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Map ▒ E-Mail

 

▣ 내고향 원산 > 명승지

         

1. 김 영규

號蒙陰(호몽음), 元山(원산) 上里一洞(상리일동)에서 丁巳年 2月 1日出生 그는 일찍이 退溪(퇴계) 栗谷(율곡)과 같이 大儒學(대유학)으로 일컫는 田良齊(전양제)의 首弟子 (수제자)로서 進士(진사)의 벼슬에 올랐을 뿐 아니라 元山(원산)이 낳은 德望家(덕망가) 로서 新舊兼全(신구겸전)하여 第一普通學校前身(제일보통학교전신)인 第一舍(제일사)를 創立(창립)하여 큰 人物(인물)들을 輩出(배출)시키는데 그 功勞(공로)가 컸다. 

1917年 8月 李垠(이은) 王殿下(왕전하)가 咸興(함흥) 往駕時(왕가시)에 元山(원산)에 들려서 蒙陰先生(몽음선생)을 相面(상면)치 못함은 遺憾(유감)이라는 뜻을 新聞紙上(신문지상)에 發表(발표)하였다.

先生(선생)은 元山府史(원산부사) 編纂委員會(편찬위원회) 委員長(위원장)을 지낸 바 있고 丁丑年(정축년) 7月 2日 81歲(세)로 他界(타계)하였다.

 

2. 강기덕

3.1 運動當時(3.1 운동당시) 48人의 한분이 先生 (선생)은 祖國(조국)의 獨立(독립)을 위하여 數十次 (수십차) 獄苦(옥고)를 겪으면서 日帝(일제)에게 뜻을 굽히지 않고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였다. 官憲(관헌)의 拷問(고문)으로 不具(불구)가 되다 싶이한 先生(선생)은 咸南道民會(함남도민회) 第二代會場(대회장) 으로서 道民會(도민회) 育成(육성)에 努力(노력)하였다. 

先生(선생)은 初代咸南知事(초대함남지사)로 就任(취임)하여 咸鏡南道(함경남도)의 行政(행정)에 努力(노력)한 貢獻 (공헌)이 크며 一平生(일평생)을 祖國獨立(조국독립)을 위하여 一實鬪爭(일실투쟁) 하였다.

 

3. 조정구
先生(선생)은 일찍이 普成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에서 敎鞭(교편)을 잡고 愛國靑年(애국청년)의 養成(양성)은 勿論(물론) 各種(각종) 社會事業(사회사업)을 展開(전개)하던 中 (중) 解放 (해방)을 맞아 越南(월남) 韓民黨(한민당) 黨務部長(당무부장) 및 事務局長(사무국장)을 歷任(역임)하면서 反共運動(반공운동)에 獻身(헌신)하였으며 元山市民會設立(원산시민회설립)에도 功獻(공헌)이 크고 咸鏡南道民會(함경남도민회)를 創立初代會長(창립초대회장)에 選任(선임)되었다.

 

4. 김 성
將軍(장군)은 일찍이 日本(일본) 京都同志社大學(경도동지사대학)에서 西洋學(서양학)을 專攻(전공)하고 海印寺(해인사)에 入山(입산) 3年間(년간) 東洋學(동양학)을 硏究(연구)하였다. 海軍(해군)은 會寧(회령)에서 3.1 萬歲運動(만세운동)을 展開(전개)하다가 滿洲(만주)로 亡命(망명) 滿洲海蔘威等地(만주해삼위등지)에서 金佐鎭(김좌진), 徐一等(서일등), 同志(동지)와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를 組織(조직) 靑山里(청산리) 戰鬪 (전투)에서 副司令官(부사령관)으로 勇名(용명)을 날리었다. 其後(그후) 元山(원산)에 潛入 (잠입) 地下運動(지하운동)을 하다가 被逮(피체) 9年間(년간) 投獄(투옥) 出獄後(출옥후) 元山(원산)에서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 養成(양성)을 目的(목적) 으로 養虎團(양호단)을 組織(조직)하였다. 8.15解放(해방)과 同時越南(동시월남), 民族陣營(민족진영) 의 指導者(지도자)로서 反共靑年運動(반공청년운동)을 指揮(지휘)하였다.

