적) 住(주)

雇人(고인)  李君壽(이군수)3月 4日生   (21年)

同府(동부) 龍洞(용동) 18番地(번지)

在籍(재적) 住(주)

雇人(고인)  金演根(김연근)5月 25日生  (27年)

同府南村洞 70番地(동부 남촌동 70번지)

在籍(재적) 住(주)

勞動  崔明福(최명복)2月 5日生  (24年)

同府北村洞 2番地(동부 북촌동 2번지)

在籍(재적) 住(주)

運送業(운송업)  鄭學龍(정학용)8月 20日生 (23年)

本籍不詳(본적불상)

元山府中里 2洞 47番地 住(원산부 중리 2동 47번지 주)

雇人(고인) 趙君弼(조군필)10月 11日生  (18年)

元山府上里 2洞 1番地 住(원산부 상리 2동 1번지 주)

漁商(어상)  宋一鳳(송일봉)2月 20日生 (26年)

咸鏡南道定平郡 春柳面 德興里 180番地(함경남도 정평군 춘류면 덕흥리 180번지)

在籍元山府 龍洞 57番地 住(재적 원산부 용동 57번지 주)

普通學校(보통학교) 5年生(년생)  金元輔(김원보)12月 5日生  (16年)

元山府新興洞 115番地(원산부 신흥동 115번지)

在籍(재적) 住(주)

勞動(노동)  金東俊(김동준)11月 8日生  (19年)

忠淸北道(충청북도)  丹陽郡(단양군) 北面(북면) 龍井里(용정리)

在籍(재적)  元山府(원산부) 上洞(상동) 105番地(번지) 住(주)

擔車業(담차업)  安成連(안성연)8月 23日生  (33年)

元山府(원산부) 中里(중리)  4洞(동)

在籍(재적)  同府(동부)  新村洞(신촌동) 住(주)

擔車業(담차업)  趙權喆(조권철)5月 15日生  (20年)

本籍未詳(본적미상)

 住所未定(주소미정)

元山府上洞 104番地 出生(원산부 상동 104번지 출생)

船乘(선승) 吳昌俊(오창준)1月 29日生 (21年)

咸鏡南道安邊郡 培花面 蟹川里

在籍 元山府 上洞105番地 住

擔車業(담차업) 金仁寬(김인관)生日不詳(생일부상) (21年)

咸鏡南道  安邊郡 鶴城面玉里 164番地

在籍元山府 保光學校 寄宿舍生(재적 원산부 보광학교 기숙사생)

學生(학생)  黃材弘(황재홍)11月 8日生 (16年)

咸鏡南道文川郡 都草面 陵前里 182番地(함경남도 문천군 군초면 릉전리 182번지)

在籍元山府 保光學校 寄宿舍 住 (재적 원산부 보광학교 기숙사 주)

學生(학생) 權明周(권명주)1月 29日生 (18年)

京畿道開城郡 松都面 池町 155番地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지정 155번지)

在籍元山府 南村洞 27番地 住 (재적 원산부 남촌동 27번지 주)

雇人(고인)  梁長福(양장복)  3월3일생 (19년)

元山府上洞 46番地 (원산부 상동 46번지)

在籍(재적)

擔車業(담차업)  姜東根(강동근)8月 26日生 (23年)

咸鏡南道德源郡 赤田面 新豊里 140番地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신풍리 140번지)

在籍元山府 上洞 178番地 住 (재적 원산부 상동 178번지 주)

學生 金基石 (학생 김기석) 3月 29日生  (17年)

元山府北村洞 64番地 (원산부 북촌동 64번지)

在籍住 (재적 주)

漁商(어상)  崔文煥(최문환)4月 26日生 (25年)

元山府南村洞 45番地 (원산부 남촌동 45번지)

在籍住 (재적 주)

漁業  徐元泰 (어업 서원태)3月 15日生 (32年)

元山府南村洞 100番地(원산부 남촌동 100번지)

在籍同府 上理 1洞 161番地 住 (재적 동부 상리 1동 1614번지 주)

會社雇人(회사 고인)  韓得吉(한득길)  12월15일생 (24년)

元山府北村洞 59番地(원산부 북촌동 59번지)

在籍(재적) 住(주)

無職(무직) 金長孫(김장손) 8월23일생 (18년)

元山府場村洞 196番地 (원산부 양촌동 196번지)

在籍(재적) 住(주)

雇人(고인) 金德甫(김덕보)2月 8日生 (23年)

元山府場村洞 196番地 (원산부 양촌동 196번지)

在籍(재적) 住(주)

牛商 (우상) 金光甫(김광보) 3月 2日生 (21年)

仁川府松林洞 225番地(인천부 송림동 225번지)

在籍元山府 場村洞 170番地 住 (재적 원산부 장촌동 170번지 주)

