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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 (가제)

 
작가 고 은     

송도원은 원산시 북서쪽 해안에 있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 휴양지다. 동해의 깨끗하고 푸른 파도, 넓게 자리잡은 백사장, 거기에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해당화와 수령 7백년에 이르는 송림들이 어우려서 그림 같은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그 남동쪽으로는 갈마반도의 명사십리 등 아름다운 모래밭이 수십리나 이어진다.

---- 고 은 -----

해 거름해변에
당 신이 떠난 자리.
화 편이 한닢두닢..
바 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명사십리는 잠이 들고

근대의 명제는 우리에게 독립이었다. 그런데 그 독립이 자칫하면 오늘의 명제인 연대(聯帶)에 대한 고립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 식대로 살자’는 북한의 자존심에 저으기 연민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인가. 어느덧 원산에 이르렀다.

야거리 한 척에 평생을 다 보내는 사람에게 돛도 노도 필요 없는 20t 급 발동선 선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 이름을 선장이라 지었다.

이런 사연으로 시작하는 원산 출신의 태항산 전사 김학철 (옌볜 원로작가)의 자전적 소설 ‘격정 시대’가 떠올랐다.
‘사철 쩝쩝한 간내를 풍기는 바닷바람이 부는 까닭에 집에서 쓰는 바늘이고 식칼이고 못이고 장도리고...... 아무튼 쇠붙이 명색이기만 하면 다 걷잡을 수 없이 녹이 슬었다. 샛바람이 세차게 불어 거센 파도가 밀려들 때면 집이 흔들릴 뿐 아니라 방바닥까지 움씰움씰 들놀았다’.

1920년대 전후 원산항 서민의 정경(情景)이 이렇듯 생생하다.
겨울 北西風도 피해가는 어머니 품 같은 해안...
그런데 원산은 겨울의 북서풍이 넘어오지 못한다. 백두대간의 힘찬 산줄기가 버티고 있으므로 함흥, 금야, 천내, 문천, 원산에 이르는 드넓은 평야 지대는 마치 어미 등에 업혀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아이의 복된 형세가 된다.

오른팔 같은 갈마반도와 왼팔 모양의 호도반도에 안겨 나른해 하는 원산항. 거기서 좀 나앉은 듯한 원산 송도원.
그 앞바다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원(圓)을 이루고 있음에 나는 놀랐다. 그것은 한반도 본토 해안선 총 8천 6백 93 km 가운데 어느 해안선에서도 볼 수 없는 圓滿成就(원만성취)의 아름다움이었다.

호도반도와 갈마반도 동쪽 상음 앞바다까지 아우르는 장엄한 교향악 같은 만(灣)이야말로 그렇게 원의 성역이었다. 이런 곳이 근대사 이전의 오랜 세월 방치됐다가 원산 개항을 맞았던 것이다. 그 옛날 예맥시대의 그 하릴없는 몇가호 움집에 살던 이 갯가의 조상들도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그러나 나에게는 안변 석왕사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전설로는 이서계가 無學(무학)을 만난 곳이고 그가 창건한 것이 석왕사라 하지만 그 절은 이전부터 거기 있었다. 다만 그것을 크게 중창한 이성계는 길주의 다른 절에서 5백성중(五百聖衆)과 10대 제자 16나한의 상들을 배에 실어다가 원산포에 부렸고 그것을 석왕사까지 옮겨갔던 것이다.

한말 석왕사에서 朴漢永(박한영)과 한용운이 만나게 된다. 둘 다 여행 중이엇다. 박은 당대 베1의 학승이며 서울 개운사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동국대전신인 중앙불전 학장 노릇도 겸한다.

개운사에서는 식민지시대 젊은 떠돌이들을 어미닭처럼 받아들였는데 이청담 등과 신석정, 서정주 등 승속을 막론했다. 박한영은 한용운이 몹시 싫어한 최남선과도 백두산 등정에 동행했다.

