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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함흥고보(咸興高普) 용산중학 등 교육기관이 창립되었고 이로부터 2년 뒤인 1921년

5월 5일에 원산중학교가 창립을 보게 됐다. 즉 이 당시는 때마침 경원선도 개통되었다.


그러나 동해지방[咸南北]에는 중학교가 없었고 일본인 자제들은 京城(서울)이나 일본 본토의

중학교로 진학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불편한 처지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 아래서

당시 元山의 유지(有志)들 간에는 중학교 설립유치(設立誘致)운동이 대두됐다. 1918년(大正

7년)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독(總督) 북한시찰(北韓視察)을 맞아 원산상공회의소 삼야회

두(杉野會頭)와 서전원산매일신문(西田元山每日新聞)사장 등 유지(有志) 대표들이 원산중학

교 설립의 필요성을강조하는 동시에 특히 元山이 청소년 교육환경(環境)에 적지(適地)임을

역설함으로써 급진전을 보게 됐다. 당시 원산에 있던 일본군수비대(日本軍守備隊)의 병사(兵

舍)를 교사(校舍)로 전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진언(進言)에 총독은 즉석(卽席)에서 내락(內諾

)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뒤 유지(有志)들은 원산중학교설립 기성회를 결성하여 총독부

학무당국과 끈질긴 교섭(交涉)을 벌려 온 끝에 1921년 5월 5일을 기해 드디어 개교를 보게 되

었다.


가교사(假校舍)는 원산부청(元山府聽) 앞 구(舊) 우체국청사(郵遞局廳舍)를 사용하였으며

다음해인 1922년에 장덕산(長德山) 아랫쪽에 새 교사(校舍)의 준공(竣工)을 보게 되었다.


원산중학(元山中學)은 창립당시 한학년 2학급에 정원 100명(뒤에 200명)을 모집했으며 이는

순수한 일인(日人) 자제들을 위한 일인(日人)학교로서 발족 첫해엔 한국인 학생은 단 1명만이

입학이 허용됐던 것이다.


원산중학(元山中學)은 학문과 병행하여 운동에도 열중했으며 특히 원산중학(元山中學)의

『스키』부(部)와 팔팔조(八八組) 『보드레스』부(部)의 설치는 한국내 학교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런데 원산중학(元山中學)은 창립 당시 조선총독부 직할의 관립학교(官立學校)

로서 경성(京城)·부산(釜山)·평양(平壤)·대구(大邱)에 뒤이어 다섯번째의 중학교로 탄생을

보게 됐던 것이다.


다음에 원산중학교의 연혁과 국내외적인 정보를 연도를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921년

5월 5일에 개교

1922년

경성(京城) ~ 원산간(元山間)에 직통전화가 개설되고 당시 불리한 교통통신망에 일대(一大)

혁신을 가져왔다. 이해에 원산중학(元山中學)에는 한국인 학생 3명의 입학이 허용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해에 장덕산(長德山)에 새 교사(校舍)가 준공됐으며 정원은 500명으로
5년제

10학급으로 발족하고 기숙사도 착공됐다. 이 무렵 원산중학(元山中學)은 동해안 유일의

일인(日人) 중학교인만큼 함남북(咸南北), 강원도 지방에서 많은 학생들이 진학해 왔다.

1924년

이해에 한국인 학생들로만 구성된 친목회가 탄생하였으며, 이해 4월에 원산중학교(元山中

學校)는 원산공립중학교(元山公立中學校)로 그 관할이 함경남도(咸鏡南道)로 이관되었다.

1926년

이해에 원산중학 창설이래 첫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때 한국인 학생은 단 1명이 졸업을

했던 것이다. 제2회 입학시에는 전례(前例)를 깨고 한국인 학생 십여명이 입학했다. 이해에

경성제대(京城帝大)는 의학부(醫學部)와 법문학부(法文學部)가 개설되었다.

1927년

이해 제7회 원산중학 입학식에는 한국인 학생은 10명 정도였다. 국내적으로는 제4대 조선총독

(朝鮮總督) 야마나시한조(山梨半造) 대장이 부임해 왔다.

1928년

이해에 와서는 원산중학 개교이래 한국인 학생의 입학생 수는 전례없이 많아 근 20명이 허용

됐다. 이 후 1940년 원산중학이 3학급 편제(編制)로 학급배정을 볼 때까지 가장 많은 한국인

학생수를 점유했다. 그러나 다음해엔 다시 10여명으로 입학생 수가 줄었던 것이며 이처럼

일본인 학교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문호(門戶)는 비좁았다.

1930년

원산중학은 제10회의 입학생을 맞았다. 그런데 원산중학은 이해 3월에 제3대 교장 고바야시

(少林致哲) 교장의 전동(轉動)으로 제4대 교장에 시라이(白井規一) 교장을 맞아들였던 것인데

광주학생(光州學生) 사건의 여파(余波)가 교장경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白井 교장은

1939년 3월까지 원중(元中)에 재직했는데 그의 교육방침은 매우 과단성이 있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때까지는 원산중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해마다 중국 봉천(奉天)·대련(大連)·여순(旅

順) 등지로 코스를 잡았었다. 수학여행 길에서 원산중학 농구부는 대련중학과 친선 경기를

가졌다.