理容業(이용업)  李福連(이복연)3月 24日生 (26年)

元山府新村洞 71番地 (원산부 신촌동 71번지)

在籍住 (재적 주)

普通學校(보통학교) 4年生(년생)  李根植(이근식)12月 23日生 (17年)

咸鏡南道德源郡 赤田面 右水里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우수리)

在籍(재적) 住(주)        金永柱(김영주)12月 20日生

元山府上洞 6番地(원산부 상동 6번지)

在籍住 (재적 주)

鍛冶職 (단야직)  安述道(안술도)3月 12日生 (24年)

元山府新興洞 11番地(원산부 신흥동 11번지)

在籍同府 上洞 124番地 住 (재적 동부 상동 214 번지 주)

理容業(이용업)  李一龍(이일용)8月 25日生(23年)

元山府上洞 153番地(원산부 상동 153번지)

在籍(재적) 住(주)

學生(학생)  崔仲孫(최중손)12月 13日生 (16年)

平安南道安住郡 東面 龍溪里 270番地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용계리 270번지)

在籍元山府 上洞 202番地 住 (재적 원산부 상동 202번지 주)

學生  崔永範(학생 최영범)11月 23日生 (16年)

元山府陽地洞 60번지

在籍住 (재적 주)

行商(행상)  李鍾坤(이종곤)8月 10日生 (29年)

元山府北村洞 11番地(원산부 북촌동 11번지)

在籍同洞 82番地 住 (재적 동동 82번지 주)

果實商(과실상)  林京完(임경완)12月 14日生  (47年)

咸京南道永興郡 德興面 27番地 (함경남도 영흥군 덕흥면 27번지)

在籍元山府 上洞 91番地 住 (재적 원산부 상동 91번지 주)

雇人 (고인) 趙達元(조달원)9月 21日生 (24年)

元山府橋下洞 56番地(원산부 교하동 56번지)

在籍同府 廣石洞 29番地 住 (재적 동부 광석동 29번지 주)

雇人(고인) 南相斌(남상빈)2月 23日生 (34年)

元山府南村洞 22番地 (원산부 남촌동 22번지)

在籍住 (재적 주)

裁縫業(재봉업)  車貴男(차귀남) 9月 11日生 (26年)

元山府楊村洞 163番地(원산부 양촌동 163번지)

在籍  住 (재적 주)

農業(농업) 張月淵(장월연)  6월15일생 (25년)

   (우)에 對(대)하여 騷擾被告(소요피고) 事件(사건)을 通(통)하여 決定(결정)한바 如左(여좌)하다.

主文(주문)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 李鳳雲(이봉운)에 對(대)하여 出版法(출판법) 及(급) 大正8年(대정8년) 制令(제령) 第7號(제7호) 違反事件(위반사건), 被告(피고) 金秉綸(김병륜), 全聖球(전성구), 李永福(이영복), 金源昊(김원호), 金演根(김연근), 李君數(이군수), 黃在弘(황재홍), 權明周(권명주), 鄭學容(정학용), 梁長福(양장복), 金基石(김기석), 徐元泰(서원태), 韓得吉(한득길), 南相斌(남상빈)에 對(대)한 大正8年(대정8년) 制令(제령) 第7號(제7호) 違反事件(위반사건)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에 對(대)한 大正8年(대정8년) 制令(제령) 第 7 號(제7호) 違反(위반) 及(급) 騷擾事件(소요사건)

被告(피고)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元己福(원기복), 安直燐(안직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姜東根(강동근), 崔文煥(최문환), 張月淵(장월연)에 對(대)한 大正8年(대정8년) 制令(제령) 第1號(제7호) 違反(위반) 騷擾(소요) 建造物(건조물) 損壞事件(손괴사건)

被告(피고) 金長孫(김장손)에 對(댛)한 騷擾(소용) 建造物(건조물) 損壞事件(손괴사건) 以上(이상)을 咸興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의 公判(공판)에 附(부)한다.

被告(피고) 李君壽(이군수), 鄭學容(정학용)에 對(대)한 騷擾(소요) 建造物(건조물) 損壞事件(손괴사건) 被告(피고) 南相斌(남상빈)에 對(대)한 騷擾(소요) 電話機(전화기) 損壞 傷害事件(상해사건)에 있어서는 被告等(피고등)을 免訴(면소)함.

被告(피고) 崔昌熙(최창희), 朱星極(주성극), 金德甫(김덕보), 李福連(이복연), 李根直(이근직), 金永柱(김영주), 安述道(안술도), 李一龍(이일용), 崔仲孫(최중손), 崔永範(최영범), 李鍾坤(이종곤), 趙達元(조달원), 林京完(임경완), 車貴男等(차귀남등)은 各其(각기) 免訴(면소)하여 放免(방면)함.