그런 박과 한이 석왕사 이래 주고받은 和答詩(화답시)나 次韻詩(차운시)가 한두편이 아니었다. 시와 시의 우정이 바로 그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수선한 반년이었네/ 나라 날로 기우는데/ 손 하나 못쓰는 우리/ 모였으니 공연한 것/ 하룻밤 등불 밑에 만나 반갑고/ 천고의 흥망이야 아예 말을 말지니’
‘만나니 우리들 뜻 맞아/ 어느덧 해저물고 밤이 되었네/ 눈 속에 주고받는 심상한 말 한마디/ 내 마음 밝기를 물처럼 비췄네’.
다 만해의 돈독한 심경이다. 이런 일을 짚어보고 싶어서도 석왕사행을 청했는데 핑계는 홍수로 길이 끊겨 갈 수 없다 했다. 실제로 북한은 고속도로 말고는 거의 흙길이었다.

송도원 가는 길은 벌써 울창한 소나무숲의 장관이었다. 이 일대가 북한 천연기념물 193호인데 소나무 숲 사이에는 이따금 백양나무들도 공중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삼나무 숲이 길 양쪽으로 이어지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세련된 가로수였다. 긴 시간의 노독이 일시에 풀리며 정신이 번쩍 났다. 안내원은 이 수삼나무는 어버이 수령의 교시로 육성한 것이라 했다.

평양호텔의 구내서점에서 본 대형 사진첩 ‘ 조선의 풍경’에서 황해남도 용진의 수삼나무 장관을 본 터라 그 실감이 새삼스러웠다.
송도원식당의 음식은 정갈했다. 식당접대원이 금강산 가는 우리를 두고 “묘향산은 어머니같고 금강산은 남편 같습니다”고 했다.

본디 6.25당시 전쟁고아 2백50명을 보육하던 곳이 이제는 국제소년단 야영장으로 발전해 그 규모가 여간 아니었다. 1기간 12일을 주로 국내 어린이들을 철저히 단련시키는 이념교육의 해변학교인데 요즘은 텅 비어 있다.

하늘을 가린 소나무숲 수줍은 해당화 미소, 나는 아무래도 송도 백사장으로 나가야 했다. 나보다 먼저 나간 유홍준교수는 그 백사장 望臺(망대)에 올라가 좀 더 먼 데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감탄사 없이는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과연 저 멀리 북쪽에서 내려온 호도반도의 헬레니즘과, 이쪽 갈마각의 헤브라이즘이 아루르는 커다란 품안에서 나는 실컷 안겨있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곳인들 이렇듯이 人文的(인문적)으로 넉넉하고 황홀한 곳에 견줄 데가 있을까.

이제까지 원산은 원산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쪽 송전만과 아래쪽 영흥만의 큰 ‘바다 호수’야말로 어떤 형용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축복의 풍경이었다. 거기에 신도· 해도· 능도 등의 마취된 듯한 섬들이 있어 그것이 이 세상 같지 않았다.

명사십리 해당화였다. 한쪽 가녘에 방금 잠에서 깨어난 원숙한 舞姬(무희)같은 해당화의 분홍빛은 차라리 내 눈에 몽롱했다.

더도 덜도 말고 이 송도원에서 하룻밤만 묵고 갔으면 싶었다. 지난날 내가 안변 석왕사에서 살고 싶다 하자 모윤숙 여사가 내 고향 원산, 송도원에 술집을 낼 것이니 이떠금 내려와 실컷 술 마시고 가라 하던 덕담도 떠올랐다.

나는 그런 송도원 바닷가에서 가자는 사람 없는 듯이 서있다가 갈매기 똥을 머리에 맞았다. 갈매기도 손님 대접을 할 줄 알았던가.
김삿갓의 시는 즉석인데 내 시는 늦어 나오지 않았다.

길고 좁은 원산 시가지를 지나갔다. 일본 오사카항에서 보았던 만경봉호가 원산항에 와있었다. 낡은 함선 가운데서 그것은 혼자 호화로웠다.

거리를 지나가는 학생 취주악대의 행진곡은 어쩐지 공허했다. 지금의 원산은 함경남도가 아니라 강원도 도청 소재지이고 장차 동해의 ‘미학의 서울’이 될 원산은 지금 많이 지쳐있는 도시였다.

글=고은(시인. 경기대대학원 교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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