 

5. 김상익

先生(선생)은 己末年(기말년) 8月 美國上下國會議員團(미국상하국회의원단)의 來韓(내한)함을 契機(계기)로 元山(원산)에서 第2次(제2차) 萬歲運動(만세운동)을 展開(전개)하여 抗日鬪爭(항일투쟁)을 하다가 投獄(투옥), 出獄後(출옥후) 元山(원산)에서 靑年運動(청년운동)을 비롯 各種(각종)社會運動(사회운동)을 벌려 始終如一(시종여일)하게 民族(민족) 自主獨立精神(자주독립정신)을 發揚(발양)하였으며 8.15解放後(해방후) 越南(월남),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를 創立(창립)할 때 功獻(공헌)이 크다.

 

6. 이용신

鑛業界(광업계)에서 名望(명망)이 높았고 地下資源開發(지하자원개발)에 크게 寄與(기여)한바 있는 先生(선생)은 自身(자신)이 經營(경영)하였던 戊山鑛山(무산광산)에 養虎團長(양호단장)이엇던 先生(선생)은 信託統治反對運動(신탁통치반대운동)에 큰 業績(업적)을 남겼으며, 反共鬪爭(반공투쟁)에 있었어도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을 하여 民主國家建設(민주국가건설)에 貢獻(공헌)한 바 크다. 또 先生(선생)은 1947年 3月 1日 泰和館(태화관)에 3.1 獨立運動指導者(독립운동지도자)였던 33人中(인중)에서 生存(생존)해 있는 분들을 招請(초청)하여 크게 宴會(연회)를 베풀고 그들에게 金指環(김지환)을 선사하여 萬場(만장)을 感激(감격)시킨 바 있다. 

元山市民會會長(원산시민회회장)이였던 先生(선생)은 元山人(원산인)의 盡力(진력)하여 市民會(시민회)의 發展(발전)에 많은 功績(공적)을 남겼다.

 

7. 남상옥
學生時節(학생시절)부터 獨立思想(독립사상)과 抗日民族精神(항일민족정신)이 强(강)하였던 先生(선생)은 弱冠(약관)으로 自由勞動組合(자유노동조합), 黑友會(흑우회) 組織(조직)과 元山靑年會(원산청년회) 再建(재건) 등에 눈부신 活躍(활약)을 하였으며 元山埠頭勞動者(원산부두노동자) 總罷業(총파업)을 計劃(계획), 指揮(지휘)하였을 뿐 아니라 海外(해외)의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들과 秘密裡(비밀리)에 連絡活動(연락활동)하다가 被檢投獄(피검투옥)되어 갖은 拷問(고문)을 當(당)하였다. 

當時(당시)의 抗日鬪爭(항일투쟁)으로 因(인)하여 檢擧投獄(검거투옥)된 愛國鬪爭(애국투쟁)의 事件(사건)이 朝鮮(조선), 東亞(동아) 등 新聞(신문)에도 報道(보도)되었다. 

先生(선생)은 日本(일본) 官憲(관헌)들의 모진 迫害(박해)와 投獄(투옥) 拷問(고문)에도 屈(굴)하지 않고 오직 祖國(조국)과 民族(민족)을 爲(위)하여 始終一貫(시종일관) 빛나는 獨立運動(독립운동)에 대하여 論議後(논의후) 歸國(귀국) 계속 抗日鬪爭(항일투쟁)과 靑年指導(청년지도)에 獻身(헌신)히얐단 愛國鬪士(애국투사)였으며, 8.15 解放(해방)과 더불어 反共運動(반공운동)의 第1線(제1선)에서 鬪爭(투쟁)하다가 越南(월남)하였다. 

越南後(월남후) 民族陣營(민족진영)의 幹部(간부)로서 對空鬪爭(대공투쟁)을 계속했고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樹立(정부수립)에도 貢獻(공헌)한 바 크다. 方鄕友(방향우)들의 融化團結(융화단결)에 항상 努力(노력)했을 뿐 아니라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의 育成發展(육성발전)에도 寄與(기여)한 바 크다.