理由(이유)

1 被告(제1피고) 金章錫(김장석)은 大正(대정) 8年 5月 26日 京城覆審法院(경성복심법원)에서 保安法(보안법) 違反罪(위반죄)에 依(의)해 懲役(징역) 1年 6月의 處刑(처형)을 받아 大正(대정) 9年 勅令(칙령) 第210號(제210호)에 依(의)하여 懲役(징역) 9月 24日로 減刑(감형)되어 其(기) 執行(집행)이 完了(완료)되었던바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 金秉綸(김병륜), 李鳳雲(이봉운), 全聖球(전성구)는 모두가 排日思想(배일사상)을 抱懷(포회)한 者(자)로서 大正8年(대정8년) 3月 以後(이후) 線內各地(선내각지)에 朝鮮獨立運動(조선독립운동)을 일으켜 其(기) 方法(방법)으로 獨立思想(독립사상)을  鼓吹(고취) 國憲(국헌)을 紊亂(문난)할 不穩文書(불온문서)를 作成(작성) 配付(배부)하여 民心(민심)을 煽動(선동)     治安(치안)을 妨害(방해)한 것을 聞知(문지)하자 本來(본래)부터 其(기) 趣旨(취지)에 贊同(찬동)하여 이와 同一行動(동일행동)        으로써 朝鮮獨立(조선독립)으로써 朝鮮獨立(조선독립)의 實現(실현)을 其(기)하고자 機會(기회)를 엿보고 있던 中(중)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金章錫(김장석), 李容暄(이용훤)은 大正(대정) 9年 8月中(월중) 米國(미국) 上下議員團(상하의원단)이 同年(동년) 2月 4日頃(일경) 入鮮(입선)함을 聞知(문지) 機會(기회)가 到來(도래)하였다 하여 其(기) 入京(입경)에 앞서 民心(민심)을 煽動(선동)하여 右(우) 議員團(의원단)으로 하여금 朝鮮民族(조선민족)의 獨立希望(독립희망)을 看取(간취)시켜 其(기) 同情(동정)을 求(구)할 것을 企圖(기도)하여 同年(동년) 20日頃(일경) 李容暄房及(이용훤방급) 東亞日報(동아일보) 元山支局等地(원산지국등지)에서 會合謀議(회합모의)의 結果(결과) 各自(각자) 其(기) 擔當(담당) 部署(부서)를 定(정)하고 爲先(위선)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李容暄(이용훤), 兩名(양명)은 同月(동월) 11日 夜(야) 元山府(원산부) 場村洞(장촌동) 175番地(번지)인 金相翊(김상익)의 住所(주소)에서 當該官廳(당해관청)의 許可(허가)없이 上海(상해) 臨時政府(임시정부) 決死隊(결사대) 一同(일동)이란 名稱(명칭)으로 今般(금반) 米國(미국)議員團(의원단) 諸氏(제씨)에게 朝鮮民族(조선민족)의 獨立熱望(독립열망) 程度(정도)를 周知(주지)시켜 即(즉) 韓國獨立(한국독립)을 援助(원조)키 爲(위)하여 8月 24日 入京(입경)함에 吾人(오인) 千萬同胞(천만동포)는 一齊(일제)히 舊起(구기)하여 比一行(비일행)을 歡迎(환영)할 지어다.  그리고 比際(비제) 撒市(살시)치 않는 者(자)는 放火(방화)하며 親日派(친일파)는 殺戮(살육)하고 其(기) 家屋(가옥)을 燒却(소각)하라.  日本(일본) 商品(상품)의 賣買禁止(매매금지), 官公署(관공서)는 破壞(파괴)하라 神(신)은 吾人天賦(오인천부)의 自由(자유)獨立權(독립권)을 保護(보호)한다는 內容(내용)으로 朝鮮獨立(조선독립)의 思想(사상)을 鼓吹(고취)하고 나아가서는 帝國(제국)의 國憲(국헌)을 紊亂(문난)할 趣旨(취지)의 不穩文書(불온문서)를 著作(저작)하여 印刷(인쇄)하게끔 李容暄(이용훤)으로 하여금 미리 購入(구입)해 두었던 米濃百紙(미농백지) 約200枚(약200매)를 翌(익) 22日 東亞日報(동아일보) 原産(원산)支局(지국) 內(내)에서 金場錫(김장석)에게 交付(교부)