봉천(奉天)수학여행 때는 선두 마차에 배속장교(配屬將校)와 영사관 소속 경관(警官)이 타서

선도역(先導役)을 했고 학생들은 대륙의 풍경과 이국의 정서에 젖었다. 그리고 점심식사는

장학량(張學良)의 별장에 이르는 숲속에서 취했다. 그러나 만주사변(滿州事變)[1931년] 이후

부터는 수학여행 코스도 중지(中止)하고 일본지방 코스를 택하게 되었다.

1932년

이해 신생(新生) 만주국(滿州國)이 일본국군주의(日本軍國主義)의 비호아래 탄생하고 허수아

비 정권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독서회(讀書會) 사건이 발생,

원산중학 한국인 학생들중에서도 이 사건에 가담하여 많은 동료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해부터 수학여행도 변경되어 4, 5학년 학생들이 함께 日本·京都·大阪·神戶·東京 등

지를 견학했다.

1937년

그동안 장기전의 양상을 들어내던 만주사변은 마침내 돌변(突變)하고, 대륙의 전운(戰雲)은

더욱 심각한 판국(版局)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와 함께 동노동원령(動勞動員令)이 내리는가

하면, 학교교련(學交敎練)도 더욱 강화되었다.

도내(道內) 중등학교의 연합연습도 이 무렵부터 시작되어 군사색(軍事色)이 농후(濃厚)

해졌다.

1939년

일제(日帝)는 이무렵부터 소위 내선(內鮮)일체의 구호를 내걸고 우리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여

그들과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을 표면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해에 한국인의 보통학교

의 명칭으로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개칭하였으며 고등보통학교의 명칭도 중학교로 불리

우게 된 것이다.

1940년

이무렵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씨성(氏姓)마져 빼앗아 일본 명식(名式)의

창씨명(創氏名)으로 바꾸도록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한국인 씨성(氏姓)들을 그들의

씨성(氏姓)과 맞도록 창씨(創氏)를 강요 했으며 소위 내선(內鮮)일체의 미명(美名) 아래서

그들은 우리 민족고유의 전통마져 말살하려 들었다.


원산중학은 이해 학급을 배정하여 3학급 편제(編制)로 시설(施設)도 확충했다. 이해 한국인

학생은 개교 이래 수가 가장 많은 30명이 입학했다. 이같은 특례는 당시 원산에서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체력 검정제도가 생겨 각 운동종목에 따라 상(上)·중(中)·초급(初級) 등의

검정합격증을 교부하기도 했다.

1941년

이해 12월 8일 일제는 드디어 미군(美軍)의 해군기지인 『하와이』진주만에 대한 기습공습(奇

襲空襲)을 단행함과 동시에 대미(對美)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의

포문(砲門)을 열었다.

1944년

이해 1월에 학도지원병(學徒志願兵)들의 입대(入隊)가 시작되었다. 강제로 끌려나온 타의(他

意)의 학도병들은 죽음의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학생들도 완전히 임전대열(臨戰隊列) 속에

끼어들고 말았다.

1945년

원산중학은 학급을 증설하고 4학급 편제(編制)로 확충됐다. 따라서 한국인 학생의 신입생

수도 이해에는 약 50명으로 늘어났다.


일제의 패망(敗亡)과 함께 일인(日人) 학생등은 자동적으로 해산(解散)이 되고 당시 1학년서

부터 4학년까지의 한국인 학생은 약 150명 정도가 재적(在籍)되고 있었다. 일인(日人) 학생

들의 철거(撤去)로 텅 빈 학교가 되어버린 원산중학은 이해 9월 초에 약 200명의 편입생을

모집했으니 이때 학생수는 약 400명이었다. 이때 편입된 학생들은 거의가 서울·함남(咸南)·

평양(平壤) 등지에 진학했던 향토(鄕土) 원산 부근 학생들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원산중학은 원산중학동창회가 중심이되고 교장에는 원산중학 제6회 졸업생인

김형규(金亨奎) 박사를 추대(推戴)했다. 따라서 교사진(敎師陣)도 태반(殆半)은 원산중학 졸업

인사(卒業人士)들 중에서 선임(選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국내정세는 『모스크바』삼상

회의(三相會義)에 따르는 신탁통치(信託統治)의 찬반(贊反)을 에워싸고 혼미(混迷)를 거듭했

는데, 김(金) 교장(校長)은 신탁통치의 반대를 부르짓고 38 이남(以南)으로 월남(越南)하고 말

았다. 이때 김(金) 교장(校長)의 뒤를 이어 태반(殆半)의 교사들과 수많은 재학생들도 월남(越

南)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원산중학은 해방 후 『한길』중학(中學)으로 개칭(改稱)되었

으며 얼마 뒤에는 공산당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학교의 명칭도 원산 제3중학으로 개칭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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