 

8. 김대욱

先生(선생)은 서울에서 測量講習所(측량강습소)를 卒業 (졸업), 數年間(수년간) 官職(관직)에 있었으나 뜻을 民族(민족) 獨立(독립)에 두고 官職 (관직)을 뿌리침과 同時(동시)에 元山勞動會(원산노동회)를 創立(창립) 常務理事(상무이사)로 勞動者(노동자)의 權益向上(권익향상)을 目的(목적)으로 釜山(부산), 仁川(인천), 等地 (등지)의 埠頭(부두) 勞動者 (노동자) 爭議(쟁의)를 計劃(계획)하였으며 또한 獨立運動者(독립운동자)에게 資金調達(자금조달)을 함이 發覺(발각)되어 新義州(신의주) 刑務所(형무소)에 投獄(투옥) 獄苦(옥고)를 치른 後(후) 1929年 元山(원산) 埠頭(부두) 勞動者(노동자) 罷業事件(파업사건)에 參列(참렬)하였다.

8.15 解放(해방)과 同時(동시) 元山地方(원산지방) 歸屬財産處理(귀속재산처리)委員長(위원장)에 추대 되었다.

 

9. 남성우
先生(선생)은 普成專門法科(보성전문법과)를 卒業(졸업)후 그 뜻을 獨立(독립)의 役軍養成(역군양성)을 目的(목적)으로 德源(덕원)에 韓人中學(한인중학)을 創立(창립)하였고 愛國者(애국자) 李東輝(이동휘), 安昌浩諸氏(찬창호제씨)와 交遊(교유)하던 中(중) 韓日合邦(한일합방) 이되자 露領海蔘威(노령해삼위)로 亡命(망명),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 先生(선생)은 上海臨政(상해임정)을 韓國本土(한국본토)가까이 두자고 力說(역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北京(북경)으로 中國(중국)革命(혁명)指導者(지도자) 孫文先生(손문선생)을 찾아 協議(협의)끝에 韓國人武官學校(한국인무관학교)를 設立 (설립), 海外 (해외)는 勿論(물론) 國內(국내)에서 秀材(수재) 靑年(청년)을 募集(모집) 많은 人才(인재)를 養成(양성)하였다. 

先生(선생)은 아깝게도 36歲(세)를 一期(일기)로 北京(북경)에서 逝去(서거)하셨다.

 

10. 김연찬
抗日精神(항일정신)이 强(강)하였던 先生(선생)은 日帝時(일제시) 모든 官職(관직)을 물리치고 元山(원산)의 産業發展(산업발전)에 努力(노력)하면서 海外(해외)에서 民族(민족)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는 獨立鬪士(독립투사)에게 秘密裡(비밀리)에 獨立運動(독립운동)資金(자금)을 提供(제공)한 事實(사실)이 日本(일본) 官憲(관헌)에게 發覺(발각)되어 獄苦(옥고)를 겪었다. 出獄後(출옥후) 育英事業(육영사업)에도 많은 貢獻(공헌)이 있었다.

 

11. 이용위
李始榮先生(이시영선생)이 新興(신흥)軍官(군관)學校(학교)를 創立(창립)할 때 資金(자금)을 提供(제공)하였으며 繼續(계속)하여 軍官養成(군관양성)에 所要(소요)되는 資金(자금)을 調達(조달)코자 元山(원산)을 비롯한 江原道(강원도) 一帶(일대)에서 募金(모금)活動(활동)을 하다가 咸興憲兵隊(함흥헌병대)에 逮捕 (체포)되어 모진 拷問(고문)끝에 出獄後(출옥후) 死亡 (사망)하였다.

 

12. 김경준
先生(선생)은 元山府(원산부) 五線議員(오선의원)으로서 元山(원산)의 都市發展(도시발전)에 크게 寄與(기여)하였고 또한 1909年에 發足(발족)한 學校批評議會(학교비평의회) 議員(의원)으로서 公選(공선)되어 第2 普通學校(제2 보통학교)와 海星學校(해성학교) 設立(설립)을 爲始(위시)하여 育英事業(육영사업)에 貢獻(공헌)이 컸으며 元山體育會會長(원산체육회회장)을 歷任(역임)한 바 있는 先生(선생)은 體育向上(체육향상)에 努力(노력)하여 體育界(체육계)를 빛낸 바 있다. 韓興根(한흥근), 文武術等(문무술등)과 交友(교우)하면서 獨立運動(독립운동)資金(자금)도 提供(제공)한 바 있었다.