被告(피고) 金章錫(김장석)은 同日(동일) 右(우) 不穩文書(불온문서)의 原橋(원교) 及(급) 美濃百紙(미농백지)를 受取(수취)하여 이를 가지고 住所地(주소지) 咸鏡南道(함경남도) 德源郡(덕원군) 縣面(현면) 斗山里(두산리)에 이르러 同面(동면) 斗南里(두남리) 608番地(번지) 李鳳雲方(이봉운방)에서 陰密(음밀)히 同人(동인)에게 依賴(의뢰)하여 右(우) 原文(원문)을 膽寫源紙(담사원지)에 記錄(기록)시켜 同里(동리) 聚星學校(취성학교) 敎師室(교사실)에서 同校(동교) 備品(비품)인 膽寫版(담사판)을 使用(사용) 當該官廳(당해관청)의 許可(허가)없이 右(우) 不穩文書(불온문서) 約180枚(약180매)를 印刷(인쇄)해서 同夜(동야) 이를 前示(전시) 東亞日報(동아일보) 元山支局(원산지국)에 가지고 가서 其(기) 約半數(약반수)를 金相翌(김상익)에게 交付(교부)하고 殘餘(잔여) 全部(전부)를 李容暄(이용훤)에게 交付(교부)하였다.

被告(피고) 金相翌(김상익)은 金章錫(김장석)으로부터 受取(수취)한 前示(전시) 不運(불운) 印刷物(인쇄물) 約7~80枚(매)를 配付(배부)시킬 目的(목적)으로 翌(익)23日(일) 同人(동인) 집에서 交付(교부)받고 被告(피고) 李容暄(이용훤)은 同月(동월) 22日 夜(야) 自宅(자택)에서 金章錫(김장석)으로부터 撒布(살포)함을 目的(목적)으로 前揭(전게) 不穩(불온) 印刷物(인쇄물) 約 80 枚(약80매)를 交付(교부)받아 以上(이상) 被告(피고) 3名(명)은 共同(공동)히 政治(정치)의 變革(변혁)을 目的(목적)으로 安寧秩序(안녕질서)를 妨害(방해)하고자 하였다.

被告(피고) 李鳳雲(이봉운)은 同月(동월) 22日 夕該(석해) 自宅(자택)에서 金章錫(김장석)에게서 同人(동인)이 著作(저작)한 前揭(전게) 不穩文書(불온문서) 膽寫(담사)의 依賴(의뢰)를 받고 該文書(해문서)가 前示(전시)와 같이 朝鮮(조선)의 獨立(독립) 思想(사상)을 鼓吹(고취)하고 帝國(제국)의 國憲(국헌)을 紊亂(문란)할 趣旨(취지)로 記載(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當該官廳(당해관청)의 許可(허가)없이 著作(저작)되었음을 알면서 自宅(자택)에서 이것을 膽寫原紙(담사원지)에 記錄(기록)하여 金章錫(김장석)에게 交付(교부) 同人(동인)으로 하여금 印刷(인쇄)케 하여 治安(치안)을 妨害(방해)할 行動(행동)을 幇助(방조)하였고, 被告(피고) 金秉綸(김병륜)은 同月(동월) 23日 午前(오전) 10時頃(10시경) 上記(상기) 住所(주소)에서 金相翌(김상익)으로부터 前記(전기) 不穩(불온) 印刷物(인쇄물)을 配付(배부)할 것을 依賴(의뢰) 받아 該(해) 文書(문서)가 前示(전시)와 같이 朝鮮獨立(조선독립)의 思想(사상)을 鼓吹(고취) 하여 帝國(제국)의 國憲(국헌)을 紊亂(문난)할 趣旨(취지)의 記錄(기록)이 되어있고 當該官廳(당해관청)의 許可(허가)없이 著作(저작)되었음을 知悉(지실)하면서 約 7,80 枚(약 7,80매)를 受取(수취) 同日(동일) 夕該(석해) 李容暄(이용훤)에게 가서 同人(동인)에게서 封筒(봉통)한태로 同夜(동야) 元山府(원산부) 舊(구) 市街地(시가지)의 海岸通(해안통) 及(급) 同(동) 山水附近(산수부근) 所在(소재)의 韓國人家(한국인가) 約 2,30戶(약2,30호)에 一通式(일통식) 配付(배부)하고 右(우) 被配付者(피배부자) 刻印(각인)으로 하여금 政治變革(정치변혁)을 目的(목적)으로 多數共同(다수공동)의 安寧秩序(안녕질서)를 妨害(방해)시킬것을 煽動(선동)하였고

2 被告(제2피고) 崔鍾濱(최종빈),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李永福(이영복),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李君壽(이군수), 金演根(김연근), 崔明福(최명복), 鄭學龍(정학용),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張月淵(장월연), 安成連(장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黃在弘(황재홍), 權明周(권명주), 梁長福(양장복), 姜東根(강동근), 韓得吉(한득길), 金基石(김기석), 崔文煥(최문환) 徐元泰(서원태), 南相斌(남상빈) 等(등)은 大正(대정) 8年(8년) 3月(3월) 以後(이후) 鮮內各地(선내각지)에 朝鮮獨立(조선독립)의 示威運動(시위운동)이 勃發(발발)하여 基(기) 方法(방법)으로 多數(다수)의 鮮人(선인)이 群集(군집)하여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高唱(고창) 橫行(횡행) 하였음을 알고 其(기) 趣旨(취지)에 贊同(찬동)하고 機會(기회)를 노리고 있던 中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燐等(정도린등) 7名(7명)은 大正(대정) 9年 (9년) 23日 (陰 8月 12日)(음 8월 12일) 夕陽(석양) 元山府(원산부), 南村洞(남촌동), 南山湯(남산탕)에서 沐浴(목욕)을 하고 其(기) 歸途(귀도) 同日(동일) 年後(년후) 8時頃(8시경) 附近南山(부근남산)아래 新道路(신도로) 長春橋畔(장춘교반)에 至(지)하여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兩名(양명)은 먼저 漢陽歌(한양가)라는 不穩唱歌(불온창가)를 先唱(선창)하고 李容九(이용구) 以下(이하) 5名(5명)의 被告(피고) 亦是(역시) 이에 知唱(지창)하자 附近(부근) 一帶(일대)의 韓國人(한국인) 多數(다수)가 集合(집합)하매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의 發意(발의)에 依(의)하여 朝鮮(조선)獨立運動(독립운동) 方法(방법)으로 獨立(독립)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할 것을 發議(발의)한 즉 大衆(대중)은 이에 呼應(호응) 이에 右(우) 被告(피고)  7名(7명)은 自己(자기)等(등) 主張(주장)之下(지하) 右(우) 群衆(군중)과 같이 朝鮮(조선)獨立(독립) 萬歲(만세)를 連呼(연호) 漸次(점차) 參加(참가)한 數百(수백)의 群衆(군중)을 煽動(선동)指揮(지휘)하여 同所(동소)에서 西方(서방) 南山橋(남산교)를 넘어 公立(공립)普通(보통)學校(학교) 앞을 지나 劇場(극장) 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서 到(도)하는 동안의 新道路(신도로)를 驀進(맥진) 꾸준히 喊聲(함성)을 질러 獨立(독립)萬歲(만세)를 合唱(합창) 獨立(독립)示威運動(시위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崔鍾泫(최종현)은 同夜(동야) 數百(수백)의 善人(선인)群衆(군중)이 右(우) 崔鍾濱外(최종빈외) 6名(6명)의 指揮地下(지휘지하)에 前示(전시) 南山橋畔에서 同樂座(동악좌) 附近(부근)에 殺到(살도) 소란을 피울 때 自進(자진)해서 이를 主宰(주재) 끝까지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實現(실현)을 期(기)하고자 直詩(직시) 比集團(비집단)에 加擔(가담)하여 더욱더 獨立(독립)萬歲(만세)를 絶叫(절규)하여 本來(본래)의 希望(희망)을 達成(달성)시킬 것을 力說(역 설) 右(우) 群衆(군중)을 煽動(선동)前記(전기) 同樂座(동악좌) 附近(부근)의 群衆(군중) 및 其他(기타)集團(집단)과 같이 自己(자기)의 先唱之下(선창지하) 朝鮮獨立(독립)萬歲(만세)를 連呼(연호)하며 獨立(독립)示威運動(시위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元己福(원기복),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李永福(이영복),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金源昊(김원호), 李君壽(이군수), 金演根(김연근), 崔明福(최명복), 鄭學龍(정학용),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東俊(김동준), 張月淵(장월연), 等(등)은 同夜(동야) 前示(전시) 數百(수백)의 群衆(군중)이 喊聲(함성)을 질러 南山(남산)麓河(록하) 新道路(신도로)의 長春橋(장춘교)에서 公立(공립)普通(보통)學校(학교) 前(전)을 經由(경유) 同樂座(동악좌) 前(전)에 進行(진행) 同所(동소) 附近(부근)에서 떠들 때 이와 同一(동일)行動(행동)을 取(취)하고자 該(해) 集團(집단)에 參加(참가)하여 다같이 朝鮮(조선)獨立(독립)萬歲(만세)를 絶叫(절규) 合唱(합창)하여 獨立(독립)示威(시위) 運動(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安成連(안성연) ,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黃在弘(황재홍), 權明周(권명주), 梁長福(양장복), 姜東根(강동근), 韓得吉(한득길) 等(등)은 同夜前示(동야전시) 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 蝟集(위집)한 數百(수백)의 示威運動(시위운동) 群衆(군중)이 新道路(신도로) 附近(부근)에서 或(혹)은 同樂座前方(동악좌전방)의 小路(소로)에서 西方(서방)鐵道(철도) 線路(선로)로 나가 舊道路(구도로) 踏切地點(답체지점)을 넘어 北村洞市場(북촌동시장) 同警察官(동경찰관) 派出所(파출소)方面(방면) 一帶(일대)에 밀려들 때 各自(각자) 이와 同一(동일)한 行動(행동)을 取(취)하고자 企圖(기도) 順次(순차) 該集團(해집단)에 加擔(가담) 朝鮮(조선)獨立(독립)萬歲(만세)를 絶叫(절규) 高唱(고창)하여 獨立(독립)示威運動(시위운동)을 하였고,