 

13. 최길호
1891年 元山(舊德源郡 縣面 星羅里) 원산(구덕원군 현면 성라리) 出生(출생) 弱冠 (약관)으로 德齊(덕제) 康基德 (강기덕)과 함께 上京 (상경)하여 民族運動(민족운동)에 參加(참가), 이 나라의 獨立運動(독립운동)에 많은 貢獻(공헌)을 하였고, 歸鄕後(귀향후) 育英事業(육영사업)에 投身(투신), 德明(덕명), 明星兩學校(명성양학교) 設立者(설립자)로 後輩(후배) 養成(양성)과 地方文化發展(지방문화발전)에 專念中(전념중) 8.15를 當(당)하여 共産徒黨(공산도당) 에게 追放 (추방)되어 越南(월남)하였다가 6.25에 拉北(납북)되었음.

 

14. 이용욱
大成中學(대성중학) 第1回(제1회) 卒業生(졸업생)으로 安重根(안중근), 禹德淳(우덕순) 兩義士(양의사)와 더불어 伊藤傳文(이등전문) 暗殺謀議(암살모의)에 加擔(가담)하였던 바 安義士(안의사)의 伊藤暗殺後(이등암살후) 그 加擔(가담)事實(사실) 이 發覺(발각)되자 露西亞(로서아)로 亡命(망명)하여 盧伯0將軍(노백0장군)과 함께 西伯利亞(서백이아)에서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였다.

 

15. 한응근
先生(선생)은 뜻을 恒常 (항상) 祖國光復(조국광복)에 두고 있던 中 (중) 故姜宇奎義士(고강우규의사)와 더불어 日人總督(일인총독) 齊藤(제등)을 暗殺(암살) 코자 活躍(활약)하다 夫遂(부수)에 그치고 1921年 4月 中旬頃(중순경) 海蔘威(해삼위) 新浦村(신포촌)에서 이미 派遣(파견) 되어있던 元山警察署(원산경찰서) 朝鮮人刑事(조선인형사) 石達浩(석달호)에게 逮捕(체포)되어 元山(원산)에 護送(호송) 豫審(예심)을 거쳐 京城(경성) 覆審法院(복심법원)에서 懲役8年刑(징역8년)을 받았고 出獄後(출옥후) 계속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였음.

 

16. 이홍준

先生(선생)은 弱冠(약관) 23 歲(세)의 靑年(청년)으로서 뜻을 祖國(조국)光復(광복)에 두고 滿洲(만주)로 亡命(망명) 吉林省(길림성) 師範(사범)學校(학교)에서 敎鞭(교편)을 잡고 愛國(애국)靑年(청년)과 獨立軍(독립군)을 養成(양성)하는 한편 1919年(년) 3.1 萬歲(만세)運動(운동)을 指揮(지휘)하다가 間 島政井(간도정정)에서 日警(일경)에 被逮(피체) 仁川(인천)에서 2年間(년간) 獄苦(옥고)를 치른바 있고 8.15 解放(해방)과 同時(동시) 越南(월남)하여 臨時龍府(임시용부) 內務部長(내무부장) 申翼熙(신익희)의 밑에서 次長(차장)으로 民族陣營(민족진영)의 大同團結(대동단결)을 爲(위)하여 活躍(활약)하였다. 李承晩(이승만), 金九 等(김구 등) 諸領導者(제령도자)를 推載(추재)하고 大韓獨立(대한독립) 促成國民會組織(촉성국민회조직)에 그 功勞(공로)가 크다.

先生(선생)은 6.25 釜山避難時(부산피난시) 元山市民會長(원산시민회장)에 被選(피선)되어 元山市民會(원산시민회) 發展(발전)에 功勞(공로)가 많다.

 

17. 이용훤
抗日(항일)精神(정신)이 强(강)했던 先生(선생)은 3.1 運動(운동)의 眞相(진상)을 調査(조사)코자 內國(내국)한 美國會議員(미국회의원)에게 韓民族(한민족) 自主獨立(자주독립)의 正當性(정당성)과 3.1 萬歲(만세)운동에 대한 日本(일본)帝國(제국) 主義(주의)의 殘虐性(잔학성)을 폭로한 報告書(보고서)를 作成(작성)하고 日人(일인)들의 遂出(수출)을 爲(위)하여 生命(생명)을 걸고 鬪爭(투쟁)한 元山(원산)의 水菊鬪士(수국투사)였고 元山 第2萬歲運動(제2만세운동) 8月 事件(사건)의 主謀者(주모자)의 한분으로 投獄(투옥)되어 拷問致死(고문치사) 當(당)하다.