被告(피고) 金基石(김기석), 崔文煥(최문환), 徐元泰(서원태), 南相斌(남상빈)은 同夜(동야) 前示(전시) 同樂座附近(동악좌부근)에 蝟集(위집)한 集團(집단)이 同樂座前(동악좌전)을 빠녀 舊 道路(구 도로) 市街(시가)에 나가 北村洞(북촌동) 警察官(경찰관) 派出所前(파출소전)에 殺到(살도)할때 모두가 이와 同一(동일)行動(행동)을 取(취)하고자 同 派出所(동 파출소) 앞에서 該(해) 集團(집단)에 參加(참가)하여 다같이 朝鮮獨立萬歲(조선독립만세)를 高唱連號(고창연호)하여 獨立(독립)示威(시위) 運動(운동)을 하였고

이로써 如上(여상) 被告(피고) 37名은 政治(정치)變革(변혁)을 目的(목적)으로 多數(다수) 共同(공동)히 安寧(안녕)秩序(질서)를 妨害(방해)하였다.  第 3 (제3)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全聖球(전성구),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張月淵(장월연),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姜東根(강동근), 吳昌俊(오창준), 金仁坤(김인곤),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崔文煥(최문환), 崔文福(최문복), 趙君弼(조군필), 金東俊(김동준), 金長孫(김장손), 金元輔(김원보), 宋一鳳(송일봉)은 大正(대정) 8年以後(8년이후) 鮮內各地(선내각지)에서 韓國人(한국인)多數(다수)가 集合(집합)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餘勢(여세)에 便乘(편승)한 不逞(부령)의 徒(도)가 集團(집단)을 만들어 附近(부근) 面事務所(면사무소)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 郵便所(우편소) 及(급) 日本人(일본인) 住家等(주가등)을 襲擊(습격) 暴行(폭행)을 加(가)하여 建物(건물) 器具等(기구등)을 損壞(손괴)했음을 聞知(문지)하고 있던 마침 前揭(전게) 9月 23日 (9월 23일) (陰 8月 20日)(음 8월 20일)夜(야) 南山(남산)附近(부근)一帶(일대)의 新(신), 舊(구) 道路上(도로상)에 聚合(취합)한 數百(수백)의 韓國人(한국인)이 萬歲(만세)를 高唱連呼(고창연호)하여 暄擾(훤소)하는 勢(세)에 乘(승)하여 多數(다수)화 같이   跋扈跳梁(발호도양)하며 或(혹)은 警察官(경찰관)派出所(파출소)를 倒壤(도양)하라 又(우)는 巡査(순사)를 殺害(살해)하고 日本人(일본인)을 方追(방추)하라는等(등) 高聲(고성) 暄昌(훤창)하며 數臺(수대)로 分類(분류)하여 或(혹)은 同樂座(동악좌)앞에서 或(혹)은 附近小路(부근소로)에서 又(우)는 西方(서방) 鐵路(철로)線路(선로) 方面(방면)에서 모두가 喊聲(함성)을 질러 北村洞(북촌동) 南村洞(남촌동) 上里(상리) 中里(중리) 楊村洞(양촌동)의 舊道路(구 도로) 市街地(시가지) 各方面(각방면)에 疾走(질주) 殺倒(살도)하여 北村洞(북촌동) 場村洞(장촌동)의 兩(양)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 元山里(원산리) 郵便所(우편소) 及(급) 附近一圓(부근일원)의 日本人(일본인)商店(상점) 十數個所(십수개소)를 襲擊(습격)하여 或(혹)은 投石(투석) 又(우)는 破壞(파괴)하는 等(등) 尤甚(우심)한 亂暴狼籍(난폭낭적)을 極(극)하여 騷擾(소요)할때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演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全聖球(전성구),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張月淵(장월연)은 前示(전시) 同藥座(동악좌) 附近(부근)에서 모두가 多衆(다중)을 指揮(지휘) 煽動(선동)하며 率先(율선)해서 舊 道路(구 도로) 市街地(시가지)에 밀려가서 群衆(군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李容九(이용구)는 北村洞(북촌동)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에 被告(피고) 金演熙(김연희)는 北村洞(북촌동) 揚村洞(양촌동) 兩(양)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 及(급) 附近(부근)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 數軒(수헌)에 被告(피고) 金鳳洵(김봉순) 元己福(원기복)은 鐵道(철도) 踏切(답체) 附近(부근)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 及(급) 北村洞(북촌동) 派出所(파출소)에 投石(투석) 建造物(건조물) 器具(기구) 商品(상품)等(등)을 損壞(손괴)하였고,

被告(피고)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姜東根(강동근)은 前示集團(전시집단)에 參加(참가)하여 鐵道附近(철도부근)에서 모두가 群集(군집)을 이끌고 前方(전방)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 石和房治方(석화방치방)에 投石(투석)하여 同家屋(동가옥) 및 商品(상품)等(등)을 損壞(손괴)하였고,

被告(피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성), 崔文煥(최문환),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金仝俊,(김동준), 金長孫(김장손)은 前示(전시) 集團(집단)에 參加(참가)하여 北村洞(북촌동)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附近(부근)에서 群衆(군중)을 이끌고 同派出所(동파출소)에 投石(투석)하여 이를 破壞(파괴)함으로서 群衆(군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金元輔(김원보)는 前示(전시) 集團(집단)에 參加(참가) 群衆(군중)을 이끌고 北村洞(북촌동) 場村洞(장촌동) 兩(양)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에 投石(투석) 이를 破壞(파괴)하여 多衆(다중)을 도왔고,

被告(피고) 宋一鳳(송일봉)은 右(우) 集團(집단)에 加入(가입) 群衆(군중)에 앞서 北村洞(북촌동) 警察官(경찰관) 派出所(파출소) 元山里(원산리) 郵便所(우편소) 附近(부근) 日本人(일본인) 商店(상점)等(등)에 投石(투석)하여 各建造物(각건조물)을 損壞(손괴)하여 群衆(군중)을 도왔고

以上(이상) 被告(피고) 26名은 모두가 多衆(다중)을 集合(집합) 暴行(폭행)과 騷擾(소요)의 極(극)을 敢行(감행)하였으며 以上(이상)  事實(사실)은 其(기) 證憑十分(증빙십분)으로 第1事實中(제1사실중) 被告(피고) 金相翊(김상익) 李容暄(이용훤)의 不穩文書(불온문서) 著作(저작)의 行爲(행위)는 各(각) 朝鮮(조선) 形事令(형사령) 第42條(제42조)로서 刑名(형명)을 變更(변경)한 出版法(출판법) 第11條(제11조)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로 被告(피고) 金章錫(김장석)의 不穩文書(불온문서)印刷(인쇄)의 行爲(행위)는 前同法(전동법) 第11條(제11조) 第1項(제1항) 第1號(제1호)에 以上(이상) 被告(피고) 3名(3명)의 安寧(안녕) 秩序(질서)를 妨害(방해)할 目的(목적)의 行爲(행위)는 各(각) 大正(대정) 8年制令(년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1項(제1항)에 各其(각기) 該當(해당)하며 一個(일개)의 行爲(행위)로써 數個(수개)의 罪名(죄명)에 저촉 되는 바 刑法(형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 手段(수단) 結果(결과)와 關係(관계)에 있어 同法(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後段(후단)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하고 또한 金章錫(김장석)에 있어서는 再犯(재범)인 關係(관계)로 同法(동법) 第56條(제56조) 第1項(제1항) 第57條(제57조)를 적용하고 被告(피고) 李鳳雲(이봉운)이 不穩文書(불온문서) 印刷(인쇄)幇助(방조)의 所爲(소위)는 大正(대정) 8年 制令(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1項 刑法(제1항 형법) 第62條(제62조) 第1項(제1항)에 該當(해당)한 所爲(소위)로 저촉되는 點(점)에 있어 同法(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하고 被告(피고) 金秉綸(김병륜), 全成球(전성구)의 所爲(소위)는 各(각) 大正(대정) 8年(8년) 制令(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2項(제2항) 第1項(제1항)에 該當(해당)하고 第2號(제2호) 37名(37명)의 所爲(소위)는 各(각) 大正(대정) 8年(8년) 制令(제령) 第7號(제7호) 第1條(제1조) 第1項(제1항)에 該當(해당)하고  第3被(제3피) 告26名(고26명)의 各騷擾(각소요)의 所爲(소위)는 各形法(각형법) 第206條(제206조) 前段(전단)에 各己(각기) 該當(해당)하고,

所爲(소위) 2罪名(죄명)에 저촉 되매 各(각) 同法(동법) 第54條(제54조) 第1項(제1항)  前段(전단)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하고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連熙(김연희), 李容九(이용구), 金鳳洵(김봉순), 趙起千(조기천),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 元己福(원기복), 安在燐(안재린), 李養根(이양근), 鄭鳳升(정봉승), 楊仁成(양인석), 崔明福(최명복), 趙君弼(조군필), 宋一鳳(송일봉), 金元輔(김원보), 金秉俊(김병준), 安成連(안성연), 趙權喆(조권철), 吳昌俊(오창준), 金仁寬(김인관), 姜東根(강동근), 崔文煥(최문환), 張月淵(장월연)에 對(대)하여는 各 2罪(죄)에 倂發(병발) 關係(관계)로 刑法(형법) 第45條(제45조) 前段(전단) 第47條(제47조) 第10條(제10조)를 適用(적용) 處斷(처단)할 各(각) 犯罪(범죄)라고 思料(사료)됨에 刑事(형사)訴訟法(소송법) 第167條(제167조) 第1項(제1항)에 依(의)한다.