 

18. 문무술
先生(선생)은 그 性品(성품)이 剛直(강직)하고 愛國(애국)精神(정신)이 남달리 뛰어나 海蔘威(해삼위) 居住(거주)의 南性佑(남성우) 및 趙炳喆(조병철)과 더불어 武力(무력)으로써 大韓(대한)獨立(독립)을 圖謀(도모)하여 爆彈(폭탄)을 海蔘威(해삼위)로부터 運搬(운반) 擧事前(거사전) 發覺(발각)되었으며 上海臨政(상해임정)에 資金(자금)을 調達(조달)코자 서울에서 活躍(활약)하다가 被逮(피체) 7年의 獄苦(옥고)를 치렀으며 8.15 解放(해방)과 同時(동시) 越南(월남) 大韓民國(대한민국)政府(정부)樹立(수립)直前(직전)의 立法(입법)議員(의원)에 被選(피선) 民族(민족)運動(운동)에 獻身(헌신)함이 현저하다.

 

19. 안대벽
先生(선생)은 篤實(독실)한 基督敎人(기독교인)으로서 일찍이 在美時(재미시)부터 李承晩博士(이승만 박사)와 더불어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한일이 있으며 元山(원산)에 돌아와서는 東亞(동아)基督敎會(기독교회) 主管牧師(주관목사)로서 宗敎(종교)運動(운동)뿐 아니라 排日民族思想鼓吹(배일민족사상고취)에 專念(전념)하였다.

 

20. 최자남
第4大朝鮮總督(제4대조선총독)으로 赴任(부임)하는 日人總督(일인총독) 齊藤實(제등실) 海軍大將(해군대장)을 殺害(살해)코저 海蔘威 (해삼위)로부터 民國元年(민국원년) '己末年(기말년)' 6月 11日 着元(착원) 上洞所在自宅(상동소재자택)에서 滿2個月 (만2개월)을 經過(경과)하여 同年(동년) 8月 14日 元山(원산)을 떠나 上京(상경)하였다. 

그 後(후) 姜義士(강의사)와 더불어 爆彈(폭탄)을 투적하고 姜義士(강의사)와 同時(동시)에 逮捕(체포)되어 民國2年(민국2년) 庚申(경신) 2月 26日 京城高等法院(경성고등법원) 에서 3年刑(년형)을 받았다.

 

21. 안돈우
趙炳喆(조병철), 文武術等(문무술등) 同志(동지)와 武力蜂起 (무력봉기)를 圖謀(도모)하다 失敗(실패)하고, 海蔘威(해삼위)로 亡命中 (망명중) 1921年 5月 中旬頃(5월 중순경) 元山 警察署(원산경찰서) 石達浩刑事(석달호형사)에게 海蔘威(해삼위)에서 逮捕(체포)되어 元山(원산)에 護送(호송) 豫審(예심)을 거쳐 京城覆審法院(경성복심법원)에서 趙炳喆(조병철)과 受刑(수형) 服役後(복역후) 南性佑(남성우)와 建立(건립)한 北京(북경)軍官(군관)學校(학교)에 留學(유학) 其後(기후) 海蔘威(해삼위)에 돌아가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하다가 死亡(사망)하였다.

 

22. 이용구
先生(선생)은 3.1 獨立運動(독립운동)에 이어 일어난 元山 第2萬歲事件(원산 제2만세사건)때 行動(행동)隊長(대장)으로써 隊員(대원)을 이끌고 警察官(경찰 官公署(관공서)等(등) 破壞(파괴)하는데 先鋒(선봉)되어 抗日(항일)鬪爭(투쟁)을 敢行(감행)하여 大韓(대한)獨立(독립)萬歲(만세)을 絶叫(절규)하다가 投獄(투옥)되었다. 

先生(선생)은 出獄後(출옥후) 民族(민족)의 解放(해방)을 爲(위)하여 國外(국외)로 亡命(망명)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였다.

 

23. 김병오
先生(선생)은 培誠學校(배성학교) 校長(교장)으로 己末(기말) 獨立運動(독립운동)當時(당시) 元山 地方(원산지방) 3.1 獨立萬歲蜂起事件(독립만세봉기사건)의 指揮者(지휘자)로서 愛國運動(애국운동)의 先頭(선두)에 서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많은 貢獻(공헌)을 남겼다. 또 元山埠頭勞動者(원산부두노동자) 罷業事件當時(파업사건당시)에도 그 紛爭解決(분쟁해결)에 努力(노력)한 바 크다. 先生(선생)은 民族獨立(민족독립) 을 위하여 投獄(투옥) 當(당)한바 있고 敎育者(교육자)로서 功勞(공로) 또한 크다.