被告(피고) 李君壽(이군수) 鄭學龍(정학용)은 各(각) 前示(전시) 第3의 騷擾(소요)에 加擔(가담)하여 建造物(건조물)을 巡査4名(순사4명)을 傷害(상해)하고 民家十數戶(민가십수호)에 投石(투석)하여 板戶家具類(판호가구류)를 損壞(손괴)한 바 各(각) 公訴(공소)事實(사실)의 證憑充分(증빙충분)치 않으므로 刑事(형사)訴訟法(소송법) 第165條(제165조) 第1項(제1항)에 依(의)하여 各(각) 免訴(면소)의 言渡(언도)를 내릴 것으로

被告(피고) 崔昌熙(최창희)는 大正(대정) 9年 8月 22日 夜(야) 居里(거리) 聚星學校(취성학교) 敎室(교실)에서 金章錫(김장석)이 前示(전시) 第1記載(제1기재)의 不穩文書(불온문서)를 印刷(인쇄)하는 情(정)을 알면서 同校(동교) 備置(비치)의 騰寫器具(등사기구) 一切(일체)를 同人(동인)에 貸與(대여) 騰寫現場(등사현장)에서 其印刷(기인쇄)를 도왔으며 被告(피고) 朱星極(주성극)은 同月(동월) 23日 夜(야) 金相翊(김상익)에게서 前揭(전게) 不穩文書(불온문서) 配付(배부)의 依賴(의뢰)를 받고 其情(기정)을 알면서 其中(기중)에서 2,30枚(매)를 受取(수취) 同夜(동야) 이것을 元山府(원산부) 榮町(영정) 石隅洞附近(석우동부근)의 鮮人(선인) 商店(상점)에 配付(배부) 被告(피고) 金光甫(김광보), 金德甫(김덕보), 李福童(이복동), 金根植(김근식), 金永柱(김영주), 安述道(안술도), 李鍾坤(이종곤), 崔永範(최영범), 調達源(조달원)은 前示(전시) 第2及(제2급)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하여 建造物(건조물)을 損壞(손괴)한 公訴(공소)事實(사실) 被告(피고) 車貴男(차귀남)은 前示(전시) 第2及(제2급)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 또한 電話機(전화기)等(등)을 破壞(파괴)하였으며 民家(민가)에 投石(투석) 板戶(판호)及(급) 家具類(가구류)를 損壞(손괴)한 事實(사실) 被告(피고) 朱星極(주성극), 崔仲孫(최중손)은 前示(전시) 犯行(범행)에 加擔(가담)한 事實(사실)의 公訴(공소)事實(사실) 被告(피고) 林京洙(임경수)는 前記(전기) 第3(제3)의 犯行(범행)에 加擔(가담)하여 建造物(건조물)을 損壞(손괴)한 事實(사실)의 公訴(공소)事實(사실)은 모두가 其證據(기증거) 不充分(불충분)함으로 刑事(형사)訴訟法(소송법) 第165條(제165조) 第1項(제1항) 依據(의거) 同(동) 被告(피고) 等(등)은 各免訴(각면소) 卽(즉) 放免(방면)의 言渡(언도)를 할것이며

被告(피고) 崔鍾濱(최종빈), 金聖駿(김성준), 鄭道潾(정도린), 崔鍾泫(최종현)이 建造物(건조물)을 損壞(손괴)한 事實及(사실급) 被告(피고) 張月淵(장월연)은 電話機(전화기)等(등)을 損壞(손괴)한 事實(사실)과 巡査(순사) 警部補(경부보) 4名(4명)을 傷害(상해)한 事實(사실)의 公訴(공소)事實(사실)은 證憑(증빙) 不充分(불충분)함으로 右(우)는 同被告等(동피고등) 前揭(전게) 第3(제3)의 所爲(소위)와 一個(일개)의 行爲(행위)로 數罪名(수죄명)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免訴(면소)의 言渡(언도)를 할것으로 한다.

이로서 注文(주문)과 如(여)히 決定(결정)한다.

   大正(대정) 9年 12月 2日

   咸興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  元山支廳(원산지청)

   豫審掛(예심괘) 職務代理(직무대리) 朝鮮總督府判事(조선총독부판사)

   右正本也(우정본야)

   大正(대정)9年 12月 2日

   咸興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 元山支廳(원산지청)

   朝鮮(조선)總督府(총독부) 裁判所書記(재판소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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