 

24. 황덕환
(咸南(함남) 元山出身(원산출신)으로 63年 3月 1日 建國功勞(건국공로)훈장 단장추서) 
1919年 上海(상해)로 亡命(망명), 臨時政府 (임시정부) 軍資金(군자금)을 調達(조달)키 위해 入國(입국)하다가 釜山港(부산항)에서 체포된 후 大邱(대구)에서 3年(3년)징역 출옥후 新民府軍政委員會(신민부군정위원회) 別動隊長(별동대장)으로 活躍(활약), 1924年 9月 日本(일본)의 앞잡이 海林朝鮮民會長(해림조선민회장) 裵斗山(배두산)을 교살했다. 1926年 9月 '하르빈'에서 武器(무기)를 購入(구입)東部(동부)로 운반하다가 官憲(관헌)에 체포되어 大連(대연)으로 抽送(추송), 無期刑(무기형)을 宣告(선고)받고 旅順(여순)감옥에서 복역中 日人看守(일인간수)를 他殺(타살) 1929年(년) 9月 死刑(사형)을 당했다.

 

25. 정명리
篤實(독실)한 基督敎人(기독교인)으로서 3.1 運動(운동)當時(당시) 獨立(독립)鬪爭(투쟁)의 先頭(선두)에 서서 活動(활동)하다가 投獄(투옥)되었다. 淸廉潔白(청렴결백)한 先生(선생)은 一生(일생)을 傳道(전도)와 愛國(애국)運動(운동)으로 바쳤다.

 

26. 정춘수

先生(선생)은 일찍이 救國(구국)의 뜻을 품고 海外(해외)로 가던途中(도중) 元山(원산)에 들렀다가 偶然(우연)히 美國(미국)宣敎師(선교사)를 만나 入校(입교)하여 南村洞(남촌동)에 있는 南監理敎(남감리교)의 牧師(목사)가 되어 宣敎(선교)와 同時(동시 民族(민족)精神(정신)을 鼓吹(고취)하는데 餘念(여념)이 없었다. 

그 後 (후) 44歲(세)의 弱冠(약관)으로 33人中(인중)의 한사람으로 參加(참가)하였다가 1年 6月刊(월간) 服役(복역) 出獄後(출옥후)에도 繼續(계속)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하던 中 (중) 興業俱藥部(흥업구악부) 事件(사건)으로 被檢(피검)

 

27. 박희병
先生(선생)은 德原出生(덕원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뜻을 祖國(조국)自主獨立(자주독립)에 두었으며 또한 人才(인재)養成(양성)에 着眼(착안)하여 日帝時(일제시) 五山(오산)中學校(중학교)에서 敎鞭(교편)을 잡은바 있으며 6.25 釜山避難時(부산피난시)에는 故鄕(고향)元山(원산)의 젊은 避難 學徒(피난학도)들을 爲(위)하여 明沙中學(명사중학) 設員委員(설원위원)으로 敎育(교육)에 盡刀(진도)한바 있으며 또한 文敎部(문교부) 普通(보통)敎育(교육)局長(국장) 又(우)는 奬學官(장학관)에 在職(재직)하면서 大韓民國(대한민국) 敎育界(교육계)에 남긴 바 貢獻(공헌)이 클뿐아니라 先生(선생)의 母校(모교)인 五山中高等學校(오산중고등학교)를 設立(설립), 校長(교장)에 就任(취임)하여 平生(평생)을 敎育(교육)事業(사업)에 獻身(헌신)하였다.

 

28. 박근원
先生(선생)은 京城普成中學(경성보성중학)을 卒業(졸업), 韓國(한국)이 日本(일본)에 强占當(강점당)하던 해에 비분강개하여 北間島(북간도)에 亡命(망명)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加擔(가담)한 바 있다. 

李儁(이준) 烈士(열사)가 和蘭首都(화난수도) 헤-그 世界(세계)平和會義(평화회의)에서 自決(자결)한 後(후) 그의 令息(령식) 이용이가 滿洲(만주)로 亡命 (망명)의 길을 떠날 때 元山(원산)에 와서 朴根遠宅(박근원댁)에 숨었었고 여러 憂國志士(우국지사)들과 謀議(모의)한 事實(사실)이 日警(일경)에 發覺(발각)되어 이용이는 元山(원산)을 脫出(탈출), 無事(무사)히 滿洲(만주)로 갔으나 朴根遠(박근원)은 日警(일경)에 逮捕(체포)되어 오랜 時日(시일) 獄苦(옥고)를 치렀다.

 

29. 조병철
號(호) 春城(춘성) 日帝侵略(일제침략)의 元兇(원흉)인 齊藤總督(제등총독)을 暗殺(암살)코자 海蔘爲 (해삼위)에서 爆彈(폭탄)을 秘密裡(비밀리)에 入手(입수)運搬(운반)하여 廣石洞(광석동)에 埋臧(매장)하여 두었다가 擧事卽前(거사즉전)에 發覺(발각) 逮捕(체포)되어 獄苦(옥고)를 겪었다. 이 事實(사실)은 당시 日刊新聞(일간신문)에 特報 (특보)되어 그 熱烈(열렬)한 愛國(애국)鬪志(투지)가 世上(세상)을 驚愕(경악)시켰다. 또 3.1 運動當時(운동당시) 에는 獨立(독립)萬歲(만세)를 외치는 群衆(군중)을 指揮(지휘)하였으며 그 뒤 愛國(애국)靑年(청년)을 指導(지도)育成(육성)한 功勞(공로)가 컸고, 거듭된 獄中(옥중)生活(생활)과 惡辣 (악랄)한 拷問(고문)에도 굽힐 줄 모르고 一貫(일관)된 民族(민족)精神(정신)과 獨立運動(독립운동)을 계속한 鬪士(투사)였다.

 

30. 김병규
先生(선생)은 弱冠(약관)으로 民族(민족)獨立(독립)을 위해 北間島 (북간도)에 亡命 (망명)하여 獨立(독립)運動者(운동자)들과 더불어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加擔(가담)하였고 間島(간도) 日本(일본)領事館職員(영사관직원)으로 僞裝(위장)勤務(근무)하면서 日帝 (일제)의 秘密文書(비밀문서)를 ?取(절취) 그 寫本(사본)을 作成(작성)하여 獨立軍(독립군)과 獨立(독립)運動者(운동자)들에게 提供(제공)하는 피눈물나는 鬪爭(투쟁)을 展開(전개)하다가 드디어는 日本(일본)官憲(관헌)에게 발각되어 逮捕(체포), 銃殺刑(총살형)을 받고 執行?前(집행즉전)에 奇蹟的(기적적)으로 脫出 (탈출)에 成功(성공)하여 海蔘威(해삼위)로 逃避(도피) 했다. 

先生(선생)은 海蔘威 (해삼위)에서 저 有名(유명)했던 元山(원산)에서의 抗日(항일)武裝蜂起(무장봉기)準備(준비)爆彈(폭탄)事件(사건)의 密入運搬(밀입운반)에 主動的(주동적) 役割(역할)을 했다. 그는 一平生(일평생)을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獻身(헌신)하는 동안 數次(수차)에 걸쳐 投獄(투옥)되었다. 그리고 그 婦人(부인) 金弘淳(김홍순)女史(여사)도 夫君(부군)을 도와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協調的(협조적) 役割(역할)을 다하였다. 秘密文書(비밀문서)의 連絡(연락)은 勿論(물론)이요 獨立(독립)運動者(운동자)들과 連結(연결)을 맺고 東奔西走(동분서주) 鬪爭(투쟁)하였다.

 

31. 홍종우
先生(선생)은 己末獨立(기말독립) 運動(운동)이 蜂起(봉기)된 後(후) 뜻을 祖國(조국) 光復(광복)에 두고 滿洲(만주)로 亡命(망명) 同志(동지)를 糾合(규합) 義烈團(의열단)을 組織(조직) 南北(남북) 滿洲(만주)를 舞臺(무대)로 各種(각종)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하는 一方(일방) 韓國內(한국내)에 潛入(잠입) 獨立運動(독립운동) 資金募集(자금모집) 等(등) 多方面(다방면)으로 活躍中(활약중) 1924年 黃鈺氏(황옥씨)와 같이 서울에서 日警(일경)에 逮捕(체포)되어 受刑五年(수형오년).

 

▒ 원산시민회 (우)02622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고미술로 100 (송화빌딩 405호). TEL (02) 2245-1106, FAX (02) 2